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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쾌 1권
인연의 시작, 그리고 호와 쾌
풍신쾌 1권(1화)
序
수백의 불덩어리들이 이글거리는 한가운데 비가 쏟아지고 있다.
비? 순수한 수분의 결정체라고 하기에는 그 느낌이 너무나도 끈적끈적하다.
후두두둑!
또다시 대량의 빗물이 쏟아졌다.
“제십오대 투입!”
일렁거리는 불꽃들 속에서 차갑고도 차가운 음성이 조용히 흘러나온다. 그리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세찬 바람과 함께 뜨거운 비가 하늘에서 내린다.
“십육대!”
후두둑!
“십칠대…… 십팔대…….”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만 같았던 목소리는 일각이 조금 지나고서야 멈췄다.
“허. 미칠 노릇이군.”
짧은 시간 투입된 대(隊)는 총 이십여. 머릿수로 따지면 삼백이 넘는다.
차가운 음성의 주인 주변에 넓게 퍼져 있던 횃불들이 일순 강한 바람에 흔들렸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저 바람.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수백의 창(槍)들 사이를 휘돌며 내뱉는 스산한 소리가 마치 귀신의 울음과 흡사하다.
“대인. 다음 명령을.”
침울함을 감추지 못한 누군가의 음성에 대인이라 불린 사내가 흘끔 돌아본다.
고개를 깊이 숙인 채 대답을 구하는 자. 전신을 녹빛과 황금빛이 어우러진 중갑으로 야무지게 무장한 군문의 장수다. 돌아본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옮긴 사내의 불빛에 비친 얼굴이 마치 토번(吐蕃)에서 볼 수 있다는 여우와 닮았다.
“명령이라…….”
중얼거리는 호면의 사내가 보고 있는 끝자락에 짙은 어둠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사방에 가득 들어찬 작은 불꽃들이 대낮을 방불케 하건만 그 어둠을 밀어내기엔 힘겨워 보인다. 그리고…… 어둠이 움직였다.
촤악!
털어낸 무언가가 사방으로 뿌려진다. 분명한 피비린내. 호면의 눈이 좁아진다.
어둠은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꽤 거대한.
엿가락을 당겨 올리는 것과 같은 묵빛의 그림자가 허공을 향해 끝없이 뻗어 나간다.
얼굴이라 짐작되는 곳에 두 개의 붉은 빛이 위로 호선을 그렸다. 그 아래서 슬금슬금 연기를 뿜던 하얀 빛이 눕혀 놓은 초승달처럼 휘어진다. 명백한 비웃음.
호면의 시선이 어둠에서 벗어나 그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빼곡하게 쌓이고 널브러진 수백의 시신들. 곱게는 베인 자리에서 피와 내장을 꾸역꾸역 흘리고 있었고 심하게는 더운 김만을 뭉글뭉글 피워 올리는 육편으로 변해 있다.
다시 시선이 이동했다. 이번에는 어둠을 포위하듯 둥글게 늘어선 병사들. 독기와 적개심으로 번뜩여야 할 눈들이 몽롱하다. 마치…… 죽음에 취한 듯.
“이건 뭐……. 지치지도 않는군.”
어둠은 여전히 말이 없다.
“내공을 운용하지 않는다 들었다. 해서 근접축차 투입을 지시했느니라. 헌데 그 끝을 모르는 무력의 근원은 도대체 무엇이냐?”
호면의 얼굴에 호기심이라는 감정이 어린다. 저 인간, 아니, 인간의 형상을 한 악귀는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검은 괴물이 고개를 뒤편으로 돌렸다. 등에 짊어진 무언가를 말없이 바라보던 괴물의 고개가 빠르게 호면과 주위의 장수들에게 향했다.
“우!”
대답을 구하던 장수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온다. 저 붉은 눈. 증오에 가득 차 있다.
괴물이 오른손에 들고 있던 거대한 도(刀)를 앞에 엎어져 있는 시체의 등에 거칠게 꽂아 넣는다. 그리고 곧 들어 올린 그 손이 머리 위에서 천천히 흔들거렸다.
“거 무슨 의미인가? 지금 본관을 희롱하느냐?”
“바람…….”
“무어라?”
“바람이…… 느껴지지 않나?”
괴물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이 의외로 청아하다. 시체의 산을 쌓은 것 치고는.
사방을 천천히 살피던 호면이 대꾸했다.
“그게 어쨌다는 것이냐? 정신이 나가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냐?”
하늘을 바라보던 괴물이 주먹을 쥐고 정면, 아니, 호면의 사내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 바람이 머무는 공간과 시간은 모두 나의 것!”
호면의 얼굴에 뭔가를 이해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 다음에 보이는 것은 절망.
“나의 공간에서 너희가 존재할 이유 따위는 없다.”
1장 모든 것의 시작(1)
아버지는 사냥꾼이셨다.
인근 다섯 고을을 통틀어 누구도 아버지의 실력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거대한 덩치에 걸맞지 않게 짐승의 그것을 방불케 하는 속도.
태산을 잡아 뒤흔들 만한 무한한 힘.
노린 사냥감을 포기하지 않는 끈기.
대호(大虎)를 눈앞에 두고도 눈동자 한 번 흔들리지 않는 침착성.
무엇보다 아버지를 최고의 엽사로 만들어 준 것은 가공할 활 솜씨였다.
두세 개의 화살을 동시에 날려 여러 표적을 정확하게 명중시키고, 달리는 와중에 쉴 새 없이 살을 쏘아대도 어느 것 하나 목표를 빗나간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비(飛)’라고 불렀다. 성(性)도 없이 그냥 ‘비’였다. 움직임이 나는 듯하다 하여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어릴 적 혼자 마을로 흘러들어 와 사냥으로 생을 꾸려 왔기에 사람들은 오래지 않아 산짐승들에게 당하리라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수백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아 중년이 된 지금은 오십에 달하는 엽사들을 거느리는 우두머리가 되었다.
각 고을 수령들도 아버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때마다 바치는 상납품의 질이 워낙 좋아 윗선에 바치는 뇌물로 요긴하게 쓰이기 때문이라고들 했다. 해서 아버지의 부하들이 가끔 나라에서 금지한 사냥터를 들락거려도 웬만해선 눈감아 주는 것이라고 고을 사람들이 수군거리곤 했다.
그런 아버지가 어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수령의 부탁으로 먼 곳까지 사냥을 나갔을 때라고 한다.
우연히 혼자 상처 입고 병으로 죽어 가는 어머니를 구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부부의 연을 맺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성은 연(淵)이었다.
그리고.
나는 태어났다.
어머니의 배를 찢고 어머니의 죽음을 발판 삼아 세상에 나왔다.
어머니는 몸이 많이 약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연을 맺고 사시면서도 늘 육체의 아픔을 떨칠 수 없었다고 했다.
나를 포기하면 당신은 생을 더 이어 갈 수 있었겠지만 당신께선 나를 택했다.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는 백 일을 우셨다고 한다.
나는 뒷집 아삼(阿三)이네 어머니에게서 젖동냥을 받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호(虎)’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다. 커서 호랑이 잡는 최고의 사냥꾼이 되라는 뜻에서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비호(飛虎)’라 불렀다. ‘비의 아들 호’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몸 약한 어머니를 더 닮아서일까 나 역시 매우 허약했다. 다른 젖먹이들에 비해 훨씬 더 작았고 젖을 빨 힘이 없어 천에 적시어 한 모금씩 먹였다고 한다. 또 한 번 아프기 시작하면 몇 달이고 끙끙대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최고의 사냥꾼이고 동시에 최고의 약초꾼이기도 했던 아버지는 매일같이 산을 휘젓고 다니면서 좋은 약초란 약초는 다 캐고 다녔다.
그 덕분인지 서너 살 무렵부터는 비교적 건강한 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분명 기억나지 않아야 할 그 시절이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이. 밤마다 아버지가 나의 몸을 주무르는 것이 왜 떠오를까? 그리고 그때마다 그 더운 손에서 전해지는 열기가 온몸을 편안하게 해 주었음이.
다섯 살 때쯤에 아버지가 구해 온 어린아이를 닮은 도라지 한 뿌리를 통째로 먹고는 근 사흘간을 앓았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아버지는 나를 꼭 안은 채로 사흘 내내 우셨다.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면서 광인처럼 오열하셨다.
그렇게 사흘을 꼬박 앓고 난 후 겨우 기운을 되찾은 나를 보며 감사하다고 울먹이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 몸이 예전보다 훨씬 건강해졌다.
오래 달려도 전보다 숨이 덜 차고 겨울에도 쉬이 감기에 걸리지 않은 것이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또래의 아이들보다 왜소했고 피부는 파리한 것이 나 아픈 사람이요 하고 이마에 딱 붙여 놓은 것 같다고 아삼이 늘 놀려댔다.
여섯 살 때부터는 아버지에게 사냥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활 쏘는 법부터 산타는 법, 짐승을 가리는 법, 그리고…… 바람을 다루는 법을.
건강한 몸이 되어서일까? 난 또래 아이들 누구보다 빨리 달렸다. 아버지에게서 사냥을 배우는 동네 형들이나 이웃 고을 형들보다도 훨씬 더.
그렇게 계속 달렸다.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과 가슴을 밀어 주는 바람, 팔과 다리를 타고 갈라지는 모든 바람들이 휘잉휘잉 대면서 반갑다고 귀에 속삭이는 듯했다.
운명의 그날이 다가왔다.
내 나이 열네 살이 되었을 때 고을에 새로운 수령이 내려왔다.
나라에 죄를 지어 이 작은 곳까지 쫓겨났다 한다. 모시던 높은 관리가 거란과의 싸움에 대패하여 숙청되고 남은 자들은 낙향된 거라고 포청에서 일하는 아삼의 큰형 아대(阿大)가 말해 줬다.
내가 사는 이 땅이 송(宋)이라 부르는 큰 나라의 일부란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아대 형은 새 수령이 포악하고 악독한 성품에 탐욕스러운 자라고 매일 욕하면서도 주변에 누가 들을세라 늘 조심하곤 했다.
수령이 측근들을 고을 여기저기 풀어서 사람들을 감시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했던 그대로 질 좋은 가죽과 약초를 수령에게 상납했는데 수령은 이에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다.
욕심 많은 수령이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하자 아버지는 당연한 듯이 거절했고 크게 분노한 수령은 아버지를 포함한 여섯 엽사들을 옥에 가두었다.
무려 열하루가 지난 후 다 풀어줄 수밖에 없었는데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상태를 보니 매질을 단단히 당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