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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카이젠 1(14화)
Chapter 5 새로운 부하들을 얻다(1)


“와아.”
이퀼라스는 거대한 덩치의 카투가 카이젠의 공격에 단숨에 쓰러져 버리자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저 봉으로 머리를 몇 대 친 것뿐이었는데 해머를 맞은 사람처럼 기절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 마샬 아트란 것의 힘인가? 어째서 난 몰랐지. 이런 놀라운 능력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아니, 명칭이 달라서 그런 것인가? 최고의 상급 기사들이 사용하는 가전절기란 것들도 결국은 마샬 아트란 것이었나 보구나.’
이퀼라스는 카이젠과 바닥에 쓰러진 카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 이 정도면 대충 길들였겠지. 함부로 까부는 일은 없을 것 같네.”
툴툴거리며 말을 듣지 않는 미련한 곰은 때려서 길들여야 했다. 이렇게 실력을 보였으니 앞으로는 제대로 말을 잘 들을 터였다.
카투가 기절하자 카이젠은 알론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길이 이곳으로 열려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바로 네 녀석이 초대 황제 다이제스의 의지를 대대손손 전해 온 녀석이란 이야기겠지?”
다이제스의 의지를 대대손손 전해 왔다는 이야기에 이퀼라스의 시선이 알론소를 향했다.
그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계속해서 카이젠의 말이 이어졌다.
“그 치밀한 녀석이 그저 영상이나 그림 몇 조각만 남겨 놨을 리는 없다. 그리고 만약 진짜 그랬다면 이 땅의 생물은 내 손에 모조리 죽는다.”
카이젠의 말에 이퀼라스는 아직 자신의 위험이 다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제로 카이젠이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피의 살인자로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꿀꺽.
침을 삼키며 이퀼라스는 알론소를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사냥터 관리인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다이제스 제국의 운명이 그의 입에 달려 있었다.
“저는…….”
잠시 중얼거리던 알론소는 다시 한 번 카이젠에게 정중하게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위대한 대군주폐하께서 언젠가 이 땅에 재림하실 줄을 믿고 기다리며 살아온 자의 후손입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처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황태자가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황제에게도 바치기 어려운 극존칭을 써 가며 카이젠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수백 년 만에 깨어난 카이젠으로서는 이곳에서 든든한 부하를 얻은 것이다.
“좋아. 네 녀석을 기사단 행정 담당으로 세우지. 이제 앞으로는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고 또한 다이제스가 나에게 남겨 준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챙길 수 있도록 준비하는 역할을 맡아라.”
“알겠습니다. 다만 그 전에…….”
알론소가 멀뚱멀뚱 서 있는 이퀼라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카이젠은 그의 생각을 알았다는 듯 이퀼라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휘익.
“사냥터 관리인들은 이제부터 뇌격 기사단에 들어옵니다. 불만 없지요, 황태자전하?”
존칭이었지만 운율이 달랐다. 어찌 보면 살짝 비꼬는 것 같은 목소리이기도 했으나 이퀼라스로서는 카이젠이 이런 식으로 말을 높여 주니 오히려 더 어색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턱!
“헉.”
갑자기 카이젠이 자신의 어깨 위에 손을 얹자 이퀼라스는 깜짝 놀랐다. 그가 마음을 바꿔 자신을 죽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게 아니지. 지금이야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에는 좀 더 근엄한 목소리를 내라고. 이렇게.”
잠시 목을 가다듬던 카이젠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하도록.”
순식간에 분위기가 달라진 카이젠의 태도. 그가 말을 꺼내자 엄숙함과 위엄이 철철 넘쳐 나왔다.
“자, 따라해 봐. 그렇게 하도록.”
“그…… 그렇게 하도록.”
“다시 한 번.”
“그렇게 하도록.”
“좋아. 이제부터는 얼지 말라고. 아무래도 황태자가 쩔쩔매는 기사단장이란 건 이상하니까.”
텅텅.
카이젠이 이퀼라스의 등을 쳤다. 그러자 그 진동에 이퀼라스가 휘청거렸다.
“그리고 제국의 황제는 언제나 위엄을 갖춰야 한다고. 행동 하나하나에도 신경 쓰고.”
누가 황제이고 누가 부하인지 알 수 없는 모습.
이퀼라스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카이젠이 말하는 것을 하나하나 들었다.
바르르.
‘응? 레오가 왜 그러지?’
이퀼라스는 문득 주머니 안의 레오가 깨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상시 같으면 즉각 뛰어나와 주변을 날아다니며 난리를 피웠을 녀석인데 지금은 혹시라도 자신이 깨어났다는 것이 들킬까 봐 이퀼라스의 주머니 안에 콕 박혀서 눈치만 보는 모습이었다.
“키보, 아니 레오, 깨어났구나.”
하지만 레오는 카이젠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휘익.
재빨리 움직인 카이젠의 손이 레오를 끄집어냈다.
“끼익, 끽. 살려.”
“어허. 누가 죽인다고 그래?”
“살려. 살려. 살려.”
조만간 자신에게 닥칠 일이 떠오르는 듯 레오는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소리가 시끄러웠는지 카이젠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살려. 살…….”
카이젠의 표정이 굳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듯 레오의 말이 점차 가늘어졌다.
“조용히 해라. 머리를 빡빡 밀어 버리기 전에.”
침묵.
‘와아.’
이퀼라스는 평소 시끄럽기 짝이 없었던 레오를 단숨에 조용히 시키는 카이젠을 바라보며 놀랐다.
“여기 주변에 돌아다니며 누가 접근하는지 잘 봐라. 저 녀석 깨어날 때까지 혹시라도 애먼 칼에 맞아 죽지 않도록 지켜보고.”
푸드득.
카이젠은 레오를 위로 던져 올렸다. 그러자 레오는 재빠르게 하늘 위로 올라갔다. 공중에서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정찰을 하는 것이다.
“그럼 일단 저 안으로 들어가지.”
카이젠이 오두막을 가리켰다. 그러자 이퀼라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예? 지금 시간이…….”
이퀼라스는 초초해졌다.
벌써 이곳에서 시간을 꽤 소비한 것이다. 카이젠은 빨리 황궁으로 돌아가자고 해 두고서는 지금 엉뚱하게 오두막집으로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흘깃.
이퀼라스의 질문에 카이젠은 알론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에 황궁으로 바로 이어지는 통로 하나쯤은 있겠지?”
“아하!”
탄성을 내지르며 이퀼라스가 손바닥을 쳤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안배된 것이라면 초대 황제 다이제스는 분명히 카이젠이 이곳을 들를 것이란 것을 예상했을 것이고 그에 대비하여 이곳에 황궁으로 통하는 비밀통로를 만들어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왕에 여기가지 온 김에 네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정리해서 털어놔라.”
“저, 그런데 카투는?”
알론소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비록 지금까지 말은 못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손자가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니 걱정이 된 것이다.
“한 삼십 분 정도면 깨서 일어나게 될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설마 내가 머리라도 박살 낼 줄 알았나?”
처음 공격 당시 그냥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카투의 머리카락이 그대로 잘려 나갈 정도였다. 그런 무시무시한 공격을 해 놓고서는 걱정 안 해도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알론소가 감사를 표했다. 카이젠이 많이 봐준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때 이퀼라스는 쓰러진 카투와 카이젠을 흘깃거리며 바라보다가 소리쳤다.
“대단하군요. 저런 거인을 삼십 분이나 기절하게 하다니.”
삼십 분이 아니라 단 1분이라도 전장터에서 저렇게 기절하게 된다면 칼에 맞아 죽게 될 터였다.
단지 몇 번 봉을 휘두른 것만으로 놀라운 기세를 뿌리던 카투를 손쉽게 쓰러뜨리자 이퀼라스는 카이젠을 모든 싸움기술을 습득한 전투의 신을 보는 양 쳐다보게 되었다.
“뭘 봐.”
카이젠이 퉁명스러게 말했다. 그러자 이퀼라스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저 카투란 남자에게는 당신의 신분을 속이고 왜 알론소에게는 존재를 드러내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그거야 알론소는 다이제스의 명을 정식으로 이어받아 그것을 지키는 자이지만 카투 녀석은 아직 아니잖아. 내 진실한 존재를 알고 있는 자들은 최대한 적을수록 좋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과거 피의 황제, 대군주라는 직함이 부담이 될 수는 있겠지만 꼭 그렇게 감춰야 하느냐는 이퀼라스의 질문.
카이젠은 짧게 답변했다.
“그거야 내 맘이다.”
이퀼라스는 카이젠의 독단이란 말에 더 이상의 질문을 포기했다. 그가 그렇게 할 것이라는데 따로 질문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 * *

촤락.
따뜻한 차가 앞에 놓여졌다. 이곳에는 언제나 따뜻한 차를 마실 수 있게 준비되어 있는 것 같았다. 삭막한 방 안의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은은한 차향이 넘쳐흘렀다.
카이젠의 얼굴가리개는 어느새 해제된 상태. 편안하게 갑옷을 움직이는 모습에 알론소도 놀란 것 같았다. 그리고 예상외로 젊은 카이젠의 얼굴을 보고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수백 살 먹은 대군주의 얼굴치고는 너무 젊은가?”
잘 보아야 20대 초반의 얼굴이었다. 어리게 보면 10대 후반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닙니다, 대군주폐하. 감히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알론소가 고개를 꾸벅거렸다.
“시간이 조금 촉박하니 차 한 잔 마실 시간 정도에 네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내 봐라.”
천천히 차를 음미하며 카이젠은 살짝 눈을 감았다.
이퀼라스도 덩달아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사실 이곳까지 오면서 많이 피곤한 상태였다. 목도 말랐는데 차가 나오니 살 것 같았다.
스륵.
‘와아. 도대체 무슨 차야, 이건. 나중에 꼭 저 사람에게 말해서 황궁에 비치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입 안을 감도는 맛이 매우 색달랐다. 지금까지 마셨던 차들이 혀의 감각을 마비시키며 쓴맛을 없애 주는 것이었다면 이 차는 입 안에 청량감을 주고 있었다.
잠시 차의 맛을 음미하자 알론소가 카이젠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곳에는 황궁과 바로 연결되는 비밀통로가 있습니다. 그것은 황제의 집무실과 바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황제의 집무실과 이어지는 비밀통로가 있다는 말에 이퀼라스는 내심 놀랐다.
지난 수백 년간 황궁에 대한 여러 조사가 종종 이뤄졌었다.
황궁은 비밀이 많은 곳인지라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당대 최고의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황궁에 있을 법한 빈틈을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니고 황제의 집무실과 이어진 비밀통로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하긴 지하의 비밀장소도 이제껏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집무실과 바로 이어져 있다니, 놀라운데.’
정말 마음만 먹으면 바로 황제를 암살할 수도 있는 비밀통로였다. 그러다 문득 이퀼라스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역대 황제 중 집무실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두 명 있었다.
당시 그 사건이 발생했을 때 대대적인 조사가 벌어졌으나 갑작스러운 급사로 밝혀져 결국 모두 흐지부지되었던 사건들이었다.
“잠깐, 설마. 컥.”
이퀼라스는 깜짝 놀라 알론소의 말을 잘랐다. 하지만 그때 카이젠이 이퀼라스의 발등을 찍으며 나직이 말했다.
“말 듣는데 좀 조용히 해 주시지, 황태자전하.”
“으윽. 그게 아니라, 혹시 제국의 역사에서 집무실에서 갑자기 죽은 두 황제…….”
차마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이퀼라스가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그 둘 간의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무언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제국에 숨겨진 그림자 정부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바로 황실의 바로 곁에서 활동하던 자들이었다.
알론소는 자신의 말을 끊은 이퀼라스를 약간 사나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대답해 주었다.
“그들은 우리가 초대 황제께서 심어 둔 제국의 그림자란 사실도 모르고 초대 황제폐하의 유지를 무시하려 했지요. 우리는 다이제스 황제폐하로부터 대군주폐하를 보필하기 위한 모든 전권을 위임받은 자들입니다. 그것은 설령 다이제스 제국의 황제라 할지라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초대 황제의 의지이니까요.”
알 듯 말 듯한 애매모호한 웃음.
아마도 당시 두 명의 기록을 찾아보면 황가의 일을 대대로 전담하는 이들 특별 계급에 대한 모종의 조치를 하려 했던 공통점이 있을지도 몰랐다.
사실 지금까지 이퀼라스 또한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자들이지만 정체를 알게 되니 이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무서운 일이었다. 가장 보이지 않는 곳에 황제를 겨냥한 칼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이 맡은 임무를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거스르게 된다면 시체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