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레드 카이젠 1
레드 카이젠 1(1화)
프롤로그
똑똑.
어두운 밀실.
천장에서는 작은 물방울이 아래로 한 방울 한 방울씩 떨어졌다.
치직.
그러나 떨어지던 물방울은 어느 높이가 되자 허공에서 순식간에 증발하면서 사라졌다. 그대로 기화되어 버린 것이다.
“삼백사십이만 오천칠백팔십삼 번째 물방울.”
나직한 음성이 어둠 속에서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지금까지 떨어졌던 물방울을 다 센 듯한 목소리였다.
잠시 후 물방울 몇 개가 다시 떨어졌다. 그러자 그것은 조금 전의 위치에서 증발하며 사라졌고 다시금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숫자를 세던 음성은 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꼬박꼬박 나왔다. 그렇게 몇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세고 있는 숫자도 꾸준히 올라갔다.
쿵.
그때 큰 돌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지하 공간의 위에서 어떠한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지직.
소리에 맞춰 스파크가 일어나며 찰나의 순간 어둠이 걷혔다. 그러자 온몸이 쇠사슬로 묶인 한 남자의 모습이 비춰졌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 사라지고 방 안은 다시 어둠에 휩싸였다.
하지만 한 번 깨진 적막은 쉽게 복구되지 않았다.
쿠쿵 쿵.
나직한 진동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공간이 어둠에 휩싸인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둠과 고요의 장막이 둘려진 이곳에 처음으로 외부의 자극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바람은…… 아니군.”
나직한 음성.
고요를 깨는 작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만약 이런 지하 공간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사람이라면 놀란 마음에 호들갑을 떨 수도 있었고 여기 사람이 있으니 도와달라고 외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밀실의 중앙에 묶여 있는 사람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신경 쓰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바깥의 진동에 맞춰 어두운 밀실 안이 조금 밝아지기 시작했다. 진동이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그러자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온몸을 압박하는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가 디디고 있는 바닥에는 여러 가지 상형문자가 원형으로 그려져 있었다.
우우웅.
짧은 떨림. 원의 외각에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크리스탈이 박혀 있었다.
이것은 하나의 봉인진이었다.
누군가를 마법의 힘으로 가둬 두는 것. 정말로 끔찍하다 할 수 있는 형벌이었다.
끼리릭.
작은 톱니바퀴 같은 것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좌측의 글자가 같이 돌아갔다. 그것은 일종의 시계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쿵.
하지만 단지 월과 년을 가리키는 능력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곳의 시간은 500년 하고 3개월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곳에 묶여 있는 남자는 오백 년이란 믿어지지 않는 시간 동안 이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이미 늙어 죽어도 여러 번 늙어 죽었을 시간. 하지만 그는 젊은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번쩍.
그때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빛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사람의 눈동자라 볼 수 없는 엄청난 안력. 두 눈동자가 흡사 불을 뿜어내듯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지난 오백 년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이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아. 내 일은 내가 처리한다.”
이해할 수 없는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기릭 기리릭.
그가 몸을 움직이자 단단하게 묶여져 있던 쇠사슬이 조금 헐렁해졌다. 하지만 그곳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쇠사슬은 원형의 진의 여섯 방향에서 시작되어 진의 가운데 있는 남자를 결박하고 있었다.
휘익휙!
휘파람 소리와 비슷한 것이 들렸다. 봉인된 남자의 입술이 살짝 달그락거리자 미세한 기운이 원의 가장자리에 있는 아이보리의 크리스탈을 향해 뿜어져 나간 것이다.
은밀하고 재빠른 움직임.
픽!
하지만 그 기운은 흡사 소금이 물에 녹아 들어가듯 진을 유지하는 크리스탈에 스며들었다. 오히려 남자의 기운을 빨아들인 듯 진은 더욱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후.”
짧은 한숨.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자신의 힘과 완벽하게 상성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힘이 강한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으득.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듯 그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이 공간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쿠웅 쿵.
하지만 내부의 침묵과는 별개로 머리 위의 진동은 계속되었다. 잠시 후 드디어 천장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그는 조금씩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존재가 자신에게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었다.
덜컹.
남자의 목에 걸려 있던 은색의 펜던트가 살짝 움직였다. 매우 세밀한 세공이 되어 있는 펜던트에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E. S. 카이젠
“내가 이곳에 갇힌 지 어언 오백 년. 드디어 첫 손님이 오는 것인가?”
카이젠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조금 전 자신의 힘을 빨아먹은 크리스탈을 통해 더욱 힘이 강해진 쇠사슬을 바라보았다.
이 땅에 없는 기묘한 문양이 적혀 있는 그것은 카이젠의 말에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지릭 지릭.
그것은 일반적인 마나 마법과는 달랐다. 물질계에서 존재하기 어려운 상념 에너지. 일명 사이킥 에너지라 불리는 파장을 제어하고 있었다.
카이젠의 몸은 그러한 사이킥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용광로와 같았고 이 쇠사슬은 그러한 사이킥 에너지를 덮는 쉴드와 같았다. 완벽하게 힘이 중화되어 카이젠은 자신의 몸을 빼낼 수 없었던 것이다.
쿵쾅쿵쾅.
조금 전까지 들리던 미세한 진동이 더욱 커졌다. 다급하게 뛰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재밌군. 아마 녀석의 후손일 텐데 어째서 이곳으로 오는 것이지?”
절그럭.
카이젠이 고개를 위로 올렸다. 그러자 그의 몸을 감고 있는 쇠사슬이 다시 한 번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을 미세하게 관찰하며 같이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카이젠의 관심은 자신을 봉인하고 있는 쇠사슬이 아니었다.
수백 년 만에 이곳을 찾아온 방문객에게 있었다.
씨익.
카이젠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 나지막한 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만약 이곳으로 들어온다면 처참하게 죽여 주지.”
Chapter 1. 옛 대군주와의 만남(1)
“헉…… 헉.”
흰색 예복을 입은 소년이 허리를 구부리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안색이 창백한 것이 무리해서 달려온 것 같았다.
입에서는 침이 흐르고 얼굴은 붉어진 상태. 심장이 힘차게 뛰며 온몸에 피를 공급하였으나 힘이 달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소년은 잠시 숨을 돌리면서 벌떡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설마 여기까지 쫓아오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 레오.”
소년의 어깨 위에는 구관조처럼 생긴 작은 새가 올려져 있었다. 레오라 불린 그 녀석은 소년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두 발에 있는 힘껏 힘을 주고 있었다.
퍼덕퍼덕.
레오는 소년이 뛰어가던 것을 멈추자 소년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잠시 소년이 달려온 길을 빙글빙글 돌았다.
“꺄악, 꺅. 그렇다. 그렇다. 그…… 아니다, 아니다. 이퀼라스, 계속 도망쳐야 한다.”
레오가 무언가를 감지한 것 같았다. 그러자 이퀼라스라 불린 소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헉! 정말? 잘못 느낀 것 아니야?”
“진짜다. 진짜다.”
“여기는 직계 황족만이 알고 있는 금지…….”
레오가 틀리길 바라며 이퀼라스가 간절히 물어보았다.
쿠우웅 쿵.
그때 입구의 석벽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벽으로 위장되어 있었던 석벽. 그곳의 비밀장치를 적들이 찾아낸 것이다.
“문이 열렸어? 설마 나를 미행했던 것?”
이곳은 황궁 지하에 깊숙이 숨겨진 비밀의 동굴. 여기만큼은 안전하리라 생각했는데 적들은 자신의 흔적을 따라 여기까지 쫓아온 것 같았다.
적들의 미행 실력을 얕잡아 본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들은 놀라운 추적자들이었던 것이다.
“꺄악. 어서 가자. 어서 가자. 여기 있으면 잡힌다. 잡힌다.”
“제길.”
이퀼라스는 앞을 바라보았다. 기묘하게 꺾여 있는 던전. 반짝거리는 돌들이 박혀 있었기에 아주 어둡지는 않았다. 열 걸음 정도까지의 거리는 앞을 내다볼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 이 길로 가려고 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퀼라스는 이곳을 찾아오게 된 계기를 떠올렸다.
‘목숨을 잃을 위기가 아니라면 절대로 접근하지 말아라. 대신 만약 그곳에 간다면 그곳에 봉인되어 있는 자의 봉인을 풀어라. 만약 제국의 황제가 위기에 달할 정도의 시대가 온다면 그는 충분히 각성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각성으로 인하여 세상에는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다.’
선대로부터 오직 황위 계승을 하게 되는 직계 황족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였다. 어떤 의미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소실되고 오로지 저 문장만이 남았던 것이다.
바스락.
이퀼라스의 팔이 살짝 올라가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러자 옷깃에 박혀 있는 붉은색의 커다란 보석이 드러났다.
엠페러 쥬엘.
황가의 보석으로 황족만이 착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중 붉은색의 보석은 황태자를 의미했다.
이퀼라스는 이곳 다이제스 제국의 황태자였다. 그런 그가 지금 이곳 황궁 지하까지 도망쳐 오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분명 이것은 숙부가 벌인 일이야!”
도망치던 이퀼라스가 중얼거렸다.
호위 기사들이 두 패로 나뉘어 싸움이 붙었다. 하지만 기습을 당한 쪽은 소수였고 갑자기 당한 터라 그들은 하나 둘 죽어 나갔다.
도망치라고 외치는 몇몇 호위 기사들의 외침에 본능적으로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치밀한 계획이란 것을 느낀 이퀼라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부리나케 도망치게 되었다.
밖으로 통하는 모든 통로에 함정이 있었다. 이번 일이 완벽히 계획된 것이란 의미. 그 후 이곳을 떠올린 이퀼라스는 결국 어쩔 수 없이 함정이 없는 이곳, 지하로 달려오게 된 것이다.
이곳은 지하의 밀실. 설마 자신이 이곳으로 갈 줄은 암살단도 몰랐을 것이라 생각했다.
입구에 도착해서도 적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안심하고 이곳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이곳에 숨어 있다가 몇 시간 후 해가 뜨면 분명 자신에게 무언가 변고가 생긴 것이 황궁에 널리 퍼질 것이고 그때 기회를 보려 했지만 자신을 죽이려던 적들은 치밀하고 교묘했다.
그들이 옭아맨 죽음의 길로 자신이 가지 않자 이번에는 자신을 놓친 것처럼 기망하여 완벽히 포위망을 갖춘 것이다.
‘숙부, 진짜로 나를 죽이려는 건가요.’
이퀼라스는 이를 악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머리를 좀 더 굴려 생각해 보니 적은 더욱더 명백해졌다.
쉴트 이하 자신을 죽이려던 자들은 모두 숙부가 배치한 호위 기사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죽게 된다면 차기 황위를 이어받게 되는 것도 바로 그였다.
“나는 이대로 죽지 않아.”
이퀼라스는 이를 악물며 어둠이 감도는 통로로 뛰어 들어갔다. 있는 힘껏 땅을 박차며 손을 흔들었다.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는 삶에 대한 결의였다.
부스럭.
잠시 후 경갑옷을 착용한 기사들이 그곳에 등장했다. 그들의 표정은 매우 신중했다. 발걸음 하나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이퀼라스와 비슷한 흰색의 사제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브레도 대공. 현 황태자의 섭정이었다.
“후. 이퀼라스, 끝까지 속을 썩이는구나. 황궁의 제일 지하에 위치한 이곳까지 쫓아와야 할 줄은 몰랐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브레도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눈앞의 여러 가지 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 설마 내가 몰랐던 비밀통로인가? 지난 십여 년간 황궁을 모두 조사하여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하에 이런 공간이 있었을 줄이야.”
그렇게 말하며 브레도는 약간 고민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퀼라스가 다급한 마음에 단순히 지하로 도망친 것이라 생각해서 오히려 쉽게 생각한 일이었는데 이런 비밀스러운 공간을 보니 일이 엄청나게 꼬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거사가 터졌을 때 네가 이용할 수 있는 길은 모두 열다섯 군데. 그곳의 끝에는 모두 트랩을 설치했기에 그중 한 군데를 이용했다면 쉽게 끝낼 수 있었는데. 왜 어째서 이곳으로 온 것이냐?”
대공의 자문자답이 이어졌다.
목숨을 건 거사였다.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곤란했다. 자신을 지원하며 따르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이었다.
“그들의 암묵적 지원도 만약 내가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즉각 사라질 것이다.”
대공이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