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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카이젠 1(11화)
Chapter 4 숨겨진 자들(2)
휘익.
카이젠이 성큼성큼 움직였다. 그러자 이퀼라스는 깜짝 놀라며 그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아무런 말도 없이. 그리고 나를 데리고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너무나 빨리 움직였기에 이퀼라스는 숨을 헐떡일 수밖에 없었다. 카이젠과 자신의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는 단지 걸어가는 것 같은데 자신은 아무리 뛰어도 그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다.
휘익.
“으윽.”
이퀼라스는 갑자기 자신의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이전에 한번 겪은 이후 다시 겪게 된 것이다.
찰싹.
카이젠은 이퀼라스를 옆구리에 끼었다. 만약 이퀼라스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본다면 황태자를 감히 그런 자세로 잡을 수 있냐는 말이 나올 수도 있었지만 이곳에는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네 녀석이 발이 느리니 내가 데리고 가마.”
‘당신이 빠른 것이라고요.’
휘익! 휙.
카이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퀼라스는 주변의 풍경이 휙휙 변하는 것을 느꼈다.
‘와아. 이럴 수가.’
매우 무거워 보이는 중갑옷을 착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이젠은 흡사 말이 빠르게 달려가는 속도와 비슷하게 움직였다.
“방향을 말해라.”
“에, 그러니까.”
눈을 가늘게 뜨며 이퀼라스는 손짓을 통해 방향을 알려 주었다.
사냥은 이퀼라스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유흥이었고 덕분에 이곳의 지리에 대해서는 얼추 파악하고 있었다.
“저긴가?”
카이젠의 눈에 작은 오두막집이 보였다. 나지막한 오두막집이었지만 카이젠의 눈은 예사롭지 않았다.
‘다이제스 녀석이 만들어 놓은 황실의 사냥터다. 아무런 이유가 없지는 않겠지.’
자신에게는 아직 다이제스에게 받을 것이 많았다. 그리고 그 녀석이라면 분명히 자신이 찾아 갈 수 있도록 조치를 여기저기 해 뒀을 터였다.
아마 자신이 이곳에 들를 것이라 예상하고 배려도 해 뒀을 것이 틀림없었다.
“아님 말고.”
“예?”
“아무것도 아니다.”
카이젠은 중얼거리며 그곳으로 다가갔다. 이제 속도는 천천히 걸어가는 수준. 이퀼라스도 카이젠의 손을 떠나 그의 뒤에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두막집의 문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위치가 되었다.
“멈춰.”
“응?”
짤막한 카이젠의 말에 이퀼라스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쐐액!
파삭!
그때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나며 엄청난 길이의 창이 카이젠의 발치에 박혔다.
파르르.
엄청난 힘이었다. 땅에 박혀 있는 창은 아직도 끝이 떨리고 있었다.
“이건?”
이퀼라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다시 한 번 죽을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어디서 던졌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누군가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창을 집어 던진 것이다.
“어디? 어디?”
하지만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창을 집어 던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긴장한 표정으로 이퀼라스는 주변을 계속해서 돌아보았다.
‘혹시 숙부의 잔당이 아직도?’
이런 위협을 가한 것을 보니 혹시라도 적이 이곳에도 매복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카이젠은 아무렇지도 않게 땅에 박혀 있는 창을 바라보며 피식거리며 웃었다.
“힘은 제법이군. 여기까지 던지다니. 선천적으로 타고난 근골과 더불어 열심히 수련을 했네. 기초적인 마샬 아트는 익힌 것 같군. 무언가 가르치기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상태다.”
카이젠은 박혀 있는 창으로 다가가 그것의 손잡이 끝을 톡톡 두들겼다.
“그게 무슨 말? 그리고 도대체 어디서 공격이 날아온 거죠?”
카이젠이 중얼거리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이퀼라스로서는 이 상황에서 공격자의 위치도 알 수 없으니 답답했다. 그때 이퀼라스의 귀에 또다시 파공성이 들렸다.
쐐액!
“허억.”
무언가 날아오는 소리. 이퀼라스는 깜짝 놀라 몸을 바짝 숙였다. 체면 볼 것도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긴 터라 최대한 몸을 숙인 것이다.
퍼억!
이번에도 카이젠의 발치 앞에 기다란 창이 정확히 떨어졌다. 만약 한 발자국만 더 앞에 있었다면 날카로운 창이 카이젠의 발을 정확하게 꿰었을 터였다.
“저곳이군.”
카이젠이 손을 들어 건너편을 가리켰다. 그러자 이퀼라스의 눈이 같이 돌아갔다.
“저럴 수가. 저런 먼 거리에서?”
이퀼라스의 눈에 그제야 나지막한 언덕 건너편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덩치가 상당히 좋은 남자였다.
“기사?”
“기사는 아닌 것 같군. 갑옷도 입고 있지 않고 있고 옷도 평범해.”
카이젠의 설명에 이퀼라스는 다시 눈을 비비며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이퀼라스의 시력은 매우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겨우 건너편 상대의 덩치만 파악할 수 있었는데 카이젠은 그의 상태까지 알아본 것이다.
“이곳은 황실의 사냥터요. 길을 잘못 들었으면 어서 나가시오. 함부로 이곳에 들어오면 황실 모욕죄로 사형이오.”
그때 나직한 음성이 앞에서 들려왔다. 카이젠과 이퀼라스는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들의 눈앞에 꼬장꼬장하게 생긴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흐음. 당신이 이곳의 관리인?”
“내 이름은 알론소. 이곳 사냥터 관리인이오. 그리고 빨리 이곳에서 퇴거하지 않으면 큰 경을 치게 될 것이오. 설사 그것은 귀족이라도 마찬가지.”
“흐음. 근데 황족의 사냥터에 저런 실력을 가진 자가 있다는 것은 의문이군.”
카이젠이 자신에게 창을 던진 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내 손자 카투라 하오. 원래 타고난 근골이 좋은 아이라서 그렇소.”
“그래도 저 거리에서 이런 위력을 보일 정도라면 보통은 아니지. 나름대로 실력이 좋군.”
나름대로 실력이 좋다는 말에 알론소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보통 이 정도의 위력을 보이면 여간한 기사들도 모두 기가 죽어 꼬리를 말았던 것이다.
“나는…….”
이퀼라스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려 했으나 카이젠이 그를 막았다.
“나는 뇌격의 기사단 단장 카이젠.”
“뇌격의 기사단?”
알론소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제국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 물론 이것은 조금 전에 생각해 낸 것이고. 뇌격 기사단 자체는 제국 생성 전부터 있었지.”
알론소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카이젠이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보여 인상을 쓰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표정은 오랜 세월 약속을 기다려 왔던 사람이 드디어 결실을 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마 당신도 뇌격 기사단의 구호를 알고 있지 않을까? 아니, 당신이라면 알아야지.”
구호란 말에 알론소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퀼라스로서는 갑자기 그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창월의 츠바하를 위하여.”
카이젠은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쥔 채 자신의 왼쪽 가슴으로 가져다 댔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는 과거 피의 황제. 위대한 대군주가 드디어 이 땅에 돌아왔다.”
우웅.
그때 이퀼라스는 조금 전 느꼈던 카이젠의 힘이 다시 느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힘을 마음껏 발산한 것이다. 순간 주변의 초목이 모두 말라비틀어지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위력이 대단했던 것이다.
“창월의 츠바하를 위하여.”
알론소가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알론소는 카이젠의 앞에 오체투지를 하였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것이다.
“위대한 대군주님을 뵙습니다.”
그는 감히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조금 전 보여 주었던 당당한 모습과 비교하면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뭐. 뭐야.’
이퀼라스는 갑자기 카이젠을 떠받들기 시작하는 알론소를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생각을 했다. 흡사 황제의 앞에서도 저런 자세는 취하지 못할 것 같았다.
휘익 휙.
쿵쾅쿵쾅.
그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빠르게 뛰어왔다.
‘와. 크다.’
이퀼라스의 눈에 조금 전 카이젠을 향해 창을 던졌던 남자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흡사 거대한 곰이 달려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쿵!
그가 땅에 착지하자 땅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카투란 남자가 사나운 눈빛으로 카이젠과 이퀼라스를 바라보았다.
* * *
“할아범, 무슨 일이오?”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카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거친 야생 곰 같네.’
그를 바라보고 느낀 생각이었다.
카이젠은 나름대로 재밌다고 생각했다. 그를 보니 예전에 자신의 휘하에서 싸우던 한 남자가 떠올랐다. 그는 커다란 도끼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던 남자였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선봉에 서서 싸웠었다.
잠시 카이젠이 상념에 빠진 사이 카투가 알론소를 향해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니까? 왜 그렇게 있소. 귀족들에게도 함부로 고개를 숙이지 않던 할아범이 웬일이오.”
그 말에 이퀼라스는 사냥터 관리인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초대 황제의 칙명으로 대대로 업이 이어지는 곳이었다. 그런 연유로 이들은 오로지 황제의 직속 관할이었고 귀족들도 감히 이들에게 뭐라 할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몇 있었다.
그들은 지난 수백 년간 황실 직속으로 관리되었고 모든 것에서 자유로웠다.
물론 부딪칠 일도 거의 없었지만 귀족들이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그들에게 간섭할 수 없었다.
일례로 지금 매우 피곤한지 조용히 자신의 주머니 안에서 잠들어 있는 레오만 하더라도 대를 이어 업을 전승하는 전용 관리인이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카이젠과 함께 움직이게 되니 그들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설마 이것도 다이제스 건국 황제의 준비?’
이퀼라스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카이젠이 깨어났을 때를 위해 준비했다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우선 이퀼라스는 잠시 한 발자국 물러나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과연 어떻게 카이젠이 저 곰 같은 남자를 상대하는지 보기로 한 것이다.
“좀 쓸 만해 보이는군.”
카이젠은 식육점에서 고기를 고르는 사람처럼 카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시선이 기분 나쁜 듯 카투가 바닥에 침을 뱉으며 소리쳤다.
“기사인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사람을 쳐다보시오. 그리고 우리는 황가 직속의 관리인이오. 이곳 땅을 관리하는 것은 우리니 그만 나가 주시지.”
황실을 강조하는 카투. 그 말에 카이젠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얼굴가리개 안의 미소였기에 다른 이들이 그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장난 한번 쳐 볼까?’
카이젠은 사실 겉보기와 달리 꽤 장난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본인의 입장에서는 장난, 당하는 입장에서는 꽤 난감한 일.
“황실이라. 이분이 누군 줄 아느냐.”
“헉.”
이퀼라스는 갑자기 카이젠이 자신을 전면으로 내밀자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리니 엄청난 덩치의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콧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 저.”
알론소는 약간 당황한 듯 뭐라 말하려 했으나 카이젠은 미리 손을 들어 이퀼라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은 바로 황태자 이퀼라스 전하시다.”
다소 무례하게 보일 수 있는 태도. 카이젠이 황태자의 등을 떠밀며 말했지만 누구 하나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제국 황실 뇌격 기사단의 단장 카이젠. 우리는 어둠 속에서 제국 황실을 수호하던 기사단이다.”
억양이 살짝 올라간 것이 위엄을 보이기보다는 조금 놀리려는 기색이 강했지만 카투는 그런 것은 생각하지 못한 채 이퀼라스를 바라보며 입을 쫙 벌렸다.
“황…… 황태자전하?”
그때 알론소의 머릿속으로 카이젠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황제 직속의 그림자 기사단 단장으로 신분을 속이고 있는 중이다. 그리 알고 따르라. 그리고 나의 말을 알아들었으면 고개를 두 번 끄덕이라.”
알론소는 즉각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그것을 확인한 카이젠은 이제 사납게 날뛰던 곰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어, 그러니까…… 음.”
카투는 갑자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는 이 문장만 말하면 설사 지체 높은 귀족이라도 이를 악물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돌아갔던 것이다.
물론 이곳이 황실의 사냥터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곳에 들어오는 자들은 대부분 몇 년에 한 번 정도 실수로 들어온 자들이라서 큰 문제가 안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난감했다. 바로 자신이 들먹이는 황실이 등장한 것이다.
휘익.
카투의 시선이 이퀼라스를 향했다. 그리고 고개를 잠깐 갸웃거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인상을 쓰며 카이젠을 향해 소리쳤다.
“어디서 감히 거짓말을 하느냐. 황태자전하가 어찌하여 이런 곳에 또 이런 시간에 나타날 수 있느냐.”
허리에 손을 올리고 어깨를 딱 벌리며 말하는 카투.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설마 진짜 황태자가 여기 올 수 있겠냐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치니 자신만만해진 것이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는 카이젠을 어떻게 잡아 족칠까 하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나타났다.
“흐음. 황태자전하, 당신의 얼굴과 신분이 제대로 잘 감춰졌군요. 황실의 사냥터 관리인이라면 그래도 다른 이들보다는 황족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을 텐데 이들 또한 당신에 대해 모르니까요.”
“에, 그게…….”
갑자기 카이젠이 존칭을 써 주니 이퀼라스는 당황스러웠다. 실제로 따지면 그는 자신보다 윗줄의 대황제였다. 제국을 세운 선조 다이제스 또한 그의 부하였다. 하지만 카이젠은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몸을 돌려 카투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정이 있어 황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흥. 헛소리.”
콧방귀를 뀌는 카투. 그러자 카이젠은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럼 왜 저기 저 노인은 저런 자세를 취하고 있는 걸까?”
“어?”
카투의 눈동자가 알론소를 향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자신이 뛰어온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평소 귀족들에게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당당하던 자신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난 자들에게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그게.”
“흠. 힘도 좋고 다듬으면 괜찮은 자질인데 머리는 좀 나쁘군. 곤란한데.”
카이젠은 턱을 괸 채 잠시 고민했다.
세상에서 가장 불필요한 자를 꼽는다면 머리가 나쁜데 열심인 사람이었다. 머리가 나쁘고 게으르다면 애초에 일을 벌이지 않지만 이 녀석처럼 머리는 나쁜데 힘 좋고 부지런한 성격이라면 나중에 사고를 쳐도 크게 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