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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카이젠 1(4화)
Chapter 2. 마왕의 깨우다(3)


이퀼라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으으.”
“당신,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아직 안 죽었군.”
카이젠이 몸을 돌리며 금발머리 소년을 바라보았다.
“목숨이 제법 질기구나. 하긴 그러니 여기까지 왔겠지만.”
그 점은 칭찬해 줘야 했다. 꼬마의 몸으로 이런 추격대를 따돌리고 온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위에서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카이젠이 알 바 아니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어차피 너는 여기서 죽는다.”
앞으로 이어질 미래를 이야기했다. 여기 있는 자들은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분노가 가시려면 엄청난 피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퀼라스는 카이젠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의 봉인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이제 충분히 각성할 시간이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퀼라스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옛날부터 전해져 오던 이야기를 꺼냈다.
“봉인이라.”
씨익.
카이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꽤 당돌한 녀석이군. 아니, 다이제스 녀석을 꼭 닮았어. 그래서 더 화가 나.’
자신을 이곳에 가둔 다이제스.
현 다이제스 제국의 초대 황제.
봉인 해제. 그것은 매우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카이젠은 아쉬울 것이 없었다.
“이미 봉인은 풀렸다. 네 녀석의 선조가 남긴 피. 그것이 계승되어 너를 통해 이곳의 결계를 풀고 있다. 몇 분 후면 완전히 풀리게 될 것이다.”
얻을 것은 다 얻은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카이젠은 자신의 손목을 살짝 비틀었다.
“이제 너는 더 이상 나에게 필요가 없다. 나에게 더 이상 자비를 구하지 말아라. 나의 분노는 산보다도 무겁고 바다보다도 넓다.”
“으윽.”
단호한 카이젠의 태도에 이퀼라스는 할 말을 잃었다.
분명 봉인을 풀면 도움을 받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했는데 이건 오히려 이리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난 격이었다.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이퀼라스를 바라보던 카이젠은 승자의 여유로움을 보이며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네 녀석이 살고 싶다면 어째서 네가 살아남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읊어 봐. 삼 분의 시간을 주지.”
과거 수많은 자들이 카이젠의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발버둥을 쳤다.
‘다이제스 녀석은 악취미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
속으로 카이젠이 중얼거리는 사이 이퀼라스는 온몸의 힘을 짜내며 대답했다.
“분명 저의 선조께서는 당신과 절친한 친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의를 어기고 배신을 했겠지요. 그 점, 제가 사과합니다.”
친구란 말에 카이젠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친구라…… 친구이면서 나의 오른팔이기도 했지.”
“오른팔? 친구?”
어느새 잊혀진 존재가 되어 버린 대공이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말이 맞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괴인은 수백 년 전의 사람이란 뜻이었다.
제국의 초대 황제라 불리며 성황이라 불리는 다이제스. 그가 지금 이곳에 봉인되어 있는 남자의 부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역사서에 드러나지 않았던 숨겨진 인물이 그들의 앞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알고 있던 역사는 상당 부분 고쳐져야 할지도 몰랐다.
잠시 이퀼라스가 가만히 있자 카이젠이 천천히 말했다.
“삼십 초가 흘렀다.”
냉정한 시간 계산에 이퀼라스는 다시 대답했다.
“당신을 이곳에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대대로 황위 계승자를 통해 당신의 존재를 전승해 왔다는 것은 당신을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에도 카이젠은 무표정했다. 그저 누굴 먼저 죽일까 고민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했다. 소년의 말은 카이젠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저 가둬 둔 자가 제대로 봉인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봐! 잠깐. 나와 이야기하자.”
갑작스레 대공이 소리쳤다. 그러자 카이젠의 고개가 그곳을 향했다.
‘저놈,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거냐…….’
하지만 우물쭈물하고 있는 소년보다는 나름대로 훨씬 재밌는 개그를 펼치고 있다고 생각되기에 카이젠은 이퀼라스와의 대화를 잠시 중단했다.
“너에게는 2분이 남았다. 그동안 너를 살려야 되는 이유를 잘 생각해 봐.”
휘익.
고개를 돌리는 카이젠. 그리고 이번에는 대공을 바라보았다.
“네놈에게도 3분을 주지.”
대공은 카이젠의 말에 자신의 말을 들어주겠다는 것인 줄 알고 다급하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는 이퀼라스와 카이젠의 대화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러했기에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지극히 통속적인 제안을 했다.
“나는 이제 곧 이 땅의 황제가 될 것이다. 네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모두 들어주겠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나가게 해 주겠다.”
“호오, 그래?”
퉁명스런 카이젠의 목소리. 하지만 오히려 카이젠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고 생각한 대공은 더욱 힘을 내서 소리쳤다.
“나야말로 정통 황제다. 나는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줄 수 있다. 그러니 저 꼬마 녀석을 죽이고 나를 따른다면 제국의 모든 부귀와 영화는 너의 것이다.”
“하하. 재밌어. 호쾌한 남자군.”
카이젠은 대공의 제안에 흡족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 진동에 벽이 울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 웃음에 담긴 것은 분노였다.
감히! 감히! 이 땅을 지배했던 대군주인 나에게 이런 제안을 하다니.
수많은 자들이 자신의 발치에 무릎 꿇고 자비를 구했었다. 그런데 한낱 돼지비계 같은 녀석이 자신의 앞에서 황제라 칭하고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이어질 더 재밌는 일들을 생각하며 카이젠은 몸을 돌려 금발머리 소년을 바라보았다.
“어떠냐? 저쪽은 저런 제안을 했다. 너는 나에게 무엇을 제시할 것이냐?”
삶과 죽음의 갈림길.
이것이 마지막 질문이었다. 카이젠은 이퀼라스의 말이 끝난 후 모두 죽일 생각이었다.
“저는…….”
잠시 고민하던 이퀼라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에게 제안을 할 처지가 못 됩니다. 다만 선조의 죗값이 있다면 그것을 보상하지요. 더 이상 당신에게 무언가를 바라진 않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이퀼라스. 황태자라 보기에는 너무나 솔직한 모습이었다. 그러자 그 모습에 카이젠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오히려 죽여 달라고 나오니 다소 싱거워진 것이다.
하지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안 죽일 카이젠이 아니었다.
“네 선조의 죗값은 죽음으로 갚아야 한다. 너는 내 손에 죽는다. 죽여 달라고 했으니 죽어도 원한은 없겠지.”
차디찬 음성에 대공은 눈앞의 괴인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여 드디어 이퀼라스를 죽이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무모한 생각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대공의 뇌는 정상적인 연산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촤라랑.
카이젠의 몸을 감싸던 쇠사슬은 이제 그 모습과 위용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솟아올랐다. 지난 수백 년간 그의 몸을 결박했던 쇠사슬은 이제 그의 무기가 되어 있었다.
“어서 놈을 죽여! 죽이라고!”
대공은 반쯤 미친 것처럼 보였다. 그때 쉴트가 재빨리 대공을 잡고 몸을 움직였다.
“대공 조심…… 큭.”
그 순간 날카로운 쇠사슬이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깨달은 쉴트는 재빨리 대공을 안은 채 몸을 움직였다.
아까 전부터 도주를 계획했던 것이다. 대충 눈짐작으로 발 디딜 곳을 봐 두어 대공을 데리고 뛰어갈 생각이었다.
물론 대공을 구하겠다는 생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대공을 방패 삼아 자신이 도망칠 생각이었다.
이미 대세는 그른 상태. 대공이 죽어도 이퀼라스도 같이 죽어 버린다면 어찌어찌 자신의 안위는 보전할 수 있었다.
“타합!”
기합을 내지른 쉴트는 벽의 튀어나온 부분을 튕기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대공의 몸을 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속도의 저하가 없었다. 그의 몸은 흡사 바람이 위로 솟구치듯 유연히 움직이고 있었다.
쇠사슬 공격이 이어진다면 대공을 던져 그것을 막고 그 반동으로 튀어오를 생각이었다. 물론 공격이 없다면 원래대로 대공을 구해서 도망치면 되는 것이다.
“웃기는군.”
카이젠은 쉴트의 계략이 눈에 보였다. 비록 그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카이젠의 손바닥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카이젠의 척살 대상 순서를 정하게 해 주었다.
“내 허락이 없다면 갈 수 없다.”
들어오는 것은 자유지만 나가는 것은 자유가 아니었다. 더구나 인간 방패 따위를 준비한 녀석에게 놈이 원하는 공격을 해 줄 카이젠이 아니었다.
촤라락.
아까의 공격이 직선을 위주로 한 단조로운 공격이었다면 이번에는 휘어진 굴곡 공격이었다. 순식간에 쉴트의 몸을 원형으로 감싸며 쇠사슬이 죄어 오기 시작했다.
“이잇!”
대공을 던져 버릴 타이밍을 놓치자 쉴트는 순간 당황했다.
결국 올라가던 것을 포기하고 다시 바닥으로 내려왔으나 공격이 계속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칼을 휘둘러 공격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으악. 어서 막아라. 이곳에서 도망치자.”
조금 전 자신이 인간 방패가 될 뻔했다는 것도 모른 채 겁에 질린 대공은 머리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쉴트를 믿고 있었지만 이대로는 너무나 위험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쉴트의 검 소리를 들으며 대공은 연신 빠져나갈 길만 찾았다.
“쉴트?”
갑자기 쉴트의 움직임이 멈추고 아무런 말이 없자 대공은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툭. 데구르르르.
“으와아!”
그때 대공의 눈에 잘려 나간 쉴트의 머리가 보였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우드득.
쇠사슬이 그의 몸을 잡아 비틀었다.
흡사 성인 남자가 인형을 손에 쥐고 부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카이젠을 압박했던 쇠사슬. 그것이 이제는 쉴트의 몸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 압력으로 인하여 단숨에 팔이 꺾이고 다리가 기묘하게 돌아갔다.
파칵!
순식간에 인형이 박살 나듯 그의 몸이 찢어졌다.
두드득 두득.
“으아아아!”
찢어진 내장과 피가 대공의 앞에 떨어지자 대공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사인 쉴트와 달리 그는 마땅히 올라갈 방법이 없었다. 이곳에는 문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괴물, 괴물이다. 흐윽.”
퍽! 퍼퍽!
있는 힘껏 벽을 타고 올라가려 했으나 그저 손톱 부서지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어느새 대공의 손가락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평소 시녀들을 통해 관리하던 그의 손가락은 울퉁불퉁한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대공은 어떻게든 벽을 타고 올라가려 했다.
“끝내마.”
카이젠은 벽에 몰린 쥐새끼를 바라보는 표정으로 대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쐐애액.
빠직!
그것이 대공이 느낀 마지막 감각이었다. 순식간에 머리가 부서지며 그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몇 시간 전까지 제국의 주인을 꿈꾸었던 그는 너무나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쉴트와 대공이 죽어 버리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쇠사슬은 카이젠의 손으로 다시 돌아간 상태. 그것은 해바라기처럼 솟아올라 카이젠의 주변을 맴돌았다.
다른 명령을 내려 주길 바라는 모습. 지금까지 카이젠을 속박했던 것이 그의 임무였다면 이제는 카이젠의 수족처럼 그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쇠사슬의 임무가 된 것 같았다.
찌릿.
카이젠의 시선이 이퀼라스와 다시 부딪쳤다.
“이제 네가 마지막이구나.”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우선 눈에 보이는 다이제스의 후손을 죽이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야 했다.
카이젠이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파삭!
그때 드디어 결계의 크리스탈이 부서졌다. 결계가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우우웅.
“뭐지?”
그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결계가 무너지자 새로운 결계가 작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카이젠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몸을 감싸 버렸다.
‘이따위 것.’
하지만 카이젠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것이 단지 30여 분 정도밖에 자신을 묶어 두지 못할 것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이제스 녀석, 무슨 생각이지.”
기껏해야 삼십 분 정도 자신을 더 잡아 둘 생각으로 이런 이중의 결계를 설치한 그의 꿍꿍이속이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