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레드 카이젠 1(8화)
Chapter 3 과거와의 만남(4)
꿀꺽.
죽음의 사신처럼 앉아 있는 카이젠을 바라보며 이퀼라스는 침을 삼켰다. 아직까지 자신을 왜 살려 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자신의 목숨은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끼익. 끽. 저 사람. 이름 카이젠. 카이젠.”
레오가 이퀼라스에게 카이젠을 소개했다.
“응. 알고 있어. 그림에서 봤어.”
“끽. 저 사람이 너를 치료하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치료했다. 끼익.”
사람이라면 목을 으쓱하며 자랑을 하는 것 같은 모습. 레오는 이퀼라스를 향해 한껏 유세를 떨고 있었다.
카이젠에게 털을 뽑혀 가며 강제로 치료를 맡게 된 것이었지만 이퀼라스의 앞에서는 자신의 놀라운 힘이 어떠냐며 자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네가 나를 치료했다고?”
레오에게 신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이퀼라스로서도 처음 알았다.
‘역시 레오의 종도 수백 년 전부터 저 사람과 함께 이어져 내려온 것이구나.’
카이젠은 레오의 힘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레오를 시켜 죽어 가던 자신을 치료해 줬다고 하자 머릿속에서 몇 가지 가능성이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너무 변했잖아. 아까 전 지하에서는 완전히 광인이었다고.’
지하에서의 모습과는 너무 많이 달라진 카이젠. 머리도 정돈되어 있었고 이제는 한 명의 흑기사가 되어 앉아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평온한 모습에 조금 전에 그렇게 많은 살인을 저지른 기사가 맞는지에 대한 의혹도 들기 시작했다.
갸우뚱 갸우뚱.
이퀼라스는 자신을 무시한 채 가만히 앉아서 밤바람을 맞고 있는 카이젠을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특징은 무엇이며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최대한 파악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끼익. 저 사람이. 아까 그 괴물이다. 괴물.”
“으윽. 레오야, 말조심.”
이퀼라스는 혹시라도 레오가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할까 봐 재빨리 레오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카이젠은 이퀼라스와 레오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주변을 바라보며 양팔을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대로 달빛을 받으며 영원히 서 있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후아아. 좋군, 좋아. 아름다운 밤이다.”
밝은 보름달이 떠 있었다. 그 빛이 대지를 감싸고 있었다. 달빛의 물결이 초원을 가르고 있었고 바람은 파도처럼 출렁였다.
카이젠이 양팔을 뻗으며 후련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체조를 하듯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우드득 드득.
뼈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지금까지 굳어 있던 몸이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말 그대로 달밤의 체조. 카이젠은 혼자서 약 십여 분간 몸을 풀었다. 이퀼라스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가만히 서 있었다.
‘왜 이렇게 분위기가 변한 거야?’
조금 전에는 흉악범 저리 가라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지금은 멋을 추구하는 젊은 기사 지망생 같은 모습이었다.
단기간에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며 이퀼라스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봉인은 분명 풀린 것 같았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오랜 시간 제국 황실의 비밀로 남아 있던 남자였다. 그가 과연 어떤 행동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꿀꺽.
이퀼라스는 침을 삼켰다. 자신을 치료해 줬다는 말을 레오에게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자신을 죽이진 않을 터였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대공과 그의 부하들을 잔인하게 죽인 것을 떠올리니 과연 그가 어떤 행동을 보일지는 예측이 어려웠다.
털썩.
그때 갑자기 카이젠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기묘한 자세를 취했다. 앉은 자세로 양팔을 무릎에 둔 채 허리를 똑바로 편 것이다.
‘뭐지? 앉아서 자는 건가?’
표정은 매우 신중해 보였지만 아무리 봐도 무방비 상태로 그냥 앉아만 있는 모습이었다. 자신에게서 관심을 꺼 버린 것 같은 모습.
일단 봉인이 풀렸으니 그로서는 이제 자유를 얻은 것이다.
오백 년 만에 얻은 자유를 만끽하는 것을 이퀼라스는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밖으로 나왔으니 이대로 떠나고 싶었다. 더 이상 그와 같이 있는 것이 무섭기도 했다.
그냥 도망치려다가 이퀼라스는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카이젠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나는 이만. 제국의 황태자인 저를 도와준 것은 언젠가 사례를 하겠습니다. 황궁으로 찾아오시면 최선의 성의와 함께 과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을 찾아보도록 하지요.”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만약 말도 없이 도망치려 하면 아까 대공을 죽인 것처럼 자신도 죽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최대한 성의를 보인 것이다.
그리고 슬쩍 카이젠의 태도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 명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말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쓰윽.
이퀼라스는 그제야 조금 마음을 놓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황궁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다. 꽤 걸어 나온 것 같은데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구나.’
지금 빠져나온 곳은 황궁의 외각 사냥터 같았다.
이곳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다. 하다못해 귀족들도 마음대로 들어올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을 보게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아마도 대대로 업을 맡아 이어 온 사냥터지기가 대지 건너편의 끝자락에 오두막을 지어 놓고 기거할 터였다.
그를 찾아가서 우선 자신의 신분을 밝힌 후 반란을 일으킨 숙부의 나머지 부하들을 상대할 대책을 고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미 수괴라 할 수 있는 숙부는 죽었으니 나머지 잔당들만 처리한다면 문제는 없을 터였다.
살금살금.
이퀼라스가 레오의 입을 막은 채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을 쳤다. 카이젠이 자신을 신경 쓰지 않을 때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어딜 가.”
휘익.
“왁!”
그때 카이젠이 눈을 번쩍 떴고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이퀼라스는 신음 소리를 냈다. 발이 허공에 뜬 것처럼 헛돌았다.
“내 몸이 날아가고 있어?”
공중으로 떠오른 이퀼라스의 몸. 그것은 그대로 카이젠의 앞으로 떨어졌다.
명상을 끝낸 카이젠의 두 눈이 뜨여져 있었다.
“너는 누구냐.”
흡사 처음 보는 사람을 상대하는 듯한 태도. 카이젠은 일부러 이퀼라스에게 자신을 직접 소개하게 하는 것이었다.
과연 얼마나 대담할지 살펴보는 중이었다.
아까는 몸이 허약한 상태에서 기절한 것이기에 이제는 몸을 다 치료한 다음에 이퀼라스의 담력을 테스트해 보는 것이었다.
파아앗.
카이젠의 몸에서 순간 패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 기운에 이퀼라스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조금 전 쉴트가 죽었을 때 보인 기운 같았다.
다리가 떨리고 숨이 가빠 왔지만 이대로 대답을 못한다면 죽게 될 것 같았다.
이퀼라스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럽게 자신에 대해 설명했다. 눈앞의 남자는 아까의 그 괴인이 틀림없었다.
인간이라 믿기 어려운 남자였다. 그야말로 신의 경지에 이른 자. 수백 살이 넘은 사람이라 생각하니 제국의 황태자라는 자신의 지위조차 잃어버린 채 말이 조심스러워졌다.
“제 이름은 이퀼라스 마르 드 라몬 다이제스입니다. 현 다이제스 제국의 황태자. 이퀼라스라 부르면 됩니다.”
“황제는?”
거침없이 황제를 부르자 이퀼라스의 눈가가 살짝 매서워졌으나 함부로 말을 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대답했다.
“아버님은…… 몇 년 전 승하하셨습니다.”
“아, 그 돼지 녀석이 섭정을 하고 있었나 보군. 그리고 자신이 황위에 오르고 싶어서 너를 죽이려 한 것이고.”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는지 카이젠이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조금 전 대공이 죽었던 광경을 다시 떠올리며 이퀼라스는 몸을 떨었다. 겉으로 볼 땐 유약해 보이는 남자였는데 직접 대화를 하다 보니 알게 모르게 그의 말에서 주변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느껴졌다.
“흐음. 기운을 많이 낮췄다고 생각했는데 느껴지나?”
“예?”
“내가 말을 할 때마다 움찔거리기에.”
“괜찮습니다.”
“좀 더 기척을 낮춰야겠군.”
그 말과 함께 카이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기세가 많이 수그러들었다. 이제 일반인과 별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이퀼라스는 카이젠의 앞에서 제대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어때? 별다른 느낌 없지?”
“그렇군요.”
“혹시라도 간간이 내 힘이 느껴진다면 즉시 알려 줘라. 기운을 낮춰서 힘을 감추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항상 신경을 써야 하는 번거로운 일이다.”
이퀼라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리고 약간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어째서 그렇게 힘을 숨기는 것이지요?”
그는 매우 강한 자였다. 적어도 호위 기사 쉴트를 단숨에 찢어발겨 죽일 정도의 힘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손도 대지 않고 옮길 수도 있었다.
과거 옛 기사들의 힘. 이제는 전설로 내려오는 그 힘을 보는 것 같았다.
옛날 옛적 제국 건국 시절에는 기사들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건너편에 떨어져 있는 적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정사에는 기록된 바 없고 오래된 이야깃거리로 내려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가끔씩 잊어버릴 만하면 그런 힘을 사용하는 자들을 계곡 어디서 보았다는 둥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항상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깃거리 소재가 되는 내용이었는데 바로 눈앞에서 그 힘을 보게 된 것이다.
이퀼라스는 그런 옛 기사들의 힘은 그저 재미로 내려온 소설과 같은 이야기라 생각했으나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니 그런 힘이 진짜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이젠은 이퀼라스의 질문에 당연한 것을 왜 물어보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 너무 순진한데.’
카이젠은 이퀼라스를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간단한 삶의 진리를 설명했다.
“아니, 어떤 미친놈이 자신의 힘을 함부로 다 드러낸단 말이냐.”
밑천을 다 보이면 그 다음부터는 털릴 일밖에 없었다. 카이젠은 너무나 당연한 것을 왜 질문하냐며 이퀼라스를 힐난한 것이다.
“외부로 기세가 드러난다고 해서 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힘을 잘 갈무리하고 필요할 때 쓸 수 있는 자가 강한 자이다.”
꿀꺽.
카이젠의 말에 이퀼라스는 반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당신이 지하에서 했던 일, 그리고 지금 보여 준 것. 그것이 수백 년 전 옛 기사들이 가졌던 놀라운 능력인가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이곳에 봉인된 것이고요?”
이퀼라스는 조금 전 카이젠이 보여 주었던 능력을 떠올리며 물어보았다.
“훗. 그 정도가 아니다.”
“에?”
“그런 것 정도라면 애초에 내가 힘을 감출 필요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
이퀼라스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카이젠은 계속하고 있었다.
“지난 오백 년간 나는 새로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예전과 달리 나의 힘을 감출 수도 있게 되었지. 이 상태라면 그놈들도 내가 아주 근접하지 않는 이상 나의 기척을 느끼지 못할걸. 놈들의 눈에도 눈알이 박혀 있지만 그것은 사실 허상이고 놈들은 나의 기운을 감지하여 위치를 파악했으니까. 즉 내가 힘만 감춘다면 녀석들 사이로 파고드는 것은 일도 아니다.”
“도대체 어째서? 당신을 그렇게 만드는 존재가 누구죠?”
이퀼라스는 카이젠이 ‘그들’이라고 표현하는 존재를 주목했다. 그리고 자신의 선조도 그 전쟁에 관여했을 터였다.
“너희가 신으로 섬기는 자들. 지금은 사라진 하늘의 존재. 백 날 천 날 외치고 부르짖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자들.”
“마르스 신? 신들과 싸운다고요? 어째서?”
“그들이 쳐들어왔으니까. 원하지 않아도 그들과 싸워야 했다. 그리고 내가 다시 세상에 나타났으니 언젠가는 맞서 싸워야겠지.”
꿀꺽.
이퀼라스는 새로운 세계라 말한 것이 이것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카이젠의 부활과 더불어 이 땅에 전란의 시대가 문을 연 것이다. 그것도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들과의 싸움이었다.
“나도 고민을 많이 했는데 대부분은 추측에 불과했다. 아마도 다이제스 녀석이 무언가를 알아냈고 이 땅 어딘가에 남겨놨을 가능성도 높지.”
“추측이라 하시면?”
이퀼라스는 카이젠의 추측을 듣고 싶었다. 그러자 잠시 이퀼라스를 바라보던 카이젠이 자신의 두 손바닥을 펼쳤다.
“내가 가진 이것 때문이지. 아마도 그 힘을 천족들이 용납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니야.”
힘을 조금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한 카이젠. 약간 발현시키는 것 정도는 상관없을 터였다.
‘나오너라, 나의 힘. 나의 몸 안에 잠들어 있는 카타르시아.’
화라락.
잠시 후 카이젠의 손바닥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각양각색의 색깔을 지닌 커다란 구슬 같은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스스로 빛을 내더니 회전하며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와아.”
현란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잠시 동안이나마 이퀼라스는 정신을 빼앗긴 채 그것을 황홀하게 쳐다보았다.
그것은 이곳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신비한 모습이었다. 어찌 저런 모습이 구현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