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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카이젠 1(23화)
Chapter 8 레드 타이거 미나(3)
이내 실버 테일을 모두 회수한 리나는 마지막 생존자를 향해 걸어갔다. 크리스탈 관 안에서 잠들어 있는 소년.
“아쉽네.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리나는 소년의 머리를 매만졌다.
“너 때문에 네 누나가 날 얼마나 괴롭혔는지 알아? 너한테 상처 하나라도 생겼다가는 네 누나가 나를 죽일 테니 넌 절대 다쳐선 안 돼.”
리나는 그렇게 말한 후 조심스럽게 크리스탈 관의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세밀하게 크리스탈 관의 뚜껑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드드득.
뚜껑이 단단하게 눌려 밀봉되었다. 지금 해야 하는 일의 특성상 관 안으로 몇 분간 이곳의 공기가 들어가면 곤란했다.
“신선한 공기는 삼십 분 후에 맡게 해 줄게. 푹 자는 것은 오늘까지.”
리나는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후읍.”
리나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 순간 리나의 호흡이 멈추었고 그녀의 몸을 따라 은은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그녀의 몸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공기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또옥.
모든 준비가 끝난 리나는 품에서 에메랄드 색깔의 작은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가루를 조심스럽게 주변에 뿌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에 닿지 않도록 지극히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사라락.
사락.
핏덩이와 살덩이 사이를 돌아다니며 리나는 그 흰색 가루를 빠짐없이 뿌렸다. 그러자 그녀의 뒤를 따라 수증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며 조금 전 벌어진 살육의 흔적을 모두 없애기 시작했다.
치지직.
놀랍게도 바닥에 너저분하게 떨어져 있던 피와 살들이 기화해 버렸다.
기화된 수증기 중 일부가 리나를 향해 다가왔으나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십여 초가 지나자 수증기마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방 안을 감돌던 피 냄새마저 사라졌다.
모든 흔적을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피 냄새마저 사라지자 그제야 리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기운이 천천히 약해졌다. 그리고 참았던 숨을 다시 내쉬기 시작했다.
“후우. 이것 치우는 것도 귀찮네. 차라리 한곳에 모아 두고 죽일 걸 그랬나? 마자브란의 가루는 편하긴 한데 너무 위험해.”
리나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 누구도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이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을 터였다.
리나는 다시 크리스탈 관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이것을 옮겨야 하는 것이다.
“훗. 아마도 가짜 편지를 보낸 자들이 곧 이곳에 도착하겠지.”
관을 어루만지며 리나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얻어 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조만간 너희가 누구인지 조사해 주지. 우리의 일을 망친 것에 대한 대가는 매우 커.”
그렇게 말하며 리나는 거침없이 크리스탈 관을 들어 올렸다.
덜컹.
엄청난 힘이었다. 성인남자 2명, 아니 4명이 각 모서리를 붙잡아 옮겨야 할 무게였으나 그녀는 전혀 무겁지 않은 듯 들어 올린 것이다.
사라락.
관을 들고 반대편의 벽으로 들고 갔다. 흡사 그 모습은 공성추로 성벽을 공략하는 기사단의 모습 같았다.
“끄응. 이건 좀 불편하네.”
잠시 머뭇거리던 리나는 관을 놓아 두고는 이번엔 벽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벽의 모서리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구르릉.
그러자 천천히 벽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밀실 속에 또 다른 밀실과 통로가 있었다.
“그럼 가 볼까.”
쿠웅.
그녀가 지나가자 잠시 후 한 바퀴 돌아갔던 벽이 다시 닫혔다. 그리고 건너편에서 무언가 조작을 하자 조금 전 손봤던 기관이 완전히 멈춰 버렸다.
아예 기관을 부숴 버린 것 같았다. 이제 더 이상 이곳의 석벽은 열리지 않게 조치된 것이다.
* * *
한 남자가 별궁의 지하에 설치된 밀실의 문을 확인한 후 거칠게 그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누구라도 자신을 막으면 박살 내겠다는 전의가 느껴졌다.
하지만 예상외로 그 남자가 들어오는 동안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응? 뭐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미약한 피 냄새가 느껴졌다. 허공에 남아 있는 피의 잔재. 하지만 그것은 이내 사라졌다.
피 냄새조차도 잡아먹는 은밀한 향기가 이곳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남아 있던 피의 향기를 잡아먹은 후 그것은 자신의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완전히 사라졌다.
킁. 킁.
코를 매만지며 그 남자는 천천히 지하의 밀실을 둘러보았다. 바닥은 매끈했고 깨끗했다. 누군가 이곳에 있었다는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속일 수는 없었다.
“허어. 뭐야, 누가 나보다 먼저 그들을 건드린 건가?”
검은색의 가면 사이로 찌릿거리는 안광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가면을 벗자 카이젠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약간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어떤 놈이 감히 내가 손보려 했던 놈들을 먼저 처리한 거지?”
카이젠의 음성에는 한기가 실려 있었다. 차가운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 나왔다.
잠시 동안 화를 내던 카이젠은 몸을 천천히 숙였다.
무언가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이건?”
다른 이들이라면 모르고 넘어갔을 흔적. 그저 얼핏 보면 바닥의 먼지로 보일 법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카이젠은 몸을 바닥에 숙인 채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외각 모서리를 쓸기 시작했다.
촤라락.
미세한 하얀색 가루가 손바닥에 묻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는 카이젠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다른 이들은 절대 알 수 없겠지만 카이젠은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누가 마자브란의 가루를 쓴 거지?”
지금 카이젠의 손에 묻은 것은 마자브란 가루가 사용된 이후 나오는 미세한 결과물이었다.
“이걸 여기서 보게 되다니.”
카이젠은 옛 추억에 잠긴 사람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마자브란 가루는 사람의 피와 살과 뼈를 녹이는 무시무시한 가루였다.
수백 년 전에 카이젠은 그것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였다. 반역자와 배신자들에게 산 채로 그것을 뿌려 자신의 몸이 천천히 녹아 들어가는 극한의 고통과 공포를 주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당시 마자브란의 가루는 공포의 대명사로 통하게 되었다. 더불어 가루 자체가 상당히 위험했기에 극히 한정된 사람만이 다룰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도 사용하기 어려웠던 마자브란 가루를 자신이 봉인이 풀린 후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여기서 사용된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7인의 기사단이란 놈들? 아니야 그 정도가 아닌데. 기껏해야 제국을 나눠 먹겠다는 정도의 생각을 가진 놈들이 이것을 사용할 수는 없어.”
카이젠이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하지만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이런 일을 저지른 자를 찾아내어 붙잡아 캐물어 보면 될 터였다.
옛 추억을 떠올리는 표정을 지으며 카이젠은 주변의 흔적을 살펴보았다.
“이곳인가?”
비밀통로 따위는 카이젠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조금 전 리나가 걸어갔던 비밀통로를 몇 분 후 카이젠은 찾아낼 수 있었다.
“고장이군. 고장을 내고 간 건가. 재밌군.”
카이젠은 비밀통로의 문을 열려 했으나 조금 전과는 달리 굳게 잠겨 열리지 않았다.
“이 정도는 풀어 주지.”
힘을 강하게 쓸 수는 없었다. 자신의 진정한 힘을 드러낸다면 설사 이퀼라스의 쉴드가 있다고 해도 천족들의 감시망에 혹시라도 걸릴 수 있었다. 미리 원하는 준비가 갖춰지기 전까지는 최대한 힘을 감춰야 했다.
하지만 이 정도 일을 처리할 수준의 힘을 쓰는 것은 문제가 없을 터였다.
지지직.
카이젠의 손바닥이 벽에 닿았다. 그러자 잠시 후 그의 손바닥이 붉게 변했고 점차 벽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엄청난 열기가 카이젠의 손바닥을 따라 전달되었다.
주르륵.
몇 초 후 흡사 초가 녹아내리듯 단단한 돌 벽이 녹아 없어졌다. 뻥 뚫린 길을 바라보며 카이젠의 눈이 빛났다.
“어디 한번 누군지 솜씨를 볼까?”
바닥에 눌려진 자국을 보면 상대는 꽤 무거운 물건을 들고 간 것처럼 보였다. 그 물건의 무게도 있고 하니 아직 멀리 가진 못했을 터였다.
* * *
“누구지?”
크리스탈 관을 든 채 뛰어가던 리나는 달리던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귓가에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들렸다.
매우 먼 거리였지만 뛰어난 청각을 지닌 리나의 감지를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설마 뇌격 기사단이란 놈들인가.”
이곳을 습격할 만한 자들. 그리고 가짜 편지를 넣을 정도의 녀석들이라면 아직 파악이 안 된 그 신비의 기사단밖에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리나는 잠시 이를 악물더니 좌우를 둘러보았다.
“좋지 않은데. 이걸 든 채로 싸울 수는 없어.”
평상시라면 상관없었다. 어떻게 되든지 간에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싸웠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짐이 있었다. 크리스탈 관을 이렇게 어정쩡한 자세로 들고서는 싸울 수 없었다. 더구나 혹시라도 싸움 도중에 관 안에 잠들어 있는 아이가 다친다면 자신도 곤란했다.
“한 놈인 것 같으니…….”
리나의 귀에 들려오는 적은 단 한 명. 그리고 특수한 훈련을 받았는지 발이 무척 빨랐다. 엄청난 속도로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촤르륵 촤락.
리나의 칼이 칼집에서 뽑혔다. 그것이 뽑혀 나오자 좁은 동굴 길 사이에서 특이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촤악.
잠시 후 가는 은색의 실이 성인 남자의 가슴 높이에 매어졌다. 보이지 않는 실이 좌우로 꽉 고정되었다.
빙긋 미소를 지은 리나는 크리스탈 관을 든 채 근처로 이동했다. 적당히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있었다. 잠시 후 이곳을 지나가던 자가 베어지면 그의 신분을 확인할 만한 것을 수집한 후 떠나면 될 터였다.
‘잘 가, 안녕.’
검은 그림자가 보이자 리나가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죽는지 알지도 못한 채 몸이 잘려 나갈 추적자를 잠시 애도하였다.
“호오. 이런 데 이런 게 있어?”
하지만 리나의 예상과는 달리 자신을 뒤따라온 남자는 정확하게 실버 테일의 앞에서 멈춰 섰다.
“뭐야?”
리나는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적이 너무나 쉽게 자신의 트랩을 발견하니 황당해진 것이다.
“거기인가?”
카이젠의 고개가 돌아갔다. 귀신 가면 사이로 그의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뭐지? 당신의 정체는?”
리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카이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감각이 눈앞의 남자가 보통 상대가 아니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리나의 손바닥에 땀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했던 일.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빨리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힐끗.
그녀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는 크리스탈 관이 놓여 있었다. 지금 잠들어 있는 소년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안전하게 데려가야 했다. 그것이 이번 작전을 시행하면서 소년의 누나와 했던 약속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지크. 만약 지크를 데려가지 못한다면 지크의 누나인 아레나가 미쳐 날뛸지 몰랐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이었다. 반드시 지크를 데려가야 했다.
“저기엔 뭐가 들었지?”
카이젠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몇 걸음 앞에는 실버 테일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곳을 지나쳤다가는 몸이 두 조각 날 터였다. 하지만 카이젠에게는 소용없는 트랩이었다. 누구보다도 이것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실버 테일에 마자브란의 가루라. 내가 좋아하던 것들이군.”
카이젠이 리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디서 그런 것을 얻었는지 설명을 해 줘야겠는데.”
“치잇. 네 녀석이 누군지부터 밝혀라!”
리나가 소리쳤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물품들은 설사 7인의 기사단이라 불리는 고위 귀족들의 연합체도 알 수 없는 극비사항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가 그것을 술술 말하니 놀란 것이다.
“저 관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같이 말해 줘야겠어. 눈짓을 보아하니 꽤 소중히 다루는 모양이군. 아마도 저것만 아니었다면 벌써 도망쳤을지도 모르는데.”
“어느새?”
리나가 소리쳤다. 카이젠의 몸은 실버 테일로 가로막힌 지역을 벗어나 있었다. 잠깐 눈동자를 돌린 사이에 그곳을 빠져나온 것이다.
“무슨 방법으로 거길 지나쳐 왔지?”
리나가 자신의 검을 들어 올리며 물어보았다. 그러자 카이젠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한 가닥밖에 없었기에 그냥 몸을 살짝 숙이고 들어온 거야. 예전에는 동굴 하나를 꽉 막을 정도로 빽빽하게 해 둔 녀석도 있었는데 이 정도면 무난하지.”
“죽어!”
하지만 리나는 카이젠의 말을 다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이어지는 말을 제대로 들었다면 카이젠이 자신의 무기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었겠지만 지금 리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카이젠을 베어 버리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