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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카이젠 1(25화)
Chapter 8 레드 타이거 미나(5)


“너는 그녀를 많이 닮았군.”
카이젠이 리나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머리 색깔만 빼고. 그녀는 은색의 머리였지. 지금 네가 쓰는 실버 테일이란 이름이 어울리는.”
카이젠이 속삭였으나 리나는 정신을 반쯤 잃은 상태였다.
카이젠의 타액이 몸 안에 들어가면서부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는 카이젠이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반항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럼 하나씩 물어보지. 너희 쉐도우들은 이 땅에 얼마나 남아 있지? 옛 쉐도우들의 거처 오라토리움. 그곳에는 너희가 대대손손 머물 수 있도록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 설령 내가 없어졌다고 해도 너희가 살아가기에는 큰 문제가 없었을 텐데?”
과거 카이젠은 쉐도우들을 위해 오라토리움이라 불리는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곳에서 쉐도우들은 자급자족하며 영구히 머물 수 있었다. 자신이 아니면 누가 챙길 수 없는 쉐도우들을 위한 카이젠의 특별 배려였다.
물론 그곳은 다르게 본다면 집단 거주지이자 하나의 감옥이나 마찬가지이기도 했다. 그들은 함부로 인간 세상을 돌아다니기 어려운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쉐도우의 진정한 정체는 카이젠이 대륙을 정복하면서 붙잡은 이종족들이었다. 그들은 죽지 않고 목숨을 건지는 대신 카이젠에게 충성을 바쳐야 했다.
리나가 잠시 말이 없자 카이젠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왜 너는 그곳에서 나왔지? 너에게 명령을 내린 게 누구야?”
분명 누군가가 명령을 내렸을 터였다. 카이젠은 지금 현재 누가 쉐도우를 이끌고 있는지 궁금해진 것이다.
그러자 리나의 입이 살짝 열리고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쉐도우. 그것이 우리의 이름…….”
잠시 침을 삼키더니 계속해서 말이 흘러나왔다.
“오라토리움에는 이제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아요.”
“뭐?”
오라토리움이 텅 비었다는 말에 카이젠의 인상이 살짝 찡그려졌다. 카이젠이 붙잡아 놓고 길들였던 사나운 늑대들의 우리가 활짝 열린 것이다.
“저는 오라토리움에서 같이 태어나고 자란 친구와 함께 인간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어요. 그곳은 너무 적막하고 쓸쓸했거든요.”
“어째서?”
“우리가 어렸을 적에 어른들은 우리만 남겨 두고 모두 떠났어요. 돌아온다는 말도 없이.”
“으음. 흩어졌다 이거지. 아예 흔적을 지우고 사라져 버리다니. 골치 아프게 되었는데.”
남아 있던 쉐도우들은 어느새 여러 갈래로 갈라졌던 것이다. 그것도 오라토리움에서 태어난 쉐도우들을 버린 채. 아마도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긴 시간이 많이 흐르긴 흘렀지.”
자신의 제국이 사라지고 이 땅에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면서부터 쉐도우들은 더욱더 음지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언제 밝은 세상으로 나올지 기약도 없이 수백 년간 지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카이젠으로서도 그들에게 미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그건 좀 곤란한데.”
카이젠이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쉐도우는 날카로운 칼과 마찬가지. 잘 사용한다면 유용한 칼이었으나 만약 제어되지 않는다면 매우 위험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가능한 빨리 이탈한 쉐도우들을 장악해야겠군.”
지금까지 별 탈이 없었던 것이 오히려 신기했다.
시간이 흘렀으니 지금쯤 그들도 인간 세상에 파고들어 적응하며 힘을 길렀을 시간이었다. 언제 그들이 난동을 부릴지 몰랐다.
일례로 이번 경우만 봐도 쉐도우의 어린아이가 황태자 이퀼라스를 반란의 혼란한 와중에 바꿔치기 하려 했었던 것이다.
“너는? 네 이름.”
이름을 물어보자 리나는 자신에 대한 소개를 했다.
“내 이름은 리나. 어렸을 적 레드 타이거라고 불렸어요.”
그녀의 붉은 머릿결에 어울리는 별칭이었다. 그녀의 반쯤 감은 눈. 매우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붉은 입술은 쉬지 않고 카이젠의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어째서 대공의 반란 음모에 참여한 것이지?”
“대공…… 그자가 황위를 노리기 위해서 황태자와 꼭 닮은 대역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흐음. 그렇군.”
카이젠이 고개를 들어 관 안에 잠들어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이퀼라스와 완전히 똑같았다. 아마도 이퀼라스의 나이와 덩치가 비슷한 소년을 찾아 얼굴을 변용시킨 것일 터였다.
안면변화의 술은 얼굴도 변화시키지만 궁극적으로는 온몸의 근골을 변화시켜 완벽한 판박이를 만들어 내는 데에 이용되었던 것이다.
“저 소년의 이름은 지크. 이퀼라스 황태자가 제거되고 대공의 세력이 대역을 맡은 지크를 진짜 황태자로 옹립하는 순간. 대공의 세력을 제압하고 지크가 황태자로서 제국을 이끌어 나가게 하려 했습니다.”
리나의 말이 이어졌다.
간단하게 바꿔치기를 하려 했던 것이다.
잘만 되었다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다이제스 제국의 황제로 지크를 올릴 수 있었던 기회였다.
일단 지크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리나의 도움으로 제국을 손쉽게 장악할 수 있었을 터였다.
리나의 말에 카이젠이 나직하게 말했다.
“7인의 기사단은? 그렇다면 너와 같이 오라토리움을 나온 아이는 그쪽에 스며들어 있는가?”
카이젠이 현실적인 질문을 던졌다.
물론 그런 방식으로 황권을 손에 얻는다고 해도 제국에는 수백 년간 성장해 왔던 파워 엘리트 집단이 있었다. 그들을 처리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권력을 얻기가 불가능했다.
“7인의 기사단까지는 아직 손을 대지 못했어요. 하지만 언제라도 마음먹으면 그쪽도 나의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훗. 대단한 자신감이군. 역시 너는 그녀의 피를 타고난 것이 맞아.”
카이젠이 중얼거렸다.
자신의 타액에 반응하는 피를 지니고 있다면 쉐도우 단장을 맡고 있던 여자의 혈통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후손이라면 사람을 조율하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을 터였다. 그녀는 매우 특이한 능력을 지닌 종족이었다.
“하프 뱀파이어. 인간의 피를 매개로 삼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자.”
카이젠이 기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자신의 종족이 드러났다는 것을 느꼈는지 리나의 몸이 다시 한 번 떨리기 시작했다.
카이젠은 태양 빛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그녀의 선조에게 부여해 주었다. 하프 뱀파이어의 살가죽은 다른 뱀파이어와 달리 햇빛을 버틸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네 나이는?”
시간 간격상 자신이 잠들어 있던 그사이에 리나가 탄생한 것이 틀림없었다. 과거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진 카이젠이 질문을 던졌다.
“일백다섯 살이에요.”
일백 년을 넘게 살아왔다는 놀라운 대답. 하지만 하프 뱀파이어에 대해 알고 있던 카이젠은 놀라지 않았다. 그들의 수명은 오백 년이 훨씬 넘었던 것이다.
“어떻게 태어난 거지? 너희는 태양 빛을 견딜 수 있게 된 대신에 종족을 더 늘릴 수 없게 되었다.”
일종의 종족 변형이었다.
예전에 카이젠의 쉐도우에는 모두 다섯의 하프 뱀파이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종족을 늘릴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원래는 뱀파이어였으나 카이젠이 그들에게 태양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면서 종족을 늘릴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리나의 탄생은 카이젠으로서도 매우 흥미로웠기에 그 과정을 질문했으나 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알지 못한다는 것.
“뭐 좋아. 일단 그건 그렇고. 너와 같이 그곳을 빠져나온 다른 아이를 한번 만나고 싶군. 그리고 나서 너희를 어떻게 할지 생각하겠다.”
카이젠의 질문에 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의 아지트로 안내해.”
카이젠이 그녀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지금은 너희가 나에게 필요하거든.”
다이제스가 남긴 것 외에도 자신의 흔적이 뿌리내린 곳이 아직 있었다. 이들은 카이젠의 아이들이기도 했다.
비틀.
몸을 일으키던 리나의 몸이 흔들렸다. 그러자 카이젠이 자신의 왼팔을 들어 올렸다.
“이것을 마셔라. 너에게 힘을 주마.”
그리고 들고 있던 단검을 자신의 왼팔에 거칠게 휘둘렀다.
촤악!
절대 갈라지지 않을 것 같았던 카이젠의 피부에 실금이 생겼다. 그리고 점차 실금은 붉게 변하더니 피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아아.”
보통의 인간들과는 다른 카이젠의 진한 피가 흘러나왔다.
그 향기를 맡은 리나의 입술이 자신도 모르게 벌어졌다.
스르륵.
그리고 지금까지 숨어 있었던 송곳니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하프 뱀파이어는 굳이 무리해서 흡혈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이끄는 피의 향기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흡사 마약처럼 자신의 몸에 기억되어 있는 감각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선조가 카이젠에게 굴복되어 몸에 새겨진 각인. 카이젠과 이어진 피의 맹약. 영원한 주종의 관계였다.
뱀파이어라는 굴레를 벗어나게 되는 대신에 카이젠의 종복이 된 것이다.
리나는 카이젠의 것이었다. 다만 그녀는 직접적으로 카이젠을 통해 하프 뱀파이어가 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했기에 이번에 카이젠의 피를 그녀에게 먹임으로써 그녀를 가장 확실히 카이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결코 자신의 것을 남에게 주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이라면 확실하게 충성을 받아야 했다.
그것이 바로 통일제국의 황제 카이젠이었다.
추르륵.
카이젠의 손에서 흘러나온 피가 리나의 입을 따라 그녀에게 들어갔다. 그것은 그녀에게 새로운 힘을 줄 것이고 그녀에게 보다 더 강한 능력을 선사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녀를 카이젠에게 꽁꽁 묶는 쇠사슬이 될 터였다.
‘마셔라. 그리고 나의 종복이 되어라.’
카이젠은 자신의 팔목에서 허겁지겁 피를 빨고 있는 리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굳이 여러 가지 설명을 할 필요 없이 그녀의 몸은 오랫동안 비었던 하프 뱀파이어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닫게 될 터였다.
“으으.”
리나가 신음 소리를 냈다.
목을 타고 넘어간 카이젠의 피가 자신의 온몸을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엄청난 폭풍과도 같은 위력. 그것은 그녀의 피부를 다시 재생시키고 힘을 주고 온몸에서 열을 발산케 했다. 새롭게 몸이 구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 전 들어간 약간의 타액과는 비교할 수 없는 뜨거운 반응이었다.
찌직.
리나의 얼굴 피부가 찢겨 나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새로운 피부가 재빠르게 솟아올랐다. 온몸이 새롭게 구성되고 있었다. 이것은 그녀를 훨씬 강하게 변화시킬 터였다.
“헉…… 헉.”
하지만 카이젠의 진혈은 아직 어린 하프 뱀파이어라 할 수 있는 리나에게는 무리였다. 너무나 진한 피로 인해 그녀의 몸은 점점 제어하기 어려운 상태로 변하고 있었다.
“이런.”
카이젠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리나는 많이 어렸다. 자신의 피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조금 일렀던 것이다.
“진정시킬 필요가 있겠네.”
카이젠이 손을 뻗어 리나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을 리나의 입술에 가져갔다. 카이젠의 혀가 그녀의 혀를 감싸기 시작했고 차가운 기운이 카이젠의 혀를 통해 흘러나왔다.
진한 키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몸을 감돌던 뜨거운 기운을 상당히 많이 식힐 수 있게 했다.
일 분 정도 흐르자 리나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뜨거운 열기가 조금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편안해졌다.
“아직 많이 어리네. 하긴 하프 뱀파이어의 나이로 그 정도라면 인간으로는 열여덟 살?”
고개를 들어 올린 카이젠이 중얼거렸다.
그때 리나의 눈이 뜨였다. 정신을 조금 차린 것이다.
“마스터. 위대한 대군주.”
리나가 카이젠을 바라보며 절을 하려 했다.
오라토리움에 남아 있던 광오한 대군주에 대한 엄청난 기록들. 자신들이 섬겨야 하는 절대자의 존재. 그것을 어렸을 적부터 리나는 혼자서 공부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카이젠의 피를 통해 확실히 눈앞에 있는 남자가 바로 그 대군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쉐도우에게 있어서 대군주는 살아 있는 신. 오로지 숭배하고 경배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비록 수백 년이 흘러 더 이상 그를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 쉐도우들은 떠나갔지만 리나는 드디어 대군주를 직접 만나게 된 것이다.
감히 누워서 그를 맞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는 카이젠은 손을 들어 그녀를 말렸다.
“무리할 필요 없다. 나를 주인으로 인식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리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카이젠에게 다가왔다.
“저는 당신의 어둠 속 아내입니다.”
리나가 카이젠의 팔에 얼굴을 기대며 말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하프 뱀파이어의 몸에 담겨 있는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흐음. 그러고 보니 오백 년 동안 여자를 품지 못했지.”
카이젠이 리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천천히 카이젠의 손이 리나의 어깨로 올라갔다.
피의 일족 하프 뱀파이어. 어둠 속에 움직이는 제국의 첩보단 쉐도우를 이끄는 마스터.
그런 찬란한 칭호를 가졌던 그녀에게는 한 가지 직책이 더 있었다.
그것은 카이젠의 어둠 속 아내.
스스로는 절대로 자신을 퀸이라 말하지 않는 드러나지 않는 여왕이었던 것이다.
카이젠의 손이 리나의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살짝 그녀의 몸이 떨리는 순간 카이젠이 다시 한 번 그녀를 껴안았다. 카이젠의 손길이 느껴지자 리나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피의 향연. 카이젠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리나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어두운 동굴 안에서는 긴 환락의 시간이 벌어졌다.


<『레드 카이젠』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