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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르트 1권
라인하르트 1권(1화)
서(序)
옷이 마치 거적때기같이 사람이 입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노인이 보기에 그 소년의 인상은 그러했다. 여러 날을 씻지도 먹지도 못한 듯 꾀죄죄한 몸에 피골이 상접해 보였다.
“춥지도 않느냐……?”
제법 날씨가 쌀쌀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원래 청성산은 제법 높은 곳이었다. 현재 노인과 소년이 마주하고 있는 곳은 정상이었으니 추울 것이었다. 소년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여긴 너같이 어린아이가 올 곳이 아니다. 부모가 걱정하고 있을 터이니 하루빨리 돌아가거라.”
노인 딴에는 걱정도 될 것이다. 이러다 소년이 동사라도, 아니면 아사라도 하는 것이 아닐까.
노인이 품 안에서 은자 몇 냥을 꺼내 소년의 손에 쥐어 주었다. 자식을 보지 못했기 때문인지 소년이 마치 손자처럼 느껴졌다.
어렸을 때는 무공수련에 심취해 세상을 잊었고, 이미 정신을 차렸을 때는 혼기가 지난 지 한참이었다.
은자를 움켜쥐고 고개를 들어 올린 소년의 눈이 노인의 눈과 마주쳤다. 노인이 본 소년의 눈은 영롱하기 그지없이 빛나고 있었다.
한참 후, 소년이 운을 떼었다.
“제가 추위에 떨면서, 병에 시달리면서 먹을 것도 먹지 못한 채 이곳에 올라온 이유는…… 청성파를 제 눈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청성파? 청성파라면 청성산에 있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조금 더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반대 방향에 있는 것을 왜 여기서 찾는 것이냐?”
“정상이라면…… 청성파가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저에게 청성파가 어디 있는지 가르쳐 줄 사람은 없더군요.”
청성파의 크기는 천하에 어딜 내놓아도 견줄 만했다. 노인의 얼굴에 자부심이 엿보였다.
“그래, 여기서 본 청성파는 어떠하느냐?”
기대감에 부푼 노인의 표정에, 소년이 저 멀리 보이는 청성파의 전각들을 바라보았다.
“큽니다. 제 생각대로, 아니 제 생각보다도 훨씬 큽니다.”
노인이 소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놈, 정말 크게 될 놈이다.’
문득 소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전 청성파의 제자가 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영감님도 이곳에 계신 것을 보면 근처 마을 사람은 아닌가 봅니다.”
“그래. 아니지, 아니야. 난 이 청성산을 지키는 영감일 뿐이지.”
“성함을 여쭤 봐도 괜찮습니까.”
“천유한. 원래 남의 이름을 물어볼 때는 자신의 이름부터 말하는 것이 정도지만, 너에겐 특별히 말해 주마.”
청풍검(淸風劍) 천유한(天流翰)!
청성파의 현 장문인으로서, 옆구리에 검을 차고 다니는 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소년은 옅게 웃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습니까? 전 청령이라 합니다.”
“…….”
둘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생성되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청성산의 정상에서 안개 사이로 보이는 커다란 청성파를 내려다보았다.
1장 청성파의 청령(1)
사천성 성도의 북서쪽.
관현의 서남쪽에 위치한 청성산에 뿌리를 내린 청성파는 빠른 시일에 청성산에 근거를 두고 있던 살수문파들을 박살 냈다. 청성파의 위세는 중원을 진동했다. 곧 그들의 패도적인 무공은 이름이 났고, 그리하여 청성파는 구파일방의 위치에 오르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청령이 스스로 제자가 되겠다며 청성파에 찾아온 것은 그가 열 살이 되었을 때였다. 그 당시 모습이 꾀죄죄하니 피골이 상접했던 것을 보면 집안이 몹시 가난해서 하나라도 입을 줄이고자 내다 버린 자식 중 하나가 분명해 보였다.
일 년을 유리개걸하며 지내 온 탓에 청령의 몸은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천유한 장문인이 직접 가르쳤지만 청령은 이렇다 할 성취를 얻지 못했다.
그의 진정한 능력은 무(武)가 아닌, 문(文). 그에 학식이 깊어 매우 총명했다.
제갈세가처럼 똑똑한 인물이 많지 않은 청성파였기 때문에 그를 일찍이 군사로 점찍었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사형들은 물불 안 가리고 청령을 괴롭혔다. 자기들 딴에는 온갖 관심이 청령에게 쏟아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청령은 사형들이 나타나 못되게 괴롭히면 오히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사형들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골탕을 먹이는 것도 상대방이 약이라도 오르거나 대드는 기색이라도 있어야 할 맛이 나는 것이다. 그 후로 청령을 괴롭히는 자들은 없어졌지만, 완전히 그를 없는 사람처럼 여기며 관심도 가져 주지 않았다.
그렇게 되니 청령은 자연스레 책을 읽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는 귀가 밝아 책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도 누군가가 자신의 거처 주위로 오면 문 앞을 기웃거렸다.
며칠간 뜸했던 청령의 거처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청령은 책에서 눈을 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형인가? 아닌데. 도대체 누구지? 우리 문파에 이런 발걸음을 가진 사람이 있었나?”
발소리가 작게 빠른 보폭으로 움직이는 소리다. 청령이 문을 덜컥 열어젖혔다. 다음 순간, 청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으응?”
청령의 거처 앞에는 작은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소녀가 청령을 가리키며 물었다.
“오빠, 누구야?”
“오빠는 청성파의 제자인 청령이라고 한단다. 그런 너는?”
“으응, 나는 검연(劍連).”
“검씨라고?”
중원에서 성을 검으로 쓰는 곳은 검각밖에 없었다.
검을 무기로 사용하는 검각은 정도(正道)의 길을 걷고 있는 문파였다.
청령의 머릿속에, 며칠 전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
장로들이 서둘러 편지 한 장을 품에 안고, 장문인의 심부름이라는 말과 함께 며칠간 출타한 적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군.’
* * *
검각의 소각주 검하은(劍河誾)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옆에 있던 동생 연이가 금세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이 참, 연이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람? 오늘은 사람이 통 많아서 찾기가 힘드네.’
그녀는 평소 연이가 사람이 없는 곳을 싸돌아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곳을 중심으로 찾아다녔다. 하지만 청성파 이곳저곳을 돌아다녀도 길을 모르기에 쉽게 찾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이제 여섯 살밖에 안 먹은 아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그녀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갑자기 검하은의 단전에서 내공이 들끓었다. 그녀의 얼굴이 무섭게 변했다.
‘만약 연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소각주 검하은의 이름을 걸고 결코 용서치 않으리라!’
그녀는 한차례 주변인들에게 보이지 않는 경고를 보여 주고는 연이의 기척을 느끼기 위해 모든 집중을 감각에 쏟았다. 바로 그 순간,
“꺄르르르―!”
여자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검하은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동생 연이의 손을 잡고 조금씩 걷고 있는 청년이 눈에 띄었다.
“아! 언니!”
연이가 청년에게서 벗어나 검하은의 품에 안겼다. 검하은이 연이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도대체 어디에 있었니? 얼마나 찾아다녔는 줄 알아?”
“미안해, 언니…….”
“아니, 됐어. 오늘은 이것으로 용서해 줄게. 하지만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발생하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으응.”
연이는 정말 반성을 하는 것인지 고분고분한 표정으로 하은의 말을 들었다. 평소 이런 행동을 보이지 않던 동생을 보며 하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연이를 돌봐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검하은이 고개까지 숙이고 말하자 청령이 손사래를 쳤다.
“은혜라고 할 것까지도 없습니다. 저야말로 연이 때문에 귀여운 동생을 얻은 기분입니다.”
“아! 저, 그럼 이만.”
“오빠, 안녕!”
하은의 손을 잡고 있던 연이가 손을 흔들자 청령도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청성파에 모인 손님들 대부분이 지명도 높은 문파의 후기지수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검하은을 마음에 두고 있어, 말도 못 붙이던 중에 청령과 검하은이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자 그들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청령은 그런 것도 모르고 깊은 고뇌에 빠졌다.
‘뭔가 있긴 있어. 방금 그 사람은 검각의 소각주 검하은이다. 그 사람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 모인 사람들만 봐도 모두 그 사람과 비슷한 정도의 경지에 오른 후기지수들.’
청성파는 구파일방 중 하나다. 당연히 그 규모 면에서는 천하에서 제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이 커다란 규모에도, 오늘 모인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니 객방은 벌써부터 꽉 차 있었다.
청령의 입가가 호를 그렸다.
‘어쩌면 이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군. 후후, 좋았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철저히 알아낼 테다.’
* * *
청성산의 언덕배기에 회색 장포를 휘날리는 노인이 서 있었다.
“정처 없이 중원을 떠돈 지가 어언 이십 년이 다 되어 가는구나.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
노인은 회상하는 듯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그의 머릿속에 과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분은 이계의 절대자의 피를 가진 분이시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분을 이계로 보내야 해.”
* * *
“본인이 이렇게 여러분들을 부른 이유는 이미 서신으로 들어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정파 유명 문파의 사람들이 청성파에 한데 모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개방의 장로인 취걸개가 입을 열었다.
“천유한 장문인께서는 이백 년이나 숨죽이고 있던 마교가 세간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확연한 증거를 가지고 계십니까?”
이백 년 전 정마대전 이후로 마교는 힘이 쇠약해져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정파와 사파의 대립이 흉흉한 이 때 마교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실로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량수불……. 마교라고 해도 그 분파가 수십 개나 된다는 것을 알고 있소. 과연 천유한 장문인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는 그 마교의 이름을 알 수 있겠소이까?”
무당파 장문인인 진영수였다. 배분으로 따지면 구파일방의 수장들 중에서도 제일 높았다.
“불과 삼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중원을 마도천하로 만들었다는 혈파(血派)라고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뭐, 뭣이!”
“혀, 혈파! 정녕 혈파란 말이오? 허어, 이거 어찌할꼬. 혈파는 마교 최고의 교파가 아니오? 만약 혈파가 이백 년 전 자진 붕괴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마도천하를 이뤘다는 그 교파가…….”
좌중의 술렁거림 속에서 천유한이 무겁게 말을 이었다.
“이백 년 전 멸문했다고 알려진 곳이지만, 그 남은 세력이 이백 년 동안 힘을 비축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얼마 전 유천(有天)이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정파 소속의 검연문이라는 문파가 멸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게 어쨌다는 것이오?”
“검연문은 우리 정파에서도 그리 이름을 날리던 문파는 아니었지만, 오십대 문파에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 문파가 고작 한 사람에 의해 멸문을 당했습니다. 그것도 혈파가 자랑하는 아수라혈신법(阿修羅血神法)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검연문을 시작으로, 점점 무림맹 쪽으로 가까워 오면서 문파들이 하나하나 붕괴되고 있습니다. 이 속도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달이면 무림맹을 공격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고, 고작 한 사람에 의해서 말이오? 오십대 문파에 든다면 구파일방의 장로들이라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건만.”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천유한 장문인이 거의 확답하듯이 말을 했다.
“제 생각에 혈파는 또다시 이 중원을 마도천하로 만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수장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에서부터 십 장 떨어진 곳에서 한 사내가 귀를 쫑긋 세웠다.
놀랍게도 그는 중원에서도 한자리씩 꿰차고 있는 장문인과 장로들의 이목을 피하고 있었다.
그 사내는 다름 아닌 청령이었다.
대외에 알려지기로 청령은 그저 방 안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는 서생이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모습은 그 자신만이 알고 있다.
그 누가 청령이 백 년 전 실전된 만상귀일신공(萬象歸一神功)의 후계자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는 평소 방 안에 틀어박혀 학문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만상귀일신공에 심취해 있었다.
평소에 그는 청명심법을 이용해 몸에서부터 내공을 갈무리했다. 어떻게 보면 반박귀진의 경지와 비슷한 효과가 있었다.
그렇다 보니 그의 몸에 방대한 내공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이백 년 만에 혈파의 등장이라!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거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로군. 매일 만상귀일신공을 익히느라 실전감각을 익혀 본 적이 거의 없는데.”
대련이라면 항상 머릿속으로나마 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상에 불과했다. 청령은 자신이 어떤 정도 수준인지 짐작만 하고 있을 뿐, 눈으로 직접 보거나 고수들과 손을 섞어 본 적은 전무하다 싶을 정도였다.
휘리릭!
바로 그때, 순식간에 청령이 있는 곳으로 다가온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바로 검각의 소각주인 검하은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 자리에는 빙허임풍의 신법을 펼쳐 도주한 청령의 흐릿한 잔상만이 있을 뿐이었다.
“분명 이곳에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나의 착각일까?”
검하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그 무엇도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