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레드 카이젠 1(5화)
Chapter 2. 마왕의 깨우다(4)
“흐읍. 흡.”
거친 호흡. 이퀼라스는 숨을 헐떡였다.
“이렇게 잔인할 수가. 무언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어.”
이퀼라스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원형의 빛의 덩어리가 눈앞에 있었다.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저 남자는 지금 저 안에 갇힌 것 같았다. 지금 상태에서는 당장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데구르르.
“케엑. 켁…….”
이퀼라스는 드디어 토악질을 했다. 쉴트의 시체가 가장 잔인하게 뜯겨져 있었다. 그의 잘려진 머리를 보게 되자 참지 못하고 위를 게워 내기 시작한 것이다.
“문, 문이 없나?”
어쨌든 대공과 쉴트 일당은 죽은 상태. 일단 어찌어찌 황위를 위협하는 자들은 제거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도 같이 제거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었다.
빛의 구덩이 안에 있는 쇠사슬 괴인이 빠져나오기 전에 이곳에서 도망쳐야 했다. 도움을 받으라는 옛 선조의 말 같은 것은 이미 기억 너머로 날아가 버린 뒤였다.
“끙차.”
조금 전의 대공처럼 이퀼라스도 어떻게든 벽을 타고 올라가 보려 했다. 하지만 벽은 너무나 높았고 무언가 기댈 부분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피를 많이 흘린 상태. 정상적인 상태에서도 오르기 힘든 벽을 지금 올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다.
기잉.
기이잉.
“헉. 벽이 움직여?”
벽이 올라가며 거대한 벽화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매우 오래전에 그려진 것 같았지만 벽화는 아직도 아름다운 색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최고급의 안료를 이용해서 그린 그림들이었다.
그림을 보게 되자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어느 정도는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은 어찌 보면 이퀼라스를 위해 남겨진 것일 수도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글씨가 보였다. 이퀼라스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카이젠? 나의 친구이자 주군?”
적혀 있는 문구를 읽어 나가던 이퀼라스는 드디어 이곳에 봉인되어 있던 자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카이젠.”
그때 카이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놈의 자손은 모조리 죽인다.’
“제길. 엄청난 악연이군.”
이퀼라스가 중얼거렸다. 여기의 그림, 그리고 카이젠이 조금 전에 말했던 사실을 종합하면 자신이 알고 있는 선조 건국 황제 다이제스는 카이젠의 친구이자 수하였던 것이다.
어쩌면 초대 제국의 기틀은 다이제스가 아니라 카이젠이 만든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다이제스가 그것을 빼앗은 것이다. 물론 역사엔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만약 나라도 그런 상황이라면 결코 용서하지 않겠지. 복수를 하려 할 거야.”
이를 악문 채 이퀼라스는 그림을 살펴보았다.
벽에 그려진 벽화는 시간 순으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새로운 역사가 자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저것들? 신들과 싸운 건가?”
이퀼라스는 그림을 빠르게 보았다. 분명히 그림에 그려진 자들은 마르스 신이라 불리는 자들. 불러도 대답 없는 신들이었다.
다이제스 제국의 황족은 언제부터인가 그들의 제사장을 자처하며 민중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그림에서는 그들과 싸우는 인간들이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하늘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난 그림이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어느 순간부터 마르스 신들은 그림에서 사라지고 검은 머리의 한 남자가 기절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닮은 소년이 슬픈 표정으로 그를 동그란 원형의 결계 안에 밀어 넣는 것이 그려져 있었다.
그 후 그 위로는 거대한 황궁이 들어섰다.
“초대 황제 다이제스께서 당신을 봉인한 이곳에 황궁을 건설했군요.”
그림을 보게 되니 그가 가지게 될 증오를 느낄 수 있었다. 만약에 자신의 선조가 그를 이곳에 봉인한 것이라면 그는 적어도 500년간 이곳에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지금 눈앞에 있는 자는 인간을 초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그가 가졌을 분노가 과연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갔다.
“보자마자 당장 때려죽이지 않은 것이 신기하네.”
자신의 목을 매만지며 이퀼라스가 중얼거렸다. 이건 완전히 사자 굴로 뛰어들어 얼굴을 들이민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촤라락.
촤악.
카이젠을 휘감고 있는 빛줄기를 바라보며 이퀼라스가 중얼거렸다. 왠지 저 빛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다.
“카이젠이란 사람이 밖으로 나오는 순간, 난 죽는다.”
이퀼라스는 조금 전 대공을 단숨에 죽였던 카이젠을 떠올렸다. 이유를 몰랐으면 모를까 지금 이대로 있다가는 자신도 죽게 될 것이 분명했다.
‘무언가 이야기가 잘못 전승된 것이 틀림없어. 절대 내려가지 말라는 말이 와전된 것일 거야.’
오랜 기간 전승되다 보니 그런 오류가 생길 수도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무조건 카이젠의 곁을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사자가 바로 옆에서 기지개를 펴고 있는데 사방이 막혀서 오갈 데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펄럭거리는 날갯소리가 들려왔다.
“끼룩. 끼룩.”
“레오!”
딱 따딱.
“아얏. 아얏.”
“끼룩. 나를 버리고 가다니, 가다니.”
레오는 화가 난 듯 이퀼라스의 이마를 쪼기 시작했다. 따끔거렸지만 이퀼라스는 지금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어떻게 이곳을 나갈 방법이 없겠니?”
막막했기에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보았다. 지금으로서는 레오의 영특한 능력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끼룩. 날아서 가면 되지.”
“난 날개가 없잖아!”
자신의 입장을 생각해 보라며 이퀼라스가 소리쳤다. 레오는 다 좋은데 주인을 가지고 놀리는 성격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레오와 농담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길이 보인다. 길이 보인다.”
“뭐?”
갑자기 길이란 말에 이퀼라스는 고개를 돌려 레오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것? 길이었어? 그림이 아니라?”
석화 사이에 작은 길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이 너무 세밀하다 보니 그림의 일부로 인식한 것이다. 가까이 다가간 이퀼라스는 어둠이 쭉 이어져 있는 긴 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화락.
바람이 불어왔다. 차가운 바람.
“밖으로 연결되어 있구나.”
“끼릭. 가자, 가자. 여긴 왠지 무섭다.”
“응.”
이퀼라스는 두말할 것 없이 레오와 함께 이 자리에서 도망쳤다. 우선 황궁에 돌아가야 어떻게든 일을 처리할 수 있을 터였다.
Chapter 3 과거와의 만남(1)
“네 녀석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몰라도 이런 것 따위 단숨에 뚫어 주지.”
지잉.
카이젠의 손이 올라가는 순간 빛의 파동이 출렁거렸다.
[오랜만이군요, 카이젠.]
“흐음. 네 녀석.”
그때 카이젠의 눈앞에 금발머리의 소년이 나타났다. 이퀼라스와 닮은, 그러나 분위기는 사뭇 다른 소년이었다.
“나에게 전언을 남긴 것인가? 다이제스.”
카이젠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실체가 아니라 수백 년 전의 기록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카이젠이 이 결계를 해제하기 위해 움직이는 순간 자동적으로 나오게 되는 것 같았다.
[이것이 발동되었다는 것은 당신이 드디어 성찰을 마쳤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사라진 다음 제가 세운 제국이 황제나 황위 계승자가 당신을 찾아와야 할 정도로 어려워졌다는 것을 뜻하고요.]
“하긴. 콩가루 집안이 다 되었더군. 네놈의 피를 이어받은 녀석들이 그 정도밖에 안 될 줄은 몰랐다.”
카이젠이 생각하는 황권의 이미지와 비교한다면 너무나 어이없는 일이었다.
섭정을 맡고 있는 숙부가 황태자를 죽이려 든 것이다. 그리고 황태자란 녀석은 자신의 호위 기사 또한 제대로 선정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비록 급박한 계승 상태라 할지라도 제국의 황권이 얼마나 약해졌는지 잘 나타내 주고 있었다.
“이런 상태라면 땅덩어리도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겠지. 귀족들은 황제를 먹어 치우려고 발호하고 있을 것이고.”
인간의 습성은 독립.
제국이 오랫동안 유지되려면 강력한 황권으로 그런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아마도 자신이 봉인된 후 카이젠이 건국한 거대한 제국은 몇 개로 갈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 한 곳이 다이제스 제국일 터였다.
그래도 갈라졌다 치더라도 다이제스 제국의 규모는 상당했을 터였다. 대륙의 중앙부에 위치한, 지리적으로 유리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쯤은 옛날 영토의 반의반도 제대로 가지고 있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다이제스, 도대체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잠시 카이젠은 기다렸다.
과연 다이제스가 무슨 말을 남길지 궁금해진 것이다. 수백 년을 기다린 터에 몇 분을 더 못 기다릴 이유는 없었다.
[당신은 지금 사이킥 에너지와 혼합된 상태. 어쩌면 우리의 적인 천족과 비슷한 상태로 머물러 있을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 그랬기에 내가 그렇게 고생했잖아. 바로 네 녀석의 봉인으로 인하여.”
카이젠이 으르렁거렸다. 가장 믿었던 자에게 배신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신은 저에게 배신당했다고 여기실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누구보다도 슬픕니다.]
“칫.”
진짜로 영상에 나온 다이제스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감정을 느낄 수 있었기에 카이젠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제가 계속해서 말렸지만 당신은 끝내 천계를 향해 달려가셨습니다. 그리고 봉인 전의 당신은 천족들과 싸워 이길 수 없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소멸하게 된다면 지상계는 끝장입니다. 수백 년, 아니 천 년이 넘게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카이젠 폐하, 당신을 봉인하겠습니다. 당신이 각성하고 천족과 싸워 이길 정도로 현명해지시기 전까지.]
“제길. 예전에는 현명하지 않았다는 거냐.”
카이젠이 툴툴거렸다. 하지만 그 말에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오직 승리뿐.
그것이 카이젠의 신조였다. 그리고 그것은 대륙을 통일할 때까지는 통용되었다.
하지만 천족과의 싸움은 달랐다.
이질적인 힘을 지닌 존재와 싸운다는 것은 인간들과의 싸움과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다이제스는 카이젠을 말리고 말렸다.
우선 그들을 연구하고 분석한 이후에 싸워야 한다고 계속해서 말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천족이 왜 지상계를 침략한 것인지부터 파악해야 하며 또한 그들이 지상계로 나오는 출구인 워프 게이트를 봉쇄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카이젠은 다이제스의 의견을 무시했다.
자신에게 도전장을 내민 적은 반드시 격살해야 했다. 다이제스가 제시하는 방법은 그의 신조와 맞지 않았다. 그러했기에 결국 그들과 최후의 담판을 짓기 위해 나선 것이다.
하지만 카이젠은 천족의 세계를 정벌하기 위해 그들의 워프 게이트를 치려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이제스의 배신.
결국 워프 게이트는 카이젠의 힘과 함께 폭발했고 카이젠은 지상계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지상계로 떨어진 카이젠을 다이제스는 재빠르게 봉인한 것이다. 그의 힘을 지워 버리고 죽은 것처럼 처리한 것이다.
다이제스는 제국의 수뇌부에게 대군주 카이젠의 힘만 감출 수 있다면 천족이 이 땅에 올 일이 없고 무리해서 워프 게이트를 열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 단언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카이젠이 소멸되어 버린 것처럼 보이자 신기하게도 천족들은 지상계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현재 당신의 분전 덕분에 천계와 이어지는 워프 게이트 또한 붕괴된 상태입니다. 천족들 또한 굳이 그들을 위협하는 당신이란 요소가 지상계에 등장하지 않는 한 워프 게이트를 다시 열기 위해 그들의 에너지를 소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우리 인간들이란 존재는 미약하고 미약한 존재들이니까요.]
“그러니까 왜 그들이 그런 짓을 벌인 것이지? 대답해라. 네 녀석이 무언가 찾아낸 것이 있으니 감히 나를 미끼로 삼는 그런 만행을 저지른 것 아니냐.”
하지만 카이젠의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지금의 영상은 수백 년 전에 미리 남겨진 것. 지금 보이는 다이제스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할 뿐이었다.
그러자 카이젠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차피 내가 이제 나가게 되면 천족들이 나의 기운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물론 바로 당장은 아니더라도 1년이면 그들은 내가 부활했다는 것을 충분히 알게 될 것이고 워프 게이트를 다시 열려고 하겠지. 그렇게 되면 3년 후에는 다시 한 번 이 땅에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세상이 불길에 휩싸이는 대전.”
카이젠은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차피 두렵진 않았다. 이번에는 반드시 그들과 싸워 이기겠다는 마음만 가득했다.
“이제는 적어도 그들과 같이 소멸할 수는 있으니까.”
이곳에 있으면서 카이젠이 생각한 것. 그것은 천족의 완벽한 몰살. 그들과 어떻게 싸울 것인지에 대한 고민만 가득했었다.
그리고 몇 가지 방법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시간.
만반의 준비를 해서 싸우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천족들이 그사이에 가만있지 않을 것이란 것이 문제였다. 결국 가장 빨리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에게 피를 강요하지 않는다. 천족들은 내가 반드시 처리한다.”
카이젠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에 결단이 그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