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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카이젠 1(9화)
Chapter 3 과거와의 만남(5)


휘익 휙.
카이젠의 몸에서 흘러나온 구슬들은 회오리처럼 빙빙 돌더니 잠시 후 무리를 지어 카이젠의 정수리를 향해 쏟아졌다. 그리고 물이 녹아 흡수되듯 그의 몸으로 다시 들어갔다.
“상쾌하군.”
카이젠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한번 몸 안의 힘을 유동시키면 몸이 가뿐했던 것이다.
그제야 이퀼라스는 정신을 차리고 카이젠에게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저건 뭐지요? 고대의 마법?”
“훗. 마법 따위가 아니다. 마법사들은 자연계의 힘을 빌려 조그마한 힘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일 뿐.”
“그렇다면 다른 건가요?”
“이건 바로 자연계의 힘 그 자체다. 만물의 존재 근원이라 할 수 있지.”
“자연계의 근원!”
약간은 믿기 어렵다는 태도.
‘아차, 화내면 어떡하지?’
이퀼라스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다행히 카이젠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세상의 지식으로 이것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이것은 차원을 이어 주는 힘. 내가 새롭게 붙인 이름으로는 카타르시아라고 부른다.”
“카타르시아라…….”
“나의 이름을 딴 것이지.”
“도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건너온 것이죠? 아니, 그런 힘을 가졌으면서 왜?”
강력한 힘을 가지고도 이곳에 봉인되어 있었느냐는 질문.
하지만 이퀼라스는 그 질문이 카이젠의 심경을 건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이 힘을 가지게 된 것은…… 과거 다른 차원을 넘어오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얻게 된 것이다.”
카이젠은 순간 이퀼라스에게 어디까지 말해 줘야 할지 고민했다. 자신이 가지게 된 힘. 차원의 구슬을 통한 힘의 획득은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른 차원? 카이젠 당신은 이곳의 사람이 아닌가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니, 그것보다도 인간이 어찌 차원을 넘어올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는 자가 눈앞에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여기까지. 그럼 다음 질문.”
더 이상 질문에 답해 줄 필요는 없었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이퀼라스가 많이 알아서 좋을 것은 없었던 것이다.
카이젠이 입을 다물자 이퀼라스는 다른 것을 조심스럽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싸움은 어떻게 하여 시작된 것이죠?”
“어느 날 하늘에서 그들이 내려왔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세상이 불바다로 변했지.”
“신들이 이 땅에 현신했다고요?”
“녀석들은 신이 아니다. 그저 신인 척하고 있는 놈들일 뿐. 그리고 우매한 민중이 그들의 모습에 넘어가 신으로 섬기기 시작한 것이다.”
끄덕끄덕.
이퀼라스는 재빨리 카이젠의 말에 맞장구를 쳐 줬다. 안 그랬다가는 사단이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자신의 말에 호응이 있자 카이젠은 조금 흥겨워졌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카이젠은 잠시 과거를 회상하게 되었다. 자신의 첫 제국. 그 시발점부터 이야기가 흘러나오게 된 것이다.
“동방에서 시작된 나의 제국은 대륙의 모든 지역을 정복하였다. 대륙에서 떨어진 섬나라들 또한 출병하여 모조리 정복하였다.”
“대륙을 모두 정복?”
역사상 없는 일이었다. 대륙일통! 누구나 꿈에 그리는 이야기지만 그것은 꿈이라 여겨졌다. 그런데 수백 년 전에 그 일을 이룬 자가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역사서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이퀼라스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카이젠은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대륙정복 후 그들이 왔지.”
“으음.”
“그들은 인간들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신으로 섬길 것을 원했으며 하나의 통일된 인간 제국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했지. 대신 신전을 세워 각 신전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리라 했다. 물론 황제 또한 신의 신탁 아래 놓여 있는 존재.”
“그래서요?”
“나는 결코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모든 땅을 다 먹으니 이제 와 그것을 날름 먹어치우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더 참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분노. 카이젠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무지한 인간들, 바보 같은 인간들. 단지 자신들과 조금 다른 존재일 뿐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더 참을 수 없는 일?”
이퀼라스의 질문에 카이젠은 잠시 마음을 진정시킨 후 천천히 말했다.
“솔직히 말해 천족이든 뭐든지 간에 쳐들어올 수 있다. 나 또한 쳐들어가서 적들을 점령했으니까. 그런데 화가 나는 것은 이 땅의 제국민들이 다른 이종족에 불과한 그들 천족을 신으로 숭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저 그들의 모습이 아름답고 등에 날개가 달렸다는 것 때문에. 망할 놈들.”
화라락.
카이젠의 눈에서 불이 튀기는 것 같았다. 과거 무지몽매했던 사람들에게 보이는 엄청난 실망감.
“나는 사람들에게 저들은 신이 아니고 단지 날개가 달리고 날 수 있는 종족일 뿐이란 것을 알려 주기 위해 그들과 싸웠다. 싸워 이긴다면 인간이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테니까.”
“결과는 어떻게?”
이퀼라스의 질문에 카이젠은 다시 천천히 회상을 계속했다. 머릿속에서는 치열한 대륙 전투가 그려졌다. 하지만 번번이 그 싸움은 미완으로 마쳐졌다.
“승부를 내지 못했다.”
짤막한 카이젠의 말.
“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요.”
“천족들은 지상계에서 자신들의 모든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놈들은 질 것 같으면 하늘의 구멍을 통해 도망쳤고 우리는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
질질 끄는 소모전을 떠올린 카이젠은 혀를 찼다. 가장 싫어하는 전쟁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누구에게도 이득이 없는 전투였던 것이다.
“그럼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잖아요. 그렇다면 차라리 적들의 본진을 공략하는 것이 낫지요.”
이퀼라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카이젠이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카이젠은 다이제스의 후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늘의 문을 통한 천족의 세계에 대한 정벌론에 대하여 가장 반대했던 것이 바로 다이제스였던 것이다. 그것을 반대했던 자의 후손이 정벌론을 제시한 것이다.
“네 녀석의 선조가 내가 천족들의 세계로 건너가는 것을 적극 반대했다.”
자신의 선조가 반대했다는 말에 이퀼라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는 전쟁은 평생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설사 제아무리 강한 제국이라도 버티기 힘들 것입니다.”
세상은 혼란에 빠지고 민중은 도탄에 휘말렸을 것이다. 그 엄청난 혼란. 더구나 신으로 믿는 존재와 세상의 황제가 싸우고 있으니 사람들은 엄청난 불안감에 휩싸였을지도 몰랐다.
“그때 네 선조인 다이제스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나로서는 그 녀석이 의외로 좋은 제안을 해서 놀랐지.”
“어…… 어떤 제안을 했는지요?”
“총동원령. 모든 제국의 신민들을 천족과의 싸움에 투입하는 것. 강제 징병에 녀석이 앞장선 것이다.”
카이젠으로서는 마음 같아서는 일찍이 총동원령을 내리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었다. 무엇보다도 모든 비난이 자신에게 쏠릴 수 있었다. 아무리 카이젠이라고 하더라도 그때 상황에서 제국의 기반을 흔들 조치를 함부로 취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다이제스가 그 십자가를 진 것이다. 자신이 모든 비난을 받으며 카이젠이 원하는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다이제스로서도 이대로라면 삼 년 내로 제국이 뿔뿔이 갈라질 것이라는 말을 했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총동원령과 함께 이 땅의 모든 자원과 생명은 그들과의 싸움에 투입되었다.”
천족들은 어차피 인간들이 분열되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렇게 계속해서 혼란만 일으키면 되는 것이다.
“또한 천족을 신으로 믿고 섬기는 자들은 이적죄로 즉각 척살당했지.”
카이젠은 손가락을 들어 목을 후려치는 제스처를 취했다.
“즉각 척살?”
“전쟁 중에 적을 신으로 떠받드는 바보 녀석들은 오히려 더 큰 적이다.”
“으음.”
엄청난 숫자가 죽었다. 사람들의 심리란 것은 묘해서 자신을 능가하는 존재가 있다면 신으로 섬기고 숭배했다. 그리고 그것은 엄연한 이적 행위였다.
“다만 나는 천족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워프 게이트 통로를 막아야 한다는 것을 녀석이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 못했지.”
그것이 카이젠에게 있어서는 가장 안타까웠던 일이었다. 천족과의 싸움이 바쁜 바람에 다이제스의 생각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 차이점이 무엇일까.”
카이젠이 이퀼라스를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그러자 두 가지의 차이점을 떠올리던 이퀼라스는 문득 지금의 상황을 떠올리고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만약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맞다면 자신의 선조인 건국 황제 다이제스는 카이젠을 이용하고 막판에 배신한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이젠은 이퀼라스가 말이 없자 자신의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이번에는 천족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이다.
“하늘에서 온 날개 달린 놈들. 나는 그들을 천족이라 불렀다. 그리고 놈들의 에너지는 사념을 바탕으로 하는 사이킥 에너지.”
“사념을 바탕으로 하는 에너지라…….”
“하지만 나의 힘과 서로 상극인지라 그들과 싸우면 힘이 중화되었다. 나로서는 어떻게든 놈들의 힘을 흡수할 필요가 있었지. 그것을 흡수하여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나는 더 강해질 것이고 오히려 대륙을 넘어 그들을 정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니까.”
카이젠은 주먹을 쥐었다. 새로운 도전! 그것에 대한 생각으로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만약 카이젠이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 그들의 공격에 손 놓고 당했던 수모를 씻고 이제는 반대로 인간들이 천족들의 땅을 유린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전장이 지상계에서 벗어나 천족의 세계로 옮겨진다면 지상계는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일단 밝혀진 정보들을 바탕으로 다이제스가 그것에 대한 준비를 했다.”
한다면 하는 것이 카이젠의 성격.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천족들의 사이킥 에너지를 얻어야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을 계속해서 연구한 것이 다이제스였다.
“성과가 있었다. 지상계에서도 사이킥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고, 모든 준비가 철저히 된다면 내가 이끄는 제국의 군대는 나를 따라 천계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그놈들의 땅을 박살 내는 것이지.”
반격의 시작이었다. 계획대로 되었다면 이번에는 천계가 혼란에 빠졌을 터였다.
“무모하다는 의견도 많았다. 그들의 세계가 어떤 곳인지, 그들이 정확히 어떤 힘을 쓰는지도 잘 모르는데 무턱대고 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의견을 다이제스와 그의 동조자들이 피력했지.”
자신의 선조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이퀼라스는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조금 시간이 지나자 이퀼라스는 궁금한 듯 물어보았다.
“사이킥 에너지? 무슨 수로 그것을 얻지요?”
천족들의 힘과 비슷한 힘을 지상계에서 어떻게 얻는지 궁금해진 것이다. 그러자 카이젠은 나직한 미소를 흘렸다.
과연 이퀼라스가 자신의 답변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가 되었다.
“인간의 피.”
“헉.”
갑자기 피라는 단어가 등장하자 이퀼라스는 기겁했다.
“인간의 사념이 가장 많이 담긴 것이 바로 피다. 그것에 나의 에너지를 동조화시켜 천족들이 사용하는 사이킥 에너지와 비슷한 기운을 끌어내는 작업을 했지.”
덜덜덜.
마음속에서는 묻지 말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이퀼라스는 자신도 모르게 질문을 던졌다.
“인…… 인간의 사념이 담긴 피는 어디서?”
그러한 질문이 나올 줄 알았던 카이젠은 즉각 대답해 주었다.
“감히 천족 따위를 신이라 믿고 넙죽거리며 절하는 반역자들의 피. 그들의 온몸에서 피를 뽑아내어 바다와 같은 양을 만들었다.”
“우윽.”
이퀼라스가 질렸다는 표정을 짓자 카이젠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과거의 영상을 보여 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퀼라스는 이제 수백 년 전의 순간으로 돌아가 그 광경을 보게 될 터였다.
촤악.
이퀼라스는 순간 허공에 자신이 떠 있게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우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와악! 살려 줘!”
“대군주폐하, 제발 자비를!”
수많은 사람들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늙은 남자, 늙은 여자, 젊은 남자, 젊은 여자, 그리고 아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손이 뒤로 묶여 있었고 기다란 수백, 수천 개의 길로틴 아래에 모여 있었다.
그곳에는 붉은 두건을 쓴 사형 집행관과 날카로운 도끼, 칼로 무장한 자들이 같이 서 있었다. 그들 또한 붉은 두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상태.
“행하라!”
핏빛과 같은 붉은 포도주를 마시던 남자. 그는 카이젠이었다.
무표정한 음성으로 손가락을 내리자 수백 개의 머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붉은 피가 사방으로 퍼졌다.
서걱.
서걱.
피의 강이 흐르고 넘쳤다.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함께 진한 사념이 그곳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카이젠의 눈이 붉어지며 죽어 간 사람들의 사념이 뭉쳐 만든 사이킥 에너지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이퀼라스는 결국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짧은 시간 동안 보여지던 환영에서 풀려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