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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카이젠 1(2화)
Chapter 1. 옛 대군주와의 만남(2)
수백 년간 제국의 기둥가문으로 일컬어지는 오대 공작가와 이대 화족가.
그들이 몇 년간 그림자처럼 자신을 지원해 준 자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황태자와 자신 두 군데 모두 줄 서기를 해 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만약 오늘의 일을 실패한다면 그들은 가차 없이 황태자의 편에 서게 될 터였다.
오늘 밤 모든 것을 처리해야 했다.
“기왕에 이렇게 된 것. 우리의 손으로 끝을 본다.”
“알겠습니다.”
대공의 단호한 의지를 읽은 듯 기사들이 빠르게 대답했다.
“그리고 여기라면 소문이 나지 않겠지. 차라리 이곳이 좋다. 완벽히 흔적을 감출 수 있으니까.”
이곳이라면 자신의 직속 부하들을 통해 처리할 수 있었다. 남의 눈에 최대한 띄지 않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 좋았다. 만약 이 광경을 보는 자들은 누구라도 베어 죽여야 했으니까.
“계획은 완벽하다. 가자.”
“예.”
“이제 곧 황위는 내 것이 된다.”
대공이 중얼거렸다.
이퀼라스는 병으로 급사할 것이고 그 후 자신에게 황위를 물려주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황태자와 비슷하게 생긴 소년을 구해 약을 써서 가사상태로 만들어 둔 상태였다.
진짜 이퀼라스를 제거한 후 몸이 아프다는 것을 핑계로 가짜 황태자를 환자로 만든 다음 서서히 말려 죽인다면 그들의 계획은 완벽히 처리될 터였다. 혹시라도 원래 황태자의 얼굴과 약간 달라 보인다는 의심을 가지는 자가 있더라도 와병을 이유로 달라 보이는 것이라 주장한다면 의심을 피할 수 있을 터였다.
“흔적을 찾아라.”
“하압.”
명령이 떨어지자 기사들은 즉각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 대공의 말처럼 이곳에 비밀통로가 있어서 황태자가 빠져나가게 된다면 꽤 번거로운 일이 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들이 해 온 일이 모두 무너질 수 있었던 것이다.
어린아이. 그것도 황태자를 죽여야 한다는 죄책감 같은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그들이 섬기는 주군, 그리고 새로운 황제는 브레도 대공이었다.
“흔적을 찾았습니다.”
발자국을 살펴보던 기사가 빠르게 보고했다. 황태자는 발자국을 그대로 남기면서 도망쳤던 것이다. 미세한 흔적이었지만 기사들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가자.”
결정은 신중히, 행동은 빠르게.
그들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어차피 도망자는 아이였다. 지금까지는 일부러 토끼를 몰듯 느긋하게 쫓았지만 작정하고 잡을 생각이라면 3분이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었다.
* * *
“제길.”
황태자 이퀼라스. 금발머리의 소년은 뒤로 한 걸음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등 뒤로는 딱딱한 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갈 수도 없었다. 앞에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서 있었던 기사들이 반대로 자신을 죽이기 위해 서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너희들이!”
무의미한 질문이었지만 이퀼라스는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답답함이 그의 마음을 휘감았다.
“대공은 어디 있느냐?”
이퀼라스가 소리쳤다.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숙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을 매우 귀여워해 주며 아껴 주던 그가 갑자기 돌변한 것이다.
물론 자신을 죽이고 황위를 얻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렇게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것에 이퀼라스는 치를 떨었다.
쓰윽.
기사들을 대표하여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날카로운 눈빛이 그의 얼굴가리개 안에서 빛나고 있었다.
“쉴트 경!”
이퀼라스가 그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렸다. 자신의 호위대장으로 활약하던 남자였다. 물론 대공이 붙여 준 인물이었다. 그를 신임했던 자신을 한탄하며 이퀼라스는 소리를 질렀다.
“어째서! 왜!”
하지만 쉴트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 이퀼라스의 외침이 잦아들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공께서 저에게 마무리를 하라고 전하셨습니다.”
그 말에 이퀼라스는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구석 건너편에 있는 것이 느껴졌다.
“비겁한! 와서 똑똑히 보라고 하라. 왜 이제 와서 뒤로 숨느냐.”
막상 피를 묻혀야 하는 순간이 오자 대공은 직접 나서지 않고 있었다. 철저히 수하들을 시켜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가는 길에 대한 예의로 고통 없이 죽이겠습니다.”
스릉.
쉴트가 자신의 칼을 뽑았고 그러자 날카로운 검 날이 반짝거렸다.
꿀꺽.
이퀼라스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레오를 먼저 보내길 잘했네.’
이내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을 지은 이퀼라스.
자신의 곁에 항상 붙어 있던 레오를 조금 전 강제로 떨쳐 냈던 것이다. 벽 사이로 작은 틈이 있기에 그 안으로 살짝 밀어 넣었었다.
쉽진 않겠지만 레오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충분히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녀석은 새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똑똑한 녀석이었다.
물론 그것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 사람들은 일반적인 구관조 종류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녀석은 대대로 황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영물이었다.
황위 계승자가 됨과 동시에 녀석을 받는 것으로 초대 황제 때부터 전해져 내려온 종(種)이었다.
황궁에는 이것만 전담하는 자들이 따로 있었고 그들 또한 대대로 수백 년간 그 일만 맡아서 하고 있었다.
그들의 역할은 레오와 같은 새를 키우고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게 될 자에게 그것을 진상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부분의 황위 계승자들은 이런 수여식이 옛 전통이라 생각하고 한 번 새를 본 후 다시 그들에게 관리를 맡기고 신경을 꺼 버렸다.
제국을 통치하기에 바쁜 황제가 새 따위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퀼라스는 달랐다.
너무 어린 나이에 황위 계승자가 되었고 주변에 같이 있을 사람이 없었기에 레오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누가 본다면 새와 친해지려 하는 게 이상하게 보였겠지만 그 덕분에 이퀼라스는 레오의 영특함을 알 수 있었다. 이 새는 친해지기 전까지는 자신의 영특함을 숨기는 재주가 있었던 것이다.
‘꼭 살아남아라, 레오.’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었지만 자신이 죽게 되면 이곳에 홀로 남게 될 레오에 대한 걱정이 이퀼라스의 머릿속에 먼저 들었다.
문이 닫혀 버리면 레오가 이곳을 홀로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이었다. 쉴트와 그 부하들이 자신을 죽인 후 다시 이곳을 빠져나갈 때 재주껏 문틈 사이로 도망치는 것을 기대해 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끝내지요. 고통 없이 보내 드리겠습니다.”
쉴트가 천천히 자신의 칼을 들어 올렸다. 그 말에 이퀼라스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쉴트의 검을 빤히 바라보았다.
검 날이 매우 얇은 특이한 검이었다. 그리고 찌르기에 적합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이퀼라스의 눈동자가 살짝 움직였다.
‘하나, 둘…….’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는 이퀼라스.
휙!
그리고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아직 쉴트의 손이 올라가 있는 상황인데도 먼저 움직인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쉴트의 손목이 움직였다.
이퀼라스는 쉴트의 눈동자의 움직임.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살짝 움직인 그의 어깨 근육. 마지막으로 손목의 변화를 느끼고 칼이 휘둘러지기 전에 먼저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퀼라스의 목숨을 건졌다.
휘익!
서걱.
눈 깜짝할 사이에 찌르기가 들어갔는데 오히려 베이는 소리가 났다.
“크윽.”
데구르르.
이퀼라스는 순간 몸을 비틀어 바닥을 굴렀다. 그러자 원래 심장을 정통으로 찔렀어야 했던 칼이 대신에 어깨를 찌르게 되었다.
“아프다, 으윽.”
처음으로 어깨가 찢겨져 나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었다. 정신이 혼미하고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정신을 잃을 수는 없었다. 이퀼라스는 악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이런. 괜한 짓을 했군요. 어차피 소용없는 일인데요. 두 번째 일격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번엔 날카로운 단검이 빛을 발했다. 쉴트의 말대로 그저 시간을 번 것밖에 안 되었던 것이다.
“오…… 오지 마!”
휘익
하지만 이퀼라스의 외침과는 달리 쉴트의 몸이 순식간에 앞으로 쏟아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얼굴이 자신의 코앞에 놓이게 되자 이퀼라스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제 끝내겠습니다.”
쉴트의 손에 들려 있는 단검이 이퀼라스의 복부를 찌르기 위해 파고들었다.
‘피할 수 없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눈으로 뻔히 보이면서도 이퀼라스는 피할 수 없었다.
쿠르릉.
쿠왕.
“왁!”
“와악!”
그때 그들이 서 있던 땅이 무너졌다. 그대로 아래로 푹 꺼진 것이다. 그 충격으로 쉴트와 이퀼라스, 그리고 주변에 서 있던 기사들이 사라졌다.
“헉! 무슨 일이냐.”
건너편에 서 있던 브레도 대공은 화들짝 놀라 뛰어왔다. 일부러 황태자를 죽이는 자리를 피했는데 쉴트와 부하들이 갑자기 땅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이건 뭐야?”
브레도 대공의 시선에 푹 꺼진 땅이 보였다.
쓰윽.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자 흙더미에 떨어졌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는 쉴트와 그의 부하들, 그리고 구석에서 나뒹굴고 있는 이퀼라스가 보였다.
“저…… 저놈은 뭐지?”
그리고 그의 시선에 온몸에 쇠사슬을 칭칭 감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Chapter 2. 마왕의 깨우다(1)
‘재밌군.’
카이젠은 눈앞에 떨어진 기사들과 소년을 바라보았다. 수백 년 만에 찾아온 손님이었다.
이곳의 정적을 깨는 존재. 마음 같아서는 얼른 저들을 요리하고 싶었지만 좀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과연 어떤 재밌는 모습을 자신의 앞에서 보여 줄지 궁금해진 것이다.
스르륵.
스륵.
카이젠의 몸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흡사 투명인간이 된 것 같았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쇠사슬 더미 또한 같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지직.
자신의 몸을 감싸는 봉인의 힘에 강하게 저항하면 일시적으로 자신의 몸이 투명하게 변했다. 카이젠이 그것을 발동시킨 것이다.
꿈벅꿈벅.
“내가 뭘 잘못 보았나?”
구덩이 위에 있던 브레도 대공은 갑자기 카이젠이 사라지자 눈을 깜박였다.
“희미하게 뭔가 보이는 것 같긴 한데…….”
중얼거리는 대공의 시선에 몸을 일으키는 기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으윽.”
“윽.”
기사들은 온몸을 감싸는 충격에 신음 소리를 내었다. 거의 2층 높이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그나마 아래에 흙더미가 깔려서 충격이 덜했지만 갑자기 떨어진 터라 쉽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빨리 일어나!”
“옙.”
하지만 쉴트의 호통에 그들은 있는 힘을 짜내서 일어났다.
“어깨가 찢어졌군요, 황태자전하.”
단검을 찔러 단숨에 복부 내장을 긁어내기 직전에 바닥이 무너진 것이다. 그 때문에 이퀼라스는 정말 질기게도 목숨을 연장했지만 추락으로 인하여 아까 다쳤던 어깨가 상당히 깊게 찢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이퀼라스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라 정신을 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이런. 충격과 고통에 정신을 놓았군요.”
쉴트의 눈에 어깨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황태자가 보였다. 고통이 심한 듯 근육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무언가에 홀린 듯 자신의 앞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이퀼라스는 쉴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저건 뭐야?”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이퀼라스는 건너편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처음 보는 괴이한 사내였다. 그는 온몸에 기묘한 문양이 적혀 있는 쇠사슬을 감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모습을 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카이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꽤 흥미로운 일이 발생한 것이다.
―내가 보이느냐? 사이킥 에너지로 충만한 내가 너의 시선에 보이느냔 말이다.
“으윽. 윽.”
이퀼라스는 갑자기 머리를 관통하는 진득한 목소리를 참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녀석의 피를 온전히 타고난 녀석이구나. 그렇다면 이 봉인을 풀 수도 있겠지. 이것은 놈의 피를 매개로 해서 만든 것이니까.
‘피. 놈. 매개? 무슨 말이야. 으윽.’
어깨가 찢어진 것보다 머리가 너무 울려서 아프기 시작했다. 이퀼라스는 쉴트가 바로 옆에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머리를 감싸 쥐고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