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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카이젠 1(10화)
Chapter 3 과거와의 만남(6)
“헉…… 헉. 쿨럭.”
두근두근.
이퀼라스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구토를 해서 속을 다 게워내고 싶었지만 몇 시간 전부터 먹은 것이 없다 보니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짓을. 당신은 정말 잔인하군요.”
이퀼라스는 겁도 없이 카이젠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잔인?”
씰룩.
카이젠의 입가가 살짝 움직였다.
우드득.
“크윽.”
이퀼라스의 몸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나에게 그런 것을 제안한 것이 바로 너의 선조다. 다이제스 녀석이라고.”
쿵.
“쿨럭. 쿨럭.”
카이젠은 들어 올렸던 이퀼라스를 거칠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잘못하다가는 죽일 수도 있었다. 최대한 자제해야 했다.
“어쨌든 그 이후 지상계의 천족들은 확실히 몰아낼 수 있었다. 그들의 힘을 이용하게 되니 놈들은 당황하게 되었고 손쉽게 놈들을 제압했다. 나머지 녀석들은 부리나케 워프 게이트를 통해 그들의 세계로 달아나기 시작했지.”
“그런데 어째서?”
봉인이 되었냐는 궁금증. 그러자 카이젠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마지막 순간, 다이제스 녀석이 천족의 워프를 막는 봉인으로 나를 써 버렸지. 같이 폭발시켜 버린 것이다.”
“에에?”
원래 카이젠의 계획은 천족의 워프를 통해 그들을 직접 공격해 들어가 그들의 씨를 말려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왕에게 웃으면서 묻고 싶었다. 왜 자신을 그렇게 핍박하고 인간을 괴롭히느냐고.
하지만 카이젠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후방에서 카이젠을 조력하던 다이제스는 천족의 워프 게이트에 카이젠이 들어가는 순간 다른 자들의 접근을 잠시 딜레이 시킨 후 은밀하게 사이킥 에너지에 대한 흐름을 방해하여 순간적으로 두 힘이 불안정하게 뒤섞이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태풍이 불었고 대륙이 들썩거렸다.
그 충격으로 인해 카이젠은 불안정한 상태로 지상계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피를 통하여 흡수한 유사한 사이킥 에너지가 아니라 순수한 천족의 사이킥 에너지가 뒤섞인 상태였다.
미리 준비했기에 다이제스는 카이젠의 몸을 빠르게 회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봉인을 개시했다. 완벽히 흔적을 감추었다.
Chapter 4 숨겨진 자들(1)
“그럼 이제 네가 이야기해 봐라.”
“네?”
“네가 알고 있는 이 제국의 역사를 이야기해 봐. 어떤 시대가 되었는지 내가 알아야 하니까.”
카이젠은 두 눈을 감았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습.
“현재 건국…… 황제 다이제스에 의해…….”
이퀼라스는 조심스럽게, 최대한 카이젠을 화나게 할 만한 단어를 쓰지 않도록 주의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들으며 카이젠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자신을 봉인시킨 다이제스는 이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인간들을 통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까지의 혼란을 빠르게 가라앉히기 위해 카이젠이 알면 분노할 짓을 하였다.
그것은 이제는 지상계로 들어올 수 없는 천족을 신이라 칭하고 대신 자신을 신의 대리자라 하여 제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역사에서 카이젠에 대한 이야기, 과거 통일제국의 이야기를 싹 지워 나가기 시작했다.
신의 대리인. 교황의 등극. 대답 없는 신보다는 직접 신의 말을 전하는 대리인이 더 강한 힘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신의 권위를 빌어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은 의외로 편하게 민중을 통치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반발이 심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내 카이젠은 이퀼라스의 설명에서 자신의 제국, 광활한 영토의 유산을 부하들이 나눠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앙부의 다이제스를 기점으로 동서남북에 새로운 제국이 세워진 것이다. 그와 더불어 그들은 자신들의 제국이 결집력을 가지고 하나로 뭉칠 수 있게 하기 위해 완벽하게 카이젠의 존재를 지우는 작업을 시작했을 터였다.
그들로서도 다이제스 제국이 카이젠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난리를 피우면 곤란했을 터인데 오히려 다이제스 제국에서 카이젠의 흔적을 모두 지우는 것을 제안하니 다른 제국에서는 처음에는 고민했으나 그들 입장에서는 손해가 아니었기에 모두 따르기로 한 것 같았다.
‘역시 역사란 것은 무서워. 단지 오백 년이 지났을 뿐인데 대륙을 통일한 나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사라져 버리다니.’
카이젠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허무해진 것이다.
이퀼라스의 설명은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거대했던 제국이 하나 둘 분열되어 가는 이야기였다.
결국 이제는 대륙의 나라들이 스무 개 이상 많아진 것이다. 또한 제국이란 이름이 붙어 있긴 해도 기껏해야 주변 왕국보다 조금 더 강한 수준밖에 되지 못했다. 제국이란 호칭은 주변 왕국이 분화하기 전 원래의 나라였다는 의미밖에 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현재 다이제스 제국은 대륙 중앙부에 위치한 나라 중 하나가 되어 버린 상태였다.
“흐음. 잘 들었다.”
카이젠이 눈을 떴다. 그리고 이퀼라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너를 죽일까 살릴까.”
이퀼라스의 귀에 청천벽력 같은 카이젠의 음성이 흘러 들어왔다.
* * *
‘칫. 좀 더 격한 반응을 보일 줄 알았는데. 아니, 완전히 얼어붙은 것인가?’
카이젠은 묵묵부답 가만히 서 있는 이퀼라스를 바라보며 천천히 생각했다.
지금 손을 뻗으면 단숨에 녀석의 목을 부러뜨려 죽일 수 있었다. 아니면 지하에서 쉴트라는 기사에게 한 것처럼 사지를 뜯어 죽일 수도 있었다.
약속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이젠이 약속에 얽매여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꿀 이유는 없었다. 다시 생각해 봐서 굳이 그의 말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된다면 안 지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황제였고 지배자였다. 감히 누가 약속 따위로 카이젠을 속박할 수는 없었다.
카이젠은 약속했지만 최종적으로 이퀼라스를 시험한 것이다.
“네가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과연 자신의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지.
사람이 겁을 먹으면 다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카이젠은 겁쟁이를 싫어했다. 적어도 죽이겠다는 말에 얼어붙어서 이런 말도 못 듣는 녀석이라면 지켜 줄 필요가 없었다.
두근두근.
이퀼라스는 가슴이 떨렸다. 마음 같아서는 살려 달라고 외치거나 아니면 뒤로 돌아 도망치고 싶었다.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하던 자가 이제 죽일 것처럼 이야기하니 순식간에 절망감이 몸을 감쌌다.
‘이대로 물러서면 안 돼.’
이퀼라스는 오히려 당당하게 허리를 폈다. 기왕 이렇게 된 이상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 카이젠의 음성이 들려왔다. 과연 네가 도움이 될 수 있겠냐는 카이젠의 말. 그제야 이퀼라스는 카이젠이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재빨리 깨달았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조력하겠습니다. 그걸로 선조의 죄를 갚겠습니다.”
이퀼라스로서는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상대는 이 땅에서 신이라 불리는 천족들과도 거침없이 싸우는 남자였다. 과연 이 땅에서 무엇이 더 필요할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이퀼라스는 카이젠의 존재가 드러난다면 천족의 워프 게이트가 다시 열릴 수 있고 제2차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싱긋.
카이젠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말하는 이퀼라스를 보고 손을 까닥거렸다.
“원래는 너를 죽일 생각이었으나 과거의 원한은 잊어버리도록 하겠다.”
“……!”
이퀼라스의 얼굴에 놀람의 표정이 떠올랐다.
피의 황제라 불렸던 자였다. 그리고 엄청난 원한을 쌓아 뒀을 것이 틀림없는 남자였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원한을 씻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이제스 녀석이 나를 위해 준비한 것이 많았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네 선조에게 감사해라.”
“그게 무슨? 아악.”
궁금해서 물어보았으나 이퀼라스는 더 이상 질문을 할 수 없었다. 카이젠이 그를 번쩍 들어 올렸던 것이다.
“우선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 숙부란 녀석이 거사를 일으켰겠지? 녀석은 죽었지만 그놈의 부하들은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을지 몰라.”
반란이 아직 끝난 것이 아니란 것을 카이젠이 지적했다. 그 말에 이퀼라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국이 두 개로 갈려 싸울 수도 있었다. 오늘 밤 그것을 정리하지 못한다면 실제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아마도 그 돼지 녀석은 주동자가 아닐 수도 있어.”
“네엣? 그런 일이.”
“진짜로 이런 일을 벌일 정도의 주동자였다면 직접 자신이 부하를 이끌고 내려오는 어리석은 일은 안 한다. 아마도 다른 녀석이 식사를 다 차려 주니 먹으려고 스푼을 든 것뿐. 아마도 놈은 자신이 머리를 써서 이렇게 움직인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녀석은 그저 조연일 뿐.”
“그래도…….”
“나를 무시하는 거냐?”
“아닙니다. 아니에요.”
카이젠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이퀼라스는 그의 말에 함부로 토를 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그건 그렇다고 해도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헉. 일단 빨리 복귀를.”
어느새 높이 솟아올랐던 달이 천천히 지고 있었다. 곧 해가 뜰 것이고 그 전에 황궁으로 복귀해야 했다. 자신이 없어진 상태에서 난리가 나면 곤란했다.
빨리 돌아가 제자리를 찾아야 반란 분자들을 안정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걱정 마. 네 녀석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너를 도와주지.”
“네엣?”
갑자기 카이젠이 자신을 도와준다는 말에 이퀼라스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수로 죽여도 모자랄 판에 도와준다는 말을 한 것이다.
“적어도 삼십 년간은 이 땅에서 내가 할 일이 많아.”
카이젠은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굳이 해 줄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이제 도와준다고 했으니 이퀼라스가 싫다고 해도 그는 카이젠의 조력을 받아야 했다.
“삼십 년 동안이요?”
너무나 긴 세월을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최소한의 숫자라고 했다.
이퀼라스는 갑자기 너무나 든든한 조력자가 생긴 것이다.
“네가 죽지 않고 황위를 무사히 잘 마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지. 잠시 동안 나는 전대 황제의 명을 받아 비밀리에 만들어진 직속 기사단의 단장을 맡도록 하지.”
카이젠이 이퀼라스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소속 기사도 없는 1인 기사단 상태. 그리고 하다못해 지금 당장 들고 있는 칼도 없었지만 카이젠은 당당했다. 모든 것을 걱정 말라는 태도였다.
“내 조력을 받기 싫다는 거냐?”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이퀼라스는 즉각 대답했다.
그러나 다른 면으로 보면 말이 조력이지 실질적으로 카이젠은 이퀼라스를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림자와 같았다.
숙부의 섭정과도 다를 바 없었기에 이퀼라스로서는 화가 날 법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카이젠이 말하는 것은 전혀 화가 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그의 기세에 눌린 것이다.
“대륙을 일통한 초대 황제여. 다이제스 제국의 황태자로서 당신과 협력하지요. 그리고 이 약속은 나의 생이 끝나는 날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이퀼라스는 어차피 그의 제안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너무나 무시무시한 상대였지만 그가 그의 말대로 자신을 지켜 준다면 누구보다도 든든한 호위 기사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환한 달빛 아래에서 카이젠과 이퀼라스가 서로 약속했다.
“좋아. 그럼 다른 이들이 있는 곳에서는 특별히 황태자로 예우해 주지. 하지만 다른 놈들에게도 예의를 차릴 것이란 헛된 희망은 가지지 마라.”
크게 선심 쓴다는 표정을 지으며 카이젠이 말했다. 그리고 그 뒤치다꺼리를 잘하라는 눈초리를 이퀼라스에게 보냈다.
“아마 이런 나의 제안을 예전의 나를 알고 있던 다른 이들이 듣게 된다면 기절할 거다. 물론 이미 모두 다 죽고 이 땅에 없겠지만.”
“그럴지도…….”
이퀼라스는 조금 전 보았던 잔혹한 환영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만인지상의 황제였다.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그리고 추후 다이제스 제국의 황제의 자리에 올라도 누리기 힘든 권력을 누렸던 카이젠이었다. 그런데 그가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한 것이다.
“지난 수백 년간의 성찰이 나를 많이 변화시켰다. 승리를 위해 참고 기다리는 것. 최후의 승리를 얻기 위해서 이 정도의 가면은 기꺼이 써 주지. 그럼 어서 가자.”
스르륵.
카이젠은 얼굴을 다시 검은색 얼굴가리개로 감쌌다. 그렇게 되자 겉으로는 카이젠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뇌격 기사단.”
“예?”
“뇌격 기사단 단장 카이젠. 이것이 나의 새로운 신분. 제국의 비밀 기사단이고 이번 반역을 제압하기 위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면 되겠네.”
“알…… 알겠습니다. 근데 목소리가?”
카이젠의 음성이 변해 있었다. 갑옷 속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목소리. 아니, 차갑다기보다는 음침한 목소리였다.
“죽음의 뇌격 기사단의 단장에게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면 안 되잖아. 이래 봬도 황제의 그림자에서 움직이는 죽음의 기사단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들.”
“그런 건가요?”
어느새 카이젠의 입에서 뇌격 기사단에 대한 설명까지 줄줄 흘러나왔다.
“그럼 가자. 어디로 가지? 네가 처음 생각한 것을 말해 봐라.”
“우선 이 끝으로 가면 이곳을 지키는 관리인이 있지요. 그자를 통해 황성에 기별을 넣으려 했으나 지금은 바로 황성으로 가면 될 것 같네요.”
카이젠이 있으니 자신에 대한 호위는 든든했다. 하늘의 종족과 싸우겠다는 남자였다. 그가 지켜 준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카이젠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이퀼라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사냥터는 언제 만들어진 것이지?”
“그거야 황궁이 건설되면서부터…….”
황궁을 건설하면서 주변 부대시설이 건설되었고 그 이후부터는 조금씩 증축하거나 손보는 수준에서 변해 왔다.
“먼저 그 관리인을 찾아가 보지.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