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레드 카이젠 1(24화)
Chapter 8 레드 타이거 미나(4)
쐐액!
카라랑!
드디어 처음으로 리나의 검술이 펼쳐졌다. 지금까지는 굳이 검을 쓸 필요 없이 실버 테일만으로 충분히 적을 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자신의 검 메데우스를 극한으로 발동시켜 쓰지 않는다면 상대할 수 없었다. 그렇게 결론이 나니 리나의 검에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오로지 살기만이 담겨 쏟아지게 되었다.
디디링.
메데우스에 달려 있는 원형의 링들이 부딪쳐 소리를 냈다. 그러자 흡사 뱀의 쉭쉭거리는 소리처럼 기묘한 소리가 났고 그것은 지금의 지형과 맞물려 더욱 증폭되었다.
메데우스를 쓰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리나는 상대가 제법이긴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자신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팔 하나까지는 내준다.’
자신의 몸을 내주겠다는 각오를 한 매서운 공격. 그런 마음으로 공격이 들어가니 그것을 제대로 막을 수 있는 자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카이젠도 그냥 막았다가는 피해가 커지리라고 생각했는지 몸을 뒤로 빼기 시작했다.
“타합!”
하지만 리나는 거침없이 찔러 갔다.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자신의 애검 메데우스가 적의 심장을 찌르고 그의 피를 빨아들일 터였다.
‘놈의 무기가 없을 때 베어 낸다!’
리나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어이없게도 기사의 복장을 착용한 자가 허리에 칼이 매달려 있지 않았다. 아마도 들어오는 과정에서 떨어졌거나 파손된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리나가 봐줄 이유도 없었다.
쿠와앙.
리나의 검이 찔러 들어오자 주변의 동굴이 우지직거렸다. 너무나 강한 힘의 흐름에 저절로 반응을 시작한 것이다.
휘익.
그 순간 카이젠은 자신의 심장을 가를 뻔한 공격을 피해 우측으로 몸을 빠르게 움직였다. 황태자를 닮은 소년 지크가 잠들어 있는 크리스탈 관이 있는 곳이었다.
콰앙.
쩌억.
그 순간 비밀동굴에서 커다란 폭음이 발생했다. 무언가 단단한 것을 긁어 버리는 소리가 난 것이다.
“으으윽. 끄윽.”
약간의 먼지. 그것이 가시고 나자 보이는 광경은 기묘했다.
“이 녀석…… 으윽.”
“그래도 제법이네. 그 짧은 순간에 힘을 제어하고 끊어 버리다니.”
“용서하지 않겠다, 이놈.”
리나의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몸이 받은 충격이 엄청났던 것이다. 끌어 올렸던 힘을 강제로 줄이다 보니 몸에 무리가 온 것이다.
지지직.
스륵 쿵!
그때 크리스탈 관의 뚜겅이 두 개로 갈라졌다. 리나의 검이 보여 주었던 강력한 힘을 그대로 받으며 카이젠의 방패가 되었던 것이다.
“힘을 조절하는 것이 제법이군. 만약에 그 순간 힘을 더욱더 끌어당기지 못했다면 아마 이 관은 통째로 잘려 나갔을 거야.”
카이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관의 뚜껑이 완전히 분리되어 버렸다. 그러자 가슴을 포갠 채 잠들어 있는 소년이 등장했다. 황태자 이퀼라스와 판박이처럼 닮은 소년이었다.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얼굴.
“이야. 신기한데.”
카이젠이 고개를 들어 리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면변화의 술. 이것을 여기서 보다니. 오늘 정말 익숙한 것을 많이 보게 되는군.”
안면변화의 술이란 말에 리나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넌 도대체 누구지!”
이 땅의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이야기. 자신들만이 독점적으로 보유하고 있으리라 생각한 것들을 술술 풀어내는 남자의 등장에 리나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우둑.
“가까이 오지 마. 더 가까이 왔다가는 이 녀석은 죽어.”
카이젠의 손이 어느새 지크의 목덜미에 도달해 있었다. 억센 손이 조금만 움직인다면 지크의 목뼈가 으스러질 터였다.
“으으.”
리나는 침을 삼켰다. 적이 설마 지크를 인질로 붙잡고 이런 일을 벌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런 짓을 하다니! 네놈, 기사 맞느냐!”
리나가 소리쳤으나 카이젠은 상관없다는 투로 말했다.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왜 그러느냐.”
“죽이겠어!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
리나가 소리쳤으나 카이젠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은 네가 나에게 대답을 해 줄 시간이다.”
카이젠이 리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네놈한테 한 마디라도 해 줄 것 같아?”
리나가 앙칼지게 말했다. 하지만 카이젠은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마침 관이니 따로 이 녀석의 관을 맞출 필요는 없겠네. 바로 여기서 장사 지내면 되겠다.”
우드득.
카이젠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이자 리나는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그만! 알았어. 궁금한 것 있으면 물어봐. 대신 지크를 다치게 했다가는 결코 용서치 않을 거야.”
“지크? 이 녀석의 이름이군. 알았다. 물어볼 것이 있으니 칼은 던져 놓고 이리 가까이 와라.”
“뭐어.”
자신의 칼을 바닥에 던져 놓으란 말에 리나가 주저하였다. 하지만 그 순간 카이젠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이자 어쩔 수 없이 리나는 자신의 검을 건너편으로 내던졌다.
쨍깡.
휘리링.
그와 동시에 무언가 빠르게 회수되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까지 카이젠의 주변으로 둘러쳐져 있던 실버 테일이 빠르게 회수되는 것이다.
“가면을 벗어.”
카이젠의 명령이 떨어지자 리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얼굴을 가리고 있던 나비 가면을 벗었다. 그러자 새하얀 피부와 함께 매혹적인 얼굴이 드러났다.
“흐음.”
처음으로 카이젠의 입에서 기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언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태도. 하지만 리나는 그 소리를 다른 의미로 해석했다.
‘훗. 정신이 없을걸.’
지금까지 자신의 얼굴을 보았던 남자들이 흔히 보이는 반응이었다. 그런 남자들이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지금 지크를 인질로 제압하고 있는 자의 혼을 쏙 뺀 후 복수를 하리라 결심했다.
“닮았군. 정말 닮았어. 그녀의 후손이 계속 이어져 내려왔던 것인가.”
카이젠이 중얼거렸으나 리나는 그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중얼거리는 정도의 소리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좀 더 가까이 와.”
카이젠의 음성에 리나는 한껏 가슴을 당당히 내민 채 걸어왔다. 자신의 매혹적인 모습에 정신을 제대로 차렸던 남자들은 거의 없었다. 상황이 이러니 다른 방법으로 카이젠을 제압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거기까지.”
몇 걸음 앞까지 다가온 리나를 카이젠이 멈추게 했다. 잠시 동안 카이젠의 시선이 리나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 시선에 리나는 살짝 기분이 나빴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기에 잠시 그것을 참았다. 하지만 지크를 구출하고 나면 반드시 카이젠의 두 눈을 파 버리겠다는 각오를 했다.
“그 손은 이제 그만 놔두지요.”
리나가 카이젠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카이젠은 지크의 목을 누르고 있던 손을 떼었다.
“으윽.”
리나가 이를 악물었다. 지크의 목덜미에 선명한 붉은 자국이 보였던 것이다. 조금 전 카이젠이 잡았던 흔적이었다.
만약 조금만 더 힘을 주었다가는 그대로 부서질 뻔했던 것이다.
그 흔적을 보자 리나는 카이젠이 결코 허튼 위협만 가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말이 조금만 늦었다면 지크의 목이 그대로 부러졌을 터였다.
“음. 힘을 조금 세게 줬네.”
카이젠도 지크의 목덜미에 드러난 상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마터면 잠들어 있는 소년의 목뼈를 그대로 부러뜨릴 뻔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감정도 없는 무표정한 음성이었다.
리나는 조금 질렸다는 듯 카이젠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당신 누구야.”
검은색 귀신 가면에 검은색 갑옷, 그리고 자신의 함정과 공격을 파악하는 실력자. 더불어 잠들어 있는 소년이라도 단숨에 목뼈를 부러뜨려 죽일 수 있는 결단력도 가지고 있었다.
“오백 년 만에 돌아온 이 땅의 지배자 대군주다.”
“하핫.”
리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상대가 자신과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네가 오백 년 만에 돌아온 지배자라면 나는 이 땅을 다스리는 여왕이다!”
하지만 그 말이 카이젠의 신경을 거스른 것 같았다.
휘익.
갑자기 리나의 눈에 카이젠의 다리가 보였다. 정확하게 자신의 복부를 향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머리에서는 피하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다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퍼억!
“쿨럭.”
리나의 입에서 기침 소리가 흘러나왔다. 정통으로 복부를 가격당한 것이다. 최대한 몸을 보호하기 위해 몸 안의 기운을 움직였으나 충격이 그대로 온몸으로 퍼졌다.
털썩.
“으윽.”
배를 부여잡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만약 기운을 끌어내어 몸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즉사했을지도 몰랐다.
쐐액!
속이 메스꺼워지며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던 리나는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자 빠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빠각!
그리고 그 순간 카이젠의 손바닥이 자신의 왼쪽 뺨을 가격하는 것을 보았고 그와 동시에 몸이 옆으로 돌아갔다.
쿠당탕.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붕 날아서 벽에 부딪쳤다. 엄청난 괴력이었다. 이번에도 그녀의 몸을 지켜 주는 힘이 아니었다면 이빨이나 턱뼈가 으스러졌을지도 몰랐다.
“으으.”
리나는 처음 겪는 극심한 고통에 신음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머리를 들어 올리자 점점 다가오는 카이젠의 발이 보였다.
“이제부터 질문을 하겠다.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한다면 온몸의 가죽을 조금씩 벗겨 주지.”
카이젠의 손에 어느새 날카로운 단검이 들려 있었다. 리나가 몰래 준비해 두었던 단검이었는데 어느 사이에 카이젠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서걱.
“꺅!”
리나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날카로운 단검이 순식간에 그녀의 어깨를 그은 것이다.
주륵.
그녀의 경갑옷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 카이젠이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상당한 명품이었다. 비록 리나의 갑옷도 꽤 단단하게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잘려 나가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카이젠은 드러난 리나의 어깨를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어깨부터 가슴까지 천천히 자른 다음에 질문을 할까. 아니면 질문을 먼저 하고 대답이 시원찮으면 잘라 줄까.”
팍!
“으윽.”
날카로운 단검이 리나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새하얗던 그녀의 피부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순간 카이젠이 리나의 어깨에 흐르는 피를 혓바닥으로 한 번 훑고 지나갔다. 그 순간 리나는 온몸을 감싸는 전율에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너의 피를 맛봤으니 이제 더 이상 너는 나를 피할 수 없어. 이 맛은 영원히 나에게 간직된다.”
“아아.”
카이젠의 말이 그녀의 귓가에 아른거렸으나 그녀는 온몸의 힘이 점점 빠지는 것을 느꼈다.
‘무…… 무언가 나의 피를 타고 들어오고 있어.’
상처 부위. 카이젠의 혀가 지나간 곳으로 그의 타액이 리나의 몸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점차 온몸에 열이 나며 리나는 정신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어떠한 극독도 자신을 해하긴 어려웠으나 이것은 그것과 다른 종류의 영향이었다.
“그럼 다시 물어보지. 너는 누구지?”
카이젠이 리나의 붉은 머리와 뺨을 매만지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매혹적이고 오묘한 분위기가 순간 동굴 안에 펼쳐졌다.
* * *
“안면변화의 술. 저것을 사용할 줄 아는 자들이라면 쉐도우들의 후예.”
카이젠이 중얼거렸다.
밝게 빛나는 크리스탈 관에 담겨 있는 소년의 얼굴은 이퀼라스와 쌍둥이라고 말해도 믿을 정도로 닮아 있었다.
하지만 너무 닮았다. 불가능할 정도로 닮은 것이다. 설사 쌍둥이라 할지라도 조금 차이가 있는데 흡사 판박이처럼 이퀼라스의 얼굴을 닮은 것이다.
카이젠이 잠들어 있는 소년을 조금 자세히 관찰하자 이내 이 땅의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옛 기술을 쓴 것을 알게 되었다.
일명 안면변화의 술. 얼굴의 뼈와 근육을 건드려 얼굴의 모양을 원하는 대로 바꾸는 기술이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수백 년 전 카이젠의 휘하에 있던 쉐도우라 불리던 자들이 사용하던 기술이었다.
쉐도우. 카이젠이 거느렸던 그림자 부대.
피와 공포. 카이젠은 그 두 가지를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을 다스렸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고 내부 감시를 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했다.
그런 역할을 맡았던 것이 바로 쉐도우.
그들을 통해 감히 카이젠의 치세에 허튼소리를 하거나 딴마음을 먹는 자들을 적발했고 잔혹한 처벌을 가했다.
특히 그런 첩보활동을 할 때 안면변화의 술은 쉐도우들에게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
그것을 통해 아무런 의심 없이 요원을 침투시킬 수 있었고 정보를 캐 올 수 있었다.
외부인이라면 긴장하며 자신들의 정보를 숨기지만 믿었던 자들이라면 숨김없이 가지고 있던 정보를 쉽게 내놓았던 것이다.
필요시마다 그런 방식으로 의심되는 조직과 권력자의 정보를 파악하고 만약 문제가 있다면 추가 조사를 거쳐 완벽하게 정리했던 것이다.
이들은 카이젠이 지니고 있던 자들 중 최고의 부대였다. 카이젠의 숨겨진 카드였고 최측근 암흑의 부대였다.
그 때문에 이들의 정체는 정보를 총괄하고 있던 다이제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들은 카이젠이 다이제스에 의해 봉인된 이후 완전히 미아가 되어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