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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카이젠 1(7화)
Chapter 3 과거와의 만남(3)
‘누구지?’
현재 이퀼라스의 옷은 흰색의 예복. 지금 이퀼라스를 얼핏 본다면 예식을 마치고 나온 평범한 귀족 소년의 모습이었다.
상대가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모를 것이라 생각한 이퀼라스는 눈앞의 기사를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았다.
“무엇을 하고 있지요?”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달구경.”
그는 진짜로 달을 구경하러 나온 사람처럼 하늘에 떠 있는 만월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퀼라스는 그의 소속을 알기 위해 눈을 돌려 그의 오른쪽 가슴을 바라보았다.
제국에 속해 있는 기사라면 제국의 기사임을 나타내는 표식이 있을 터였다.
대략 다섯 가지의 표식이 있었고 그 외 표식들은 기본 다섯 가지 표식에서 약간씩 변형된 것인지라 구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검은색의 갑옷을 입은 남자의 가슴에 새겨진 것은 처음 보는 표식이었다.
이웃 왕국의 기사단이 착용하고 있는 표식도 떠올렸지만 저것과 유사한 것은 없었다.
‘검은 머리카락.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그리고 새까만 갑옷과 번개의 표식. 이 땅에 저런 기사단이 존재했었나?’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퀼라스는 우선 그에게 도움을 받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지금 두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과도한 움직임을 보인 것이 이제 슬슬 피로가 되어 몰려오고 있었다.
‘우선 친숙하게 말을 건 다음 황궁까지 동행을 부탁해야겠다.’
일단 자신의 신분을 밝히긴 어려워도 대충 황성 입구까지 같이 가 달라고 하는 것은 부탁하면 들어줄 것 같았다. 이렇게 당당하게 갑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신분도 확실할 터였다.
먼저 부탁을 하려면 말이 잘 통해야 했다. 이퀼라스는 가장 말을 걸기 좋은 소재인 풍경과 날씨를 가지고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풍경이 정말 아름답지요. 달이 저렇게 밝다니…… 그냥 잠들었다면 몰랐을 거예요. 정말 아름다운 밤이네요.”
이퀼라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었다. 평소 잘 쓰지 않던 평어를 자연스럽게 쓰려고 하니 힘들었다. 하지만 이퀼라스는 여특한 아이였다. 지금 자신이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는 어떠한 말을 하고 행동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화답하면 재빨리 황궁으로 같이 가 달라고 부탁하려 했다.
휘릭.
몸을 돌리고 달을 바라보고 있던 기사가 이퀼라스를 향해 말을 꺼냈다.
“나도 동감이다. 바깥 풍경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오백 년 만에 알게 되었다.”
“쿨럭.”
오백 년이란 말에 이퀼라스는 순간 헛기침을 했다.
스륵.
카이젠은 자신의 얼굴가리개를 들어 올렸다.
“그사이에 꽤 멀리 왔더군. 참, 내 이름은 벽화에서 보았으려나? 카이젠이라고 한다.”
“끄아. 설마 아까의 그?”
쇠사슬 괴인이란 말이 나오기 전에 이퀼라스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간신히 도망쳐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자 지금까지의 피로가 한꺼번에 그의 머리를 후려친 것이다. 결국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털썩.
“응? 뭐야. 이 녀석 겉보기와 달리 왜 이리 약해.”
자신이 피를 엄청나게 뽑아냈다는 것이 떠오른 카이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숙였다.
스륵.
이퀼라스의 이마를 만져 보았다. 열이 심하게 나고 있었다. 어깨의 상처도 썩기 시작한 것 같았다. 손발을 만져 보니 머리와 달리 차가웠다. 피가 모자란 것이다.
“끼익. 끽. 이퀼라스를 살려 내라! 살려 내라!”
카이젠이 몸을 숙이자 이퀼라스의 주머니 안에 박혀 있던 레오가 뛰쳐나와 카이젠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응? 너?”
카이젠이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봤다는 표정을 지었다.
“키보!”
휙 휘릭.
카이젠은 레오를 가리켜 키보라 부르며 손을 뻗어 잡으려 했다. 하지만 레오는 재빠르게 카이젠의 손을 피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와락.
손바닥을 레오를 향해 뻗은 채 가만히 있자 몇 초 지나지 않아 레오의 몸이 흡사 자석에 철이 이끌리듯 끌려와 붙어 버렸다.
“꽤액. 꽥. 어서 나를 풀어라. 풀어라.”
“조용히 해, 키보.”
“내 이름은 키보가 아니다. 레오다.”
“그래, 그럼 레오라 불러 주지.”
카이젠은 재밌는 장난감이 생겼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소개했다.
“내 이름은 카이젠. 수백 년 전 네 선조의 주인이다.”
“키익. 난 그런 것 모른다. 모른다.”
갑자기 카이젠의 손에 붙잡히자 레오는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한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궁에 있을 때에도 자신을 관리하던 인간들은 혹여라도 자신이 잘못될까 봐 애지중지하며 자신을 키웠다. 그리고 이 제국의 주인이 될 이퀼라스 또한 자신의 친구라 여기며 간간이 놀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 카이젠이란 남자는 무언가 불길했다. 그를 볼 때마다 숨이 막혔고 엄청난 공포가 몰려왔다. 자신의 피에 내재되어 있는 근원적인 공포였다.
그리고 레오는 잠시 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따끔. 따끔.
“끼익! 끽! 살려! 레오 살려!”
비명을 지르며 레오가 발버둥을 쳤다. 카이젠이 그의 털을 하나씩 뽑기 시작했던 것이다.
“끼릭. 무슨 짓이냐.”
“네 녀석이 할 일을 안 하니 그런 것 아니냐.”
“끼릭?”
“털 다 뽑힌 후에 일할래. 어서 저 녀석 치료해라.”
카이젠은 레오에게 이퀼라스를 치료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끼릭. 나의 능력은 함부로 써서는. 끼리릭!”
따끔.
카이젠은 뭐라 뭐라 떠드는 레오의 깃털을 하나 더 뽑았다. 그리고 아까와 달리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필요 없는 녀석이 돼 버렸다면 살려 둘 필요가 없지. 털을 다 뽑은 다음에 뜨거운 기름에 튀겨 버리겠다.”
지금까지 누구도 보여 준 적 없었던 태도. 카이젠은 레오를 번쩍 들어 올려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끼이…….”
레오는 그 눈빛에 완전히 얼어붙었다. 그리고 달달 떨기 시작했다. 진짜로 자신의 털이 모두 뽑힌 후 뜨거운 기름에 튀겨지는 것이 머릿속에 그려졌던 것이다.
“네 녀석이 가진 모든 힘을 발휘해서 저 녀석을 치료해라.”
“끼이. 알았다. 켁.”
꽈악.
카이젠은 레오의 몸을 주먹으로 꽉 쥐어 들어 올렸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감히 나에게 함부로 말하는 것은 용납지 않아. 애완동물이 도대체 무슨 말버릇이 그러냐. 앞으로 말을 할 때에는 꼭 공손한 존칭과 더불어 주인님이란 말을 붙여라.”
“끼릭. 애완동물에게 이런 일을 시키…… 끼릭. 알겠습니다, 주인님.”
카이젠이 손가락을 교차시키며 레오의 털을 한 움큼 뽑을 것 같은 모습을 보이자 레오는 즉각 카이젠의 말에 복종했다.
털이 빠지는 기분은 두 번 다시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했다. 그리고 펄펄 끓는 기름에 튀겨지는 것도 싫었다. 죽기 싫은 것은 레오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함부로 말장난을 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을 구별할 수 있다면 이퀼라스는 전자였고 카이젠은 후자였다.
결국 레오는 카이젠의 명령에 의해 있는 힘껏 이퀼라스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지잉.
치릭.
이퀼라스의 머리맡에 내려앉은 레오의 몸에서 푸른색의 빛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충격과 빈혈로 인하여 기절해 있는 이퀼라스의 몸을 포근하게 감쌌다.
사라락.
그러자 놀랍게도 이퀼라스의 오른쪽 어깨 상처가 조금씩 낫기 시작했다. 잘려 나간 피부 중 죽은 부위는 떨어져 나갔고 상처 부위에서는 새살이 솟아오르며 잘린 부분이 봉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가 많이 빠져나가 창백해졌던 이퀼라스의 얼굴에 다시 조금씩이나마 홍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좋아. 한 십여 분 정도면 되겠군.”
카이젠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레오의 조상은 오백 년 전 자신이 데리고 다니던 새였다.
남서 열대우림 지역의 한 종족이 일종의 신물로 숭상했던 새였다. 그러다가 그곳을 정벌하던 카이젠이 얻게 된 것이었다.
카이젠은 사람을 능가하는 지성을 지닌 새에 대하여 매우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다만 그 독특한 지성으로 인해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기에 그 자의식을 최대한 억누를 필요가 있었다. 그런 것은 카이젠이 충분히 조치할 수 있었다.
말을 안 들으면 털을 뽑아 버리거나 튀겨 버리면 되는 것이다. 말을 잘 듣는 애완동물이라면 키워 주지만 그렇지 않다면 가차 없이 멸종시켜 버리겠다는 것이 카이젠의 신조.
어쨌든 당시 키보라 불리며 카이젠이 키웠던 이 새는 사람을 능가하는 지성과 더불어 다친 자를 치료할 수 있는 힐링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계속해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힐링 능력을 쓰는 경우 사람으로 치면 마라톤 달리기를 하는 것과 같아서 한 번 쓰면 며칠간은 힘이 빠져 축 늘어졌다. 그러했기에 자주 쓸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홀로 떨어진 상황에서는 매우 유용했다.
일명 날아다니는 약주머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카이젠은 열대우림 지역에서 이 녀석을 구한 후, 나름대로 성심성의껏 대해 주며 자신의 애완동물 겸 비상 구급약통으로 만들어 가지고 다녔던 것이다.
키보라 불렸던 이 새는 카이젠이 봉인되자 같이 역사에서 사라질 뻔했으나 다이제스가 거둬들여 지금까지 대대로 종을 이어 온 것이었다.
“제법이군, 다이제스.”
다이제스는 카이젠의 존재 그 자체를 지워 버리는 행위를 제외하고는 그의 유산을 소중히 계승했던 것이다.
잠시 시간 여유가 생긴 카이젠은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퀼라스가 깨어나면 다시 한 번 설명을 해야 했다. 아이를 돌보는 것은 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으나 그래도 다이제스의 후손이고 그의 피를 진하게 받아 태어났다면 머리는 좋을 터였다. 그리 어렵지 않게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 터였다.
“좋은 밤이군. 하아.”
숨을 크게 들이마신 카이젠은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향해 소리쳤다.
“창월의 츠바하를 위하여.”
달을 향해 카이젠은 손을 뻗었다.
자신을 부르던 구호.
옛 고대어가 이곳에서 다시 울려 퍼졌다. 수백 년 전 자신의 군대는 이 말을 외치며 수백만의 적들을 향해 쳐들어갔었다.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도 없겠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카이젠이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밝은 달이 떠 있었다.
오백 년 만에 맞이하는 달이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달의 궤적이 그려 지나쳤다. 조금이라도 더 그것을 잡으려 했으나 흡사 물결이 흐르듯 달은 카이젠의 손가락을 지나쳐 나와 이번에는 대지를 향해 그녀의 얼굴을 돌렸다.
휘이잉.
바람이 불고 밝은 달에서 뿜어져 나온 은은한 빛은 대지를 감싸고 있었다.
여유롭고 아름다운 풍경. 바로 지척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간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스륵.
잠시 주변 풍경을 감상하던 카이젠은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결계의 쇠사슬이 단단히 묶여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팔목 보호대만이 달려 있을 뿐이었다.
팔목 보호대를 푸니 흰색의 피부가 드러났다. 근육이 적당히 잡힌 매끈한 손목이었다. 지금 그의 모습은 결계에 걸리기 이전의 외양으로 완벽하게 돌아가 있었다.
“결계가 풀렸다. 이것도 결국 운명인가. 아니면 세상은 그들과 나의 싸움이 계속되길 바라는 것인가.”
기링 기리링.
카이젠의 몸에서 스파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허무하게 당하지 않는다.”
스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백 년이란 시간은 충분히 옛 과거를 돌이키고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카이젠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나는 하늘을 정벌할 것이다.”
* * *
지잉.
“으응? 이게 뭐지?”
죽음의 강을 건너가려던 이퀼라스는 문득 감각이 다시 느껴지며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따라 무언가 따뜻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쿨럭. 쿨럭.”
기침을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차갑던 손발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고 어깨의 상처가 아물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잠시 일시적인 기억상실에 걸린 듯 이퀼라스는 눈을 껌벅거렸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분명 다쳤다는 것은 기억이 났다. 하지만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섬기는 치료 신관이 자신을 치료해 준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가 치료되어 있었다.
“끼익. 끽. 나았구나. 나았어.”
“아. 레오. 근데 내가 왜 다친 거지?”
“바보. 바보. 바보.”
콕콕콕.
“아야. 아프다고.”
레오는 이퀼라스의 머리를 쪼기 시작했다. 힘을 다해 간신히 고쳤는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는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알 수 없다는 표정만 지으니 화가 난 것이다.
“아, 맞다!”
이퀼라스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제야 기억이 돌아온 것이다.
휘익.
몸을 돌리며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직 자신은 죽음의 강을 완전히 다 건너온 것이 아니었다.
“어엇?”
이퀼라스의 눈앞에 검은 머리의 기사가 보였다. 그의 갑옷은 선명한 검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기사이면서도 칼은 차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압감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