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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카이젠 1(3화)
Chapter 2. 마왕의 깨우다(2)
“쯧쯧. 고통에 겨워 미쳐 버렸군. 저런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는데.”
쉴트와 그의 부하들은 혼자서 난리를 피우는 것처럼 보이는 이퀼라스를 바라보며 측은하다는 듯한 말을 내뱉었다.
물론 죽여야겠지만 그래도 막상 저렇게 미쳐 있는 상태의 황태자를 죽이려니 조금 머쓱해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그들의 시선과는 상관없이 이퀼라스의 몸은 점차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오너라. 나에게 너의 피를 바쳐라. 그리고 나를 자유롭게 해라.
카이젠의 음성이 이퀼라스의 머리를 다시 한 번 강타했다. 그러자 결국 참지 못하고 이퀼라스의 몸이 몇 걸음 앞으로 튕기며 쓰러졌다.
주르륵.
바닥에 쓰러지자 이퀼라스의 어깨에서 흐르던 피가 빠르게 분출되었다. 흡사 피를 뽑아내는 것 같았다.
“컥…… 컥.”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피가 흐르기 시작하자 몸은 차가워졌지만 정신은 오히려 조금씩 맑아지기 시작했다.
“이제 끝내겠습니다. 너무 오래 끌었군요.”
뚜벅뚜벅.
그제야 이퀼라스는 쉴트의 목소리와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바닥에 누운 채로 천천히 눈동자를 돌렸다. 그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단검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문득 이퀼라스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쉴트는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쇠사슬 괴인은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뭐야? 지금 저 사람이 보이지 않는 거야?’
기이하게도 쉴트와 건너편의 기사들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괴인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비록 자신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라도 저렇게 기묘한 사람이 있다면 관심을 가져야 정상일 터인데 전혀 안 보이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설마 내가 지금 죽을 때가 돼서 죽음의 사신이 보이는 건가?”
나지막한 음성이 이퀼라스의 입속에서 달그락거렸다. 말 그대로 점차 몸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죽음이 가까워져 온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려는 찰나 머리 위에서 대공의 외침이 들려왔다.
“쉴트! 저기 뭐 안 보이나? 희미한 것!”
그 말에 쉴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덩달아 이퀼라스의 눈동자도 하늘을 향했다.
“저기 저거! 뭐 안 보여?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
대공의 손가락은 정확하게 카이젠을 향해 있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쉴트와 기사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대공이 왜 저러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대공의 말이 흘러나오자 그들은 잠시 머뭇거리게 되었다. 분명 대공이 무언가 있다고 소리치고 있는데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잠깐 모두 기다려.”
쉴트의 말에 그들은 긴장하며 그 자리에 섰다.
‘분명 대공은 앞에 무언가가 있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보이지 않는 인비저블 매직이 걸려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쉴트는 자신의 칼을 들어 올려 가슴을 보호하며 소리쳤다.
“대공각하! 적의 위치는 어디인지요?”
“저기다, 저기! 바로 네놈의 똑바로 앞. 서른 걸음 앞.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쉴트는 그 말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조금 전 이퀼라스가 멍하게 바라보고 있던 위치였다.
‘무언가 있다.’
그곳을 집중해서 관찰하니 점차 미묘한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작은 파동이 커지면서 흔적을 드러내고 있었다. 쉴트는 여차하면 달려 나갈 준비를 했다.
“후후. 재밌군.”
카이젠은 나지막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몸을 따라 이퀼라스의 피가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했던 청량감을 주었다.
치직.
치지직.
크리스탈의 면을 따라 흡사 붉은 혈관처럼 핏빛 실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물질계와 사이킥 에너지를 이어 주는 매개체. 이 결계를 만든 자의 후손의 ‘피’가 카이젠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결계를 감싸 왔던 크리스탈이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녀석의 피를 제대로 이어받은 녀석이군. 그 녀석을 꼭 닮았기도 하고.”
카이젠의 시선이 이퀼라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퀼라스와 카이젠의 시선이 마주쳤다.
“저, 저게 뭐야.”
바닥에 쓰러진 이퀼라스는 눈을 껌벅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네 피를 좀 더 취하겠다.
“헉!”
자신의 피를 더 많이 취하겠다는 말에 이퀼라스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지금은 거미줄에 걸린 나비와 같은 상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스륵.
지금까지 흐르던 것보다 두 배 빠르게 피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결계의 사방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카이젠을 묶었던 결계가 이퀼라스의 피에 의해 흠뻑 젖기 시작했다.
“으아악.”
이퀼라스는 비명을 질렀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자신의 심장은 더 많은 피를 뿜어냈지만 그것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손발이 차가워졌다. 피가 부족해서 말라비틀어지는 것이다. 이대로 더 나아간다면 이퀼라스는 미라처럼 삐쩍 말라 죽게 될 터였다.
그때 쉴트가 움직였다.
눈앞에 있던 이퀼라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그것이 쉴트를 움직이게 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만약 미쳐 버린 것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손에 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럴 때에는 선수를 치는 것이 중요했다.
“타합!”
그의 검 끝에서 살짝 빛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블레이드 카터!”
제국에서 손꼽히는 검사의 실력이었다. 비록 보이지 않는 상대라도 실체는 있을 터였다. 인비저블 매직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앞에 있다면 베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적이 있을 만한 범위를 모두 훑고 지나갈 생각이었다. 무리가 갈 수 있었지만 확실하게 적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털썩.
아이러니하게도 쉴트가 움직인 덕분에 이퀼라스는 피가 다 빨려 죽을 뻔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카이젠이 피를 빨아들이던 것을 멈추고 쉴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재밌군. 이게 황실 기사의 수준?’
카이젠이 보기에 쉴트의 실력은 너무나 형편없었다.
스륵.
이퀼라스의 피를 머금기 시작한 이후부터 카이젠의 몸을 감싸던 쇠사슬은 더 이상 그를 구속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이제는 카이젠의 수족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카이젠이 고개를 돌려 쉴트를 바라보자 쇠사슬은 흡사 뱀이 혀를 날름거리듯 쉴트를 향해 쏟아졌다. 보이지도 않는 은밀한 공격이었다.
휘익.
휙!
“으윽.”
쉴트의 검은 무익하게 허공을 갈랐다.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공격이 실패했다는 것을 깨달은 쉴트는 빠르게 검을 회수했다. 그때 등 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왁!”
“크악!”
“컥.”
단말마의 비명 소리. 쉴트는 그 순간 무언가가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것을 느꼈다.
“칫!”
본능적으로 그것을 맞받아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뒤로 돌리며 피했다. 서 있는 자세에서 그대로 몸을 뒤로 뻗은 것이다.
지직!
무언가 채찍 같은 것이 뺨을 가르고 가는 것이 느껴졌다. 피가 뺨을 타고 흘렀지만 지금 그것을 만져 볼 시간은 없었다.
데구르르.
몸을 몇 바퀴 구른 후 칼을 앞으로 비스듬히 뻗으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지지직.
지릭.
크리스탈은 이제 붕괴 직전에 와 있었다. 살짝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 같은 모습. 수백 개의 금이 그것을 감싸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카이젠의 모습이 점차 진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저자는?”
쉴트가 뺨을 타고 흐르는 피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형체가 눈앞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공격이 먹혀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상대를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흘깃.
재빠르게 눈동자를 돌리는 쉴트. 부하들의 상태를 빠르게 확인했다.
“모두 죽었어?”
그의 눈동자에 부하들의 처참한 모습이 보였다. 모조리 머리가 터져 죽은 모습이었다. 조금 전 자신이 당했던 공격에 그들이 먼저 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꿀꺽.
쉴트는 침을 삼켰다. 만약 이상한 기운을 느끼지 못하고 몸을 피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저렇게 죽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살아서 이 자리를 피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으왁!”
“대공각하!”
그때 허공에서 대공의 뚱뚱한 몸이 떨어졌다.
쿠쿵.
“으윽. 아이고.”
추락한 충격으로 인하여 등뼈가 울렁거리자 대공이 신음 소리를 냈다.
기사들이 죽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이곳에서 도망치려 했으나 몸을 돌리려는 순간 무언가 잡아끄는 느낌이 났고 그대로 이곳으로 굴러 떨어졌다.
“우와. 아.”
간신히 몸을 일으킨 대공은 카이젠을 바라보며 입을 딱 벌렸다. 어디서 이런 괴물이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
무엇보다도 황궁의 지하에 이런 자가 있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너는 뭐냐. 혹시 큰 죄를 지어 갇혀 있는 죄수냐?”
대공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어보았다. 황궁에도 지하 감옥이 있었다. 하지만 결코 이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카이젠을 보면 딱 드는 생각이 그것이었기에 물어본 것이다. 그리고 만약 상대가 중범죄를 저질러 갇힌 죄수라면 자신은 그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그러한 질문에 카이젠은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재밌는 녀석이군. 하지만 쓰레기야.’
카이젠이 대공을 찬찬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지난날 수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인생군상들을 만나 보았다. 상대의 말과 행동, 몸짓 등을 보고 그의 성격과 습성, 그리고 쓸 만한 인간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자신을 평가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대공은 카이젠을 향해 배를 내밀며 말했다.
“내가 풀어 주마. 너에게 자유를 줄 테니 나를 섬겨라.”
피식.
대공의 제안에 카이젠이 어이없다는 웃음을 터트렸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대공의 말과 자신의 처지가 묘하게 매치가 된 것이다.
“자유.”
카이젠이 자신도 모르게 짧게 대답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갈구하던 단어였는가.
그러한 카이젠의 모습을 보게 되자 대공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고 생각했는지 더욱 들떠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제국의…….”
“시끄럽다.”
“큭.”
카이젠은 브레도 대공이 더 떠벌리기 전에 그의 입을 막았다. 가볍게 손을 흔든 것이다. 그 순간 대공의 몸이 허공에 떴다.
휘익.
대공의 얼굴은 어느새 카이젠의 손바닥에 닿아 있었다. 흡사 자석에 쇠가 달라붙는 것처럼 딸려 들어온 것이다. 카이젠은 대공의 멱살을 잡고 몸을 흔들었다.
“우워워. 꽤액.”
몸이 흔들거리자 대공은 돼지와 같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때 대공의 눈에 삐쩍 말라비틀어진 이퀼라스가 보였다. 자신이 이곳에 떨어지기 직전에 당한 것 같았다.
‘괴물, 괴물이다. 이놈은 피를 빨아 먹는 괴물인가 보구나.’
만약 저 광경을 보았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망쳤을 터였다. 하지만 쉴트의 실력을 믿고 좀 더 기다리던 대공은 스스로 죽음의 사신을 불러들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네 녀석도 놈의 피를 타고났구나. 하지만 매우 옅군.”
“허억.”
대공은 카이젠의 음산한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숨을 삼켰다. 도대체 놈이란 것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살고 싶어?”
카이젠이 대공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그러자 대공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살아야 황제도 될 수 있고 권력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이젠은 냉혹하게 말했다.
“싫어. 그놈의 자손은 모조리 죽인다.”
“으악.”
휘익!
카이젠의 손이 한 번 더 휘둘러졌다. 공을 집어 던지듯 대공의 몸을 벽을 향해 집어 던진 것이다. 이제 슬슬 끝장을 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세상에 다시 나온 기념으로 네놈을 제일 먼저 죽여 주지.”
“으아악!”
벽에 부딪쳐 죽기 직전 쉴트가 몸을 날려 대공을 받았다.
쿵!
“으윽.”
“괜찮으신지요?”
“헉…… 헉. 그래. 고맙다.”
쉴트를 매트 삼아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그 둘 모두 황실의 지하에 잠들어 있던 괴물의 손에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기 시작했다.
우드득.
우득.
하지만 카이젠은 그런 시선은 무시한 채 서서히 몸의 관절을 돌리기 시작했다. 비록 대공의 목숨이 조금 늘어났지만 언제든지 죽여 버릴 수 있다고 생각되니 조금 여유가 생긴 것이다.
‘천천히 죽음의 공포를 기다려.’
카이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바라보며 감정의 변화를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던 것이다.
과거 수많은 자들의 사형을 집행하면서 그들의 비명 소리를 들었었다. 그때 그들이 느꼈던 절망감, 공포, 분노가 다시 한 번 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아하하!”
손을 뻗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카이젠은 자신의 몸이 점점 자유를 찾아 가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대공과 쉴트는 구석에 몰려 카이젠을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도대체 저건 뭐지요?”
쉴트는 대공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도 몰라. 어디서 저런 괴물이 나타난 거냐.”
대공이 넌더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그때 비쩍 말라비틀어졌던 이퀼라스가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쉴트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분명 황태자는 이곳으로 도망을 쳤다. 그렇다면 분명 무언가 아는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