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라인하르트 1권(2화)
1장 청성파의 청령(2)


청령은 내심 자신의 기척을 느낀 검하은에 대해 감탄했다. 고강한 내공을 소유한 장문인들도 쉽게 자신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저 검각의 나이 어린 소각주가 자신의 기척을 알아차렸으니 놀라운 일이었다.
“여자의 육감은 대단하다고 하더니 사실과 다르지 않구나. 앞으로도 조심해야겠어. 괜히 엿들은 것을 들키기라도 했다간 쉽게 넘어가지 못할 테니까.”
그는 호숫가에 가 앉았다. 그리고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되뇌어 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알아챘을까? 단순히 육감?”
청령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무언가가 있어. 설마 검각의 독문심법 중에 청명심법을 제거하는 심법이라도 있나?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겠군. 청명심법은 어디까지나 고작 이류무공에 불과하니까.”
그렇게 말하고 다시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까 문파 어른들끼리의 대화 자리에는 당연 검각의 각주도 있었다. 소각주가 익힌 것을 각주가 못 익혔을 리가 없지 않은가.
청령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돌을 냅다 호숫가로 던졌다.
풍덩―!
잔잔하던 호수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때 묻지 않은 회색 장포를 입은 노인이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인상착의부터 톡톡 튀는 것이 얼굴조차도 중원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시퍼런 눈동자에 푸석한 갈색 머리, 그리고 툭 튀어나온 코. 벽안인이었다.
“에헴!”
노인이 헛기침을 하고는 소면 먹은 그릇을 탁자에 내려놓은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인가?”
놀랍게도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중원의 말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마치 이곳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사람 같았다.
노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점소이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십 전만 내시면 됩니다.”
“여기 있네.”
노인은 탁자에 구리동전 열 개를 아무렇게나 흩뜨려 놓고는 곧바로 나갔다.
바깥으로 나온 노인은 지평선 끝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열흘 후에 대폭우가 내릴 것 같구나. 이십 년 전과 너무도 같은 날이로다. 앞으로 돌아가야 할 때는 그 순간뿐. 난 라인하르트 제국의 마지막 핏줄을 데리고 꼭 귀환해야 한다. 제국의 재건을 위하여!”



2장 청령을 뒤따르는 노인(1)


혈룡대(血龍隊).
흑의를 입은 자들은 자신들을 이렇게 말했다. 총 백여 명으로 이루어진 혈룡대는 혈파에서 수십 년간 키운 단체였다.
한 명 한 명이 절정의 끝을 바라보는 경지였으니 웬만한 문파로서는 손도 대지 못하고 멸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본교에서 지고한 명령을 하나 받았다.
‘정파와 사파를 가리지 않고, 이 땅 중원에 있는 모든 문파를 멸문해라. 그들에게 마도천하가 다가왔음을 알려야 할 것이다.’
그들은 명령대로 모든 문파들을 멸문했고, 혼자서는 힘든 오대세가나 구파일방 같은 명문파의 경우에는 떼로 쳐들어가 이미 제조법이 실전된 벽력탄을 이용해 하루아침에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다.
중원은 그렇게 혈파에 의해 큰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 많던 청성파의 손님들도 자신들의 문파가 공격당했다는 것을 알고 서둘러 돌아갔다.
쏴아아―!
한 방울 내리던 빗방울도 어느덧 폭우로 돌변하니 청성파 사람들 중에도 바깥으로 나온 자가 없었다. 이미 장문인과 장로들은 머리를 맞대고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고, 사람들 모두는 어두운 얼굴을 쉽사리 펴지 못했다.
중원에 퍼진 소문.
구파일방 중 이미 아미파와 소림사, 그리고 점창파가 멸문을 당했고 개방이 봉문했다. 오대세가에서는 사천당문이 멸문의 위기에 다다라 있었다.
“불과 오십 년 전 그 제조법이 실전된 벽력탄을 이용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지 않소. 우리도 그에 합당한 방어책을 내야 되는 것 아니오?”
청한 장로의 말에, 그의 앞에 앉아 있던 노인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바로 청성파의 최고 배분인 유경련으로, 천유한 장문인의 할아비 되는 자였다.
“후우―! 한 장로는 모르겠지만, 벽력탄의 위력은 그 하나로도 전방 오 장을 초토화할 수 있소. 그 어떤 방법으로도 벽력탄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오.”
“하, 하지만 유경련 사숙조 선배님! 이대로 당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수백 년의 전통을 가진 청성파가 이렇게 무너지는 것을 눈뜨고 바라볼 순 없습니다. 저라도 나서서 싸워 한 놈의 목이라도 베고 죽어야 아쉬울 게 없을 것 같습니다.”
“무림맹에서 이미 독자적으로 움직인 것 같소이다.”
“아니, 지금이 어느 땐데 이제야 움직였다는 말입니까?”
“아마도 혈파의 위치를 추적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버렸을 것이라 생각하오. 무림맹은 추가적으로 각 문파의 후기지수들을 강제집병할 것 같소.”
“후, 후기지수들을 말입니까?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후기지수들이야말로 미래의 중원을 이끌어 갈 주역들이건만, 차라리 우리 장로들이 가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유경련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 눈빛이 언성을 높인 한 장로를 째려보았다.
“나라고 별수 있는 줄 아시오? 장로들은 양성할 수 없지만, 후기지수들은 다시 키우면 된다는 게 현재 무림맹의 생각일 것이오.”
장로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쑥덕거렸다.
“후기지수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별 방법은 없소. 그저 제일 처음 출전한 무사들이 혈파를 멸문하기를 바라는 것 밖에는.”

사흘이 지났다.
방 안에 틀어박혀 자신이 이론적으로만 익힌 심법과 검법 등을 자세히 연구 중이던 청령은 아침 일찍 한 장의 서신을 받을 수 있었다.

친애하는 청령 공자에게.
청성파의 위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곳입니다. 우리 무림맹은 그 청성파의 인재들을 경험과 훈련을 목적으로 현재 중원을 어지럽히는 혈파를 친히 멸문시켜 중원의 안정을 되찾고 싶습니다. 신진 영웅이 되어……(중략)…… 그리하여 이 서신을 받은 후 이틀 안에 낙양으로 속히 모여 주십시오.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을 영웅이라는 달콤한 말로 속삭이는 내용에 불과했다. 후기지수들 전부가 이 말에 속아 입신양명을 하기 위해 낙양으로 모일 것이다.
청성파에서 낙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말을 타고 꼬박 이틀은 가야 한다.
청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서나마 말의 투레질 소리를 들으니 이미 사형들은 떠난 모양이었다. 청령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청령도 낙양으로 가는 것을 알 테지만, 그들은 그를 결코 사제로 여기지 않았다.
‘이 버림받은 기분을 지우기 위해 매일같이 청성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사람들과 친해졌는데…… 역시 사형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군.’
그가 무공의 수위를 밝히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사형들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형들은 이번에는 머리가 좋다는 이유로 청령을 따돌렸다.
철퍼덕―!
신을 신고 있던 청령의 발밑에 진흙이 잔뜩 묻었다. 하지만 청령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청령은 비를 맞으며 한 발자국씩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이윽고 유경련과 천유한이 머무르는 거처에 가서 절을 한 번씩 하고는 옷을 털어 낸 후 바로 길을 떠났다.
대문을 나온 청령은 지금껏 자신이 머물렀던 청성파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 순간, 그의 몸이 약간 떠올랐다.
만상귀일신공을 익힐 때, 같이 손실되었던 빙허임풍(憑虛臨風)을 펼칠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미 만상귀일신공을 팔성이나 이룬 청령에게 오랜 시간 빙허임풍을 사용하는 정도야 가뿐했다.
‘장로님들과 장문인 어르신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신법은 최대한 자제해 가면서 사용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론적으로만 익혔던 기술들을 낙양에 도착하기 전까지 최대한 내 몸에 익숙하게 만들어야 한다.’
청령의 눈이 이채를 발한 순간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의 몸은 놀랍게도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오 장씩 쭉쭉 뻗어 나갔다.
“현재 내가 익히고 있는 무공을 총정리하자면…….”
내공심법에는 만상귀일신공이 존재하고, 신법에는 빙허임풍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미 대성한 청명심법도 있었고, 검법에는 만상귀일검법(萬象歸一劍法)과 다섯 초식으로 이루어진 구하천풍검법(九河天風劍法)이 있다.
장법은 일류무공인 최심장(催心掌)을 대성하고 있으며, 손실된 구하천풍장(九河天風掌)을 오성이나 이루었다.
또 권법은 천풍무형신권(天風無形神拳)을 고작 삼성 이루었지만, 무공초식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지법은 칠십육로무형지(七十六路無形指)로 일성이지만, 삼십 장이나 떨어진 곳의 암석에 구멍을 뚫을 정도였다. 그 외에도 청성파의 여러 무공들을, 이론뿐만 아니라 그 초식들을 가볍게 몸에 익혀 두고 있었다.
‘어차피 이틀 안에만 낙양에 도착하면 된다. 낮에는 이동하고 밤에는 수련에 수련을 거듭해야 최소 방해는 되지 않을 테지. 방 안에 틀어박혀 이론적으로 익힌 무공은 실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후후, 생각해 보니 지하석실에서 발견한 무공들이 이리 도움이 될 줄이야.’
과거 청령은 정말 서생이 될 운명에 처한 재능 없는 제자에 불과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머리가 총명했다.
어렸을 때만 해도 장난을 좋아하던 그였기에, 마치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청성파 안을 매일같이 들쑤시고 다녔다. 그런 그가 여러 공헌을 세운 조상들의 무덤가에서 지하석실로 들어가는 문을 발견한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석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진법을 파훼해야 했기에 그는 나날이 진법을 연구했다. 그리고 삼 년째 되는 날 그는 비밀을 풀고 드디어 지하석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놀랍게도 석실에서 발견한 것은 이미 청성파에서 실전되었다는 무공들이었다. 그 무공을 남긴 조상은 당시 청성파에 자신의 진전을 이을 제자가 없자 무공들과 함께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후에 누군가 자신의 무공들을 발견할 경우 청성파에서 진전을 이을 자를 찾아 달라는 글귀가 석실 안쪽에 적혀 있었다.
청령이 출발하기 전 유경련의 거처에 들렀던 것은 그저 인사를 드리려는 것뿐만 아니라 무공들을 전해 주기 위함이었다. 물론 사본에 불과했다. 청령이 진본을 모두 외운 후 예전에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청령의 신형이 눈에 보이지 않을 빠르기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뒤로 보이지 않는 작은 그림자가 그를 쫓았다.

다섯 시진(열 시간)을 꼬박 달린 청령의 내공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청령은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을 생각으로 더욱 발을 놀렸다.
쏴아아아!
길이가 최대 이십 장은 될 법하고, 폭만 해도 사십 장은 되는 웅장한 폭포가 청령의 눈앞에 나타났다.
중원 전역에 내리는 폭우 때문인지 폭포의 깊이가 남달라 보였다. 청령은 폭포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곧바로 장작을 구해다가 장작을 피운 후, 가부좌를 틀어 앉아 만상귀일신공을 운용했다.
‘내공의 양이 만만치 않은데 빙허임풍이 생각보다 많은 내공을 잡아먹는군, 후후. 하긴, 이렇게 오랫동안 신법을 펼쳐 본 건 처음이니 내공의 양을 조절하지 못했어.’
문파에서는 신경 쓸 것이 한두 개가 아니라 신법을 펼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는 온몸이 피로에 지쳤으면서도, 겉으론 지친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기뻤다.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 바깥에 나와 신법을 펼치고 폭포 앞에 서서 무공을 연마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꿈도 꿀 수 없는 얘기였다.
그는 하단전에 빠른 속도로 차오르는 내공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낙양에 가면 실력 좋은 후기지수들이 많이 있겠지. 그곳에서 청성파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으려면 그때까지 내가 익힌 무공에 최대한 익숙해져야 한다.”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유리개걸하며 돌아다닌 그때에 자신을 거둬 준 고마운 천유한 장문인. 그에게는 목숨으로도 갚지 못할 은혜를 입은 셈이었다.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과연 지금쯤 장문인 어르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계실까? 실전된 청성파 최고 무공들이 발견되었는데. 아마 때가 때인 만큼 지금은 아니겠지만, 세상이 잠잠해지면 폐관수련에 들어가시겠지.”
터무니없는 실력으로 혈파를 저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영약으로 내공을 늘리고 온실의 화초처럼 나무를 상대로 검을 휘두른 후기지수들에게, 목숨을 걸고 싸워 온 혈파인들과의 결투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청령은 죽으러 간다는 생각이었다. 그러자 지금껏 얼굴 한 번 못 본 부모가 생각나 원망스런 기분이 들었다.
“후후, 부모가 날 그렇게 낳아 놓고 버리지만 않았으면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상상도 못했을 텐데.”
타고난 운명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청령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부모에 대한 생각을 훌훌 털어 버리고 폭포와 대면했다.
웅장한 폭포의 모습에 주눅이 들 만도 했지만 청령은 단전에서 공력을 끌어올렸다.
실제로 신법이나 신공 이외에 무공을 펼쳐 보이는 일은 처음이었다. 머릿속으로만 펼칠 때와는 달리, 내공이 모든 혈들을 유린하며 그의 손에 모였다.
“칠십육로무형지!”
이윽고……
그의 손가락 하나에서 하얀 기운이 화살처럼 쇄도해 나갔다.
쒜에엑―! 퍼엉!
폭포의 중간 부분이 잠시 삼 장 정도 뚫렸다가 되돌아왔다. 물줄기가 세차게 튀었다.
“구하천풍장! 하압!”
호기 어린 기합과 함께 구하천풍장이 펼쳐졌다.
청성파의 무공은 본래 악랄하고 잔혹한 것들이 많았다. 구하천풍장의 위력은 아홉 갈래의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다수를 상대로 한 싸움에나 사용할 만한 무공이었다.
보이지 않는 구하천풍장의 위력이 폭포의 십 장을 여지없이 꿰뚫고는 사라졌다.
“구하천풍검법 일초식 풍룡비상!”
아홉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진 구하천풍검법의 묘미는 그 초식들이 모두 연결돼 있다는 데 있었다. 그중 첫 번째 초식 풍룡비상은 시전자의 몸을 가볍게 만들어 수십 장을 뛰어오르게 하는 수법이었다.
청령의 몸이 십 장은 날아올랐다. 허리춤에서 두툼한 칼을 꺼내 든 그가 검을 아래로 내리치며 외쳤다.
“제이초식 파지풍룡(破地風龍)!”
검이 순간 옅은 실날을 흩뿌리더니 방금 전까지 청령이 서 있던 땅을 강하게 타격했다.
쿠웅―!
이윽고 땅이 와르르 무너졌다. 청성파의 무공은 대부분 힘을 표출하는 것들이 많았다. 초식들의 이름에 ‘풍룡’이 들어가는 것은, 풍룡이 악랄하고 지독한 힘을 표출하기 때문이었다.
“조절이 조금 미숙하네. 확실히 체력 면에서는 조금 힘들긴 해.”
청령은 땀을 닦아 내고는 다시 한 번 검을 들어 올렸다.
순간 누군가가 장작불을 향해 무작정 달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상당히 빠른 속도. 무림인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저런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이윽고 청령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무림인을 보고 놀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