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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카이젠 1(6화)
Chapter 3 과거와의 만남(2)
그가 생각한 가장 빠른 방법은 양패구상.
천족들이 워프 게이트를 여는 순간 그곳으로 먼저 들어가 그들의 세계 자체를 폭파시킬 계획인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천족들 또한 모조리 소멸될 터였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나도 죽겠지만.’
자신을 매개체로 하여 벌이는 일이었다. 흡사 물질계에 반물질을 던져 놓는 것과 마찬가지의 공격. 무조건 천족들을 쓰러뜨리겠다는 카이젠의 일념이 그런 극단적인 방법까지 강구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수백 년간의 성찰은 그에게 많은 것을 반성하게 해 주었다.
결국 천족과의 전쟁이 자신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이라면 그 일을 벌인 자신이 매듭을 지어야 했다. 그것이 지배자이고 이 땅의 주인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인 것이다.
그때 다이제스가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얼굴에는 비장함이 가득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니 그럴 가능성이 조금, 아니 많이 있겠지만. 아마 당신은 자신을 매개체로 하여 천족계를 완전히 날려 버릴 생각을 하실지도 모르겠군요.]
“하하.”
카이젠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 녀석은 정말 사람의 생각을 읽는 것 같았다.
이미 죽은 녀석이 살아 있는 자신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수백 년간의 성찰이 당신을 강하게 했을 것입니다. 새롭게 깨어난 당신은 예전의 당신이 아닐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배려해 주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천족의 힘인 사이킥 에너지와 당신의 근원 에너지인 카타르시아 모두를 사용 가능하게 되었겠지요.]
“이 녀석, 수백 년 후를 모두 내다본 것이냐?”
지상의 모든 지식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천재소년. 자신의 군사로, 친구로, 그리고 오른팔로 활동하던 다이제스였다.
이곳에서 봉인된 채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다이제스에게 당했다고 생각했으나 봉인이 풀리면서 느낀 것은 일부러 다이제스가 자신에게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추측은 지금의 영상으로 인해 확신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제 당신은 자유입니다. 또한 지금까지 당신을 봉인하는 데 사용되었던 안티 사이킥 에너지 또한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이제스의 말에 카이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쉬리릭.
카이젠의 몸을 결박하는 데 사용되었던 쇠사슬은 어느새 투명한 에너지의 형태로 카이젠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예전의 그것은 카이젠의 몸을 옥죄는 데 이용되었지만 지금은 카이젠의 몸을 보호하듯 칭칭 감싸고 있었다.
[계속해서 그것을 자유자재로 활성화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세요. 당신은 반드시 천족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말했죠. 이기는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이기고 싸운다고요.]
“미리 이기고 싸운다라……. 네 녀석 무언가 또 준비한 것이 있는 거냐?”
카이젠은 아직 그의 말이 끝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 부탁을 하나 하지요. 당신을 깨운 제 후손을 지켜 주세요.]
그 말에 카이젠이 고개를 저었다.
“다이제스 녀석. 세상일이 네 마음대로 되는 줄 알아? 똑똑한 녀석이 흔히 빠지는 오류가 자신이 생각한 대로 모든 일이 다 풀릴 것이라 믿는 것이라니까.”
혀를 차는 카이젠. 처음의 화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지만 이건 그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카이젠이 직접 지켜 준다는 것은 의미가 남달랐다.
[부탁합니다.]
영상으로 나타난 다이제스가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하지만 카이젠은 요지부동이었다.
단칼에 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큰 은혜라 생각하는 것이다.
“웃기는 소리. 내가 애나 돌봐 주는 사람인 줄 알아?”
카이젠은 말도 안 된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당신을 깨운 저의 후손은 특별합니다. 그가 오래 살아 있어야 당신의 존재가 천족들의 눈에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을 것입니다.]
“응?”
문득 카이젠의 귀가 솔깃해졌다. 약간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지금 카이젠이 원하는 것은 천족들과 완벽하게 싸울 준비가 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땅한 방법이 없는 상황. 그런데 다이제스는 자신의 후손을 지켜 준다면 카이젠이 천족들의 감시망에 걸리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당신의 봉인을 해제한 것은 바로 제 후손의 피. 그 봉인을 풀었다면 저의 진혈을 이어받은 직계입니다. 하지만 봉인은 완전히 해제된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의 결계가 당신을 감싸고 있지요. 그것은 천족들에게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게 도움을 줄 것입니다.]
싱긋 웃으며 다이제스의 입이 다시 열렸다.
[도와주세요, 카이젠. 나의 주군이여. 제가 만든 제국은 당신의 제국에 비하면 파도 위의 조각배 정도밖에 안 되지만 저도 남자로 태어나 제 이름을 딴 제국을 건국했고 그리고 그것이 이 땅에 오래오래 있어 주길 원하고 있습니다.]
“이 녀석.”
카이젠은 다이제스의 이런 면을 처음 본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싱거운 녀석은 아니었네.”
자신의 제국이 오랫동안 번영하는 것을 기원하는 것은 당연한 본능이었다. 자신이 잘 몰랐던 다이제스의 일면을 보고 있다는 생각에 카이젠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다이제스는 카이젠에게 제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지는 카이젠의 결심에 달려 있었다.
“으음.”
천족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과 다시 싸우기 위해서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그리고 그 계획들은 수백 년간 카이젠이 머릿속에서 그리고 그려진 상태였다.
“뭐 좋아. 꼬마 하나 돌봐 주는 거야 어렵지 않으니.”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카이젠도 이득을 얻는 것이다. 천족과 싸울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잠시 동안 이 땅의 사람들과 어울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오백 년간의 봉인이었다. 몇 년 동안 천족과 싸울 준비를 하면서 인간 세상에 살짝 들어가 그들과 어울리는 유희를 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카이젠이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좋다. 녀석을 지켜 주지. 그래야 나 또한 천족들을 속일 수 있으니까.”
결코 공짜는 아니란 것을 강조했다. 그러자 카이젠의 승낙에 반응했는지 다시 말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카이젠이 대답을 하는 순간 영상이 넘어가게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카이젠. 그리고 당신이 사용하던 무기는 각 지역의 수호부족에게 맡겨 두었습니다. 그들이 옛 언약을 잊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무사히 보관했을 것입니다. 다만 아무래도 시간이 꽤 흘렀다면 몇몇 물건의 경우 계승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흐흐. 만약 나의 물건을 제대로 보관하지 못했다면 그들은 지옥을 보게 될 것이다.”
카이젠이 웃으며 말했다.
[또한 제가 천족에 대해 조사하여 알게 된 사항들도 각 무기들을 봉인했던 곳에 같이 남겨 놨습니다. 그것을 참고한다면 천족들과 싸울 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며 제가 왜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썼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천족에 대해 조사했다는 말에 카이젠의 눈이 빛났다.
“후. 과연 어떤 정보를 찾아냈는지 기대하지.”
[그럼 새로운 세계에서 당신의 새로운 도전을 기대합니다, 나의 주군이며 친구였던 피의 황제 카이젠.]
파아앗.
다이제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카이젠의 몸을 감싸고 있던 빛이 사라지고 밖을 볼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이미 십여 분 전에 이퀼라스는 레오와 함께 도망친 상태였다. 카이젠은 어느새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그럼 가 볼까.”
카이젠이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카이젠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사락 삭.
덜컹.
카이젠의 몸을 감싸던 쇠사슬이 검은색의 갑옷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온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산발이었던 머리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고 얼굴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상태였다. 하지만 갑옷과 무기는 하나도 없는 상태. 다이제스가 다른 곳에 봉인해 둔 것이다. 카이젠은 지금 당장 자신의 몸을 감쌀 갑옷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카이젠이 사용하는 사이킥 에너지를 물질화시키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 공격무기로 사용하던 그것을 자신의 몸을 감싸는 도구로 써서 갑옷으로 만든 것이다. 사실 반나체나 다름없던 카이젠이었다. 그대로 나갈 수도 없었다.
잠시 후 카이젠은 단단한 갑옷을 입은 강인한 모습의 기사로 탈바꿈했다. 얇은 얼굴 보호대 사이로 차가운 눈빛만이 쏘아져 나올 뿐이었다.
“괜찮군.”
카이젠은 천천히 자신의 팔을 흔들어 보았다. 그리고 오른발을 들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처럼 몸이 가볍고 편했다. 육중한 갑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움직이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허리를 돌려 보던 카이젠은 꽤 마음에 드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예전의 갑옷 가르만디아를 떠올리며 비슷하게 만들었는데 이거 가르만디아보다 움직임 면에서는 더 편한 것 같은데?”
하지만 가르만디아는 가르만디아 자체의 고유한 특성이 있었다. 겉모습은 비슷하게 만들어도 그것의 본래적 특성까지 가져올 수는 없었다.
“뭐 좋아. 일단 여기까지.”
잠시 자신의 갑옷을 만져 보던 카이젠은 오른쪽 가슴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사라락.
그러자 무언가가 새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카이젠이 손을 떼자 그곳에는 번개가 쏟아지는 문양이 새겨졌다. 자신이 거느리던 근위 기사단의 표식이었다.
일명 뇌격 기사단이라 불리는 자들.
카이젠은 그들을 이끌고 오백 년 전 대륙을 일통하였다. 그 뇌격 기사단의 마크가 다시 한 번 이 대륙에 등장한 것이다.
오른쪽 가슴에 새겨진 마크를 만지던 카이젠은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스륵.
얼굴 보호대가 내려왔다. 그러자 카이젠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시선이 앞의 석벽으로 향했다. 조금 전 이퀼라스가 보고 감탄했던 그림이 카이젠에게도 보였다.
“크크큭. 다이제스 녀석.”
카이젠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다이제스는 치밀하게 여러 가지를 준비해 두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의 봉인이 풀리자마자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지금은 녀석의 피를 이어받은 꼬마를 잡아야 하는군. 애먼 칼에 죽어 버리면 나 또한 손해니까.”
카이젠이 중얼거렸다. 이미 이퀼라스는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카이젠은 이퀼라스가 어디로 갔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휘익.
“바람의 흐름이 느껴진다.”
석벽의 작은 틈을 따라 길이 보였다. 깜깜하고 어두운 길이었지만 카이젠에게는 아무런 제약도 주지 않고 있었다.
“가 볼까.”
쿵. 쿠쿵.
카이젠은 결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오백 년 만에 이곳을 벗어나게 된 것이다. 카이젠은 과연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다.
* * *
“헉. 헉.”
어두운 동굴. 이퀼라스는 빠르게 뛰어갔다. 무엇이 앞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지금 상황에서 함부로 뛰어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지만 이퀼라스는 거침없이 달려갔다.
“끼익. 끽. 오른쪽으로.”
“응.”
달려가던 이퀼라스는 살짝 손을 뻗으며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비스듬히 틀었다. 그러자 손바닥에 차가운 동굴의 감촉이 느껴졌다.
만약 그대로 달려갔다면 벽에 부딪쳤을 터였다.
“이대로 쭉 가면 되지?”
“끼익. 그렇다. 그렇다.”
점점 더 차가운 바람이 진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달빛으로 짐작되는 미약한 빛이 끝에서 비춰지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은 만월의 밤. 달빛이 이렇게 반가운 적은 처음이었다.
달빛이 자신을 인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며 이퀼라스는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을 꾹 참고 뛰어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까 전에 피를 많이 빼앗긴 상태. 그래도 이렇게까지 뛰어올 수 있었던 것은 죽기 싫다는 이퀼라스의 발악이었다. 이곳에서만 도망치면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이퀼라스는 지금이라도 쓰러져 자고 싶다는 생각을 떨친 채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달리고 있는 것이다.
투다다닥.
마지막 입구는 허리를 굽히고 간신히 지나가야 했다. 누가 본다면 오소리 동굴 정도로 볼 정도로 작은 구멍이었다.
하지만 이퀼라스로서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설사 카이젠이라는 괴물이 이곳으로 온다고 하더라도 이 좁은 길을 쉽게 빠져나오긴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끄윽.”
어깨가 아팠다. 상처 부위에서는 이제 진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피는 멎은 것 같았지만 상처가 썩어 갈지도 몰랐다. 어서 빨리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퀼라스는 몸을 수그려 간신히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드디어 밖이다.”
이퀼라스가 만세를 하듯 손을 위로 쭉 뻗어 올렸다.
“아얏. 아파. 그래도 좋아.”
팔을 제대로 들어 올릴 수 없었다. 그래도 살았다는 생각에 숨을 크게 내쉴 수 있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이렇게 반가운 적은 처음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달도 아름다웠고 눈앞에 보이는 허리 높이의 풀들도 아름다웠다.
“하아, 하.”
자신도 모르게 꽤 오랫동안 풍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를 펴며 숨을 크게 들이쉬자 이퀼라스는 그제야 밀렸던 피로가 한 번에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비틀.
저혈압으로 인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잠시 발이 꼬여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이런. 조심해라, 꼬마야.”
휘익.
이퀼라스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자신의 오른편에 한 기사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검은색의 갑옷을 온몸에 휘감고 있는 남자였다.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려던 이퀼라스는 입을 다물었다. 이곳이 어디이고 지금 상황이 어떤지, 그리고 상대가 누군지 알기 전까지는 함부로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