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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르트 1권(3화)
2장 청령을 뒤따르는 노인(2)


한 여인이 숲 속을 재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여인의 등에는 한 소녀가 업혀 있었는데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복면인 열이 쫓고 있었다.
그녀와 복면인들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는 걸로 봐서, 용빼는 재주가 있지 않은 이상은 벗어나기 힘들어 보였다.
“하악! 하악! 놈들을 너무 물렁하게 봤어.”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 용모는 가히 경국지색이라 할 만큼 매우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녀의 정체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검각의 소각주였던 검하은이었다. 지금은 검각이 멸문을 당한 후 혈파의 혈룡대에게 사흘을 넘게 쫓기는 몸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후기지수였다고 한들, 절정고수들을 여럿이나 상대할 정도로 내공이 깊지는 않았다.
검을 여러 번 섞어 본 그녀는 결국 포기하고 냅다 도망가기로 결정했다.
그때 그녀의 눈에, 장작불이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순간, 그녀의 눈이 번쩍 하는 이채를 발했다.
‘이런 깊은 산속에 누군가가 있다고? 정말 다행이야. 최소한 연이라도 남겨 두고 갈 수는 있겠어!’
그녀는 지체 없이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검하은을 뒤쫓던 혈룡대 일원들이 일제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장! 어찌해야 합니까? 인근에 사람이 있다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호! 상관없다. 어차피 사람이 있다고 한들, 살인멸구를 해서 세상에서 지워 버리면 그만이다.”
복면인들은 시퍼런 단검을 뽑아 들고 검하은의 뒤를 쫓았다.

검하은은 장작불이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숨이 멎을 뻔했다. 웅장한 폭포, 그리고 그 앞에 월광을 받으며 서 있는 사내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그녀도 익히 알고 있는 사내였기 때문이다.
“처, 청 공자가 어째서……?”
왜 이곳에 청령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한편, 청령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검 소저? 어, 어떻게 검 소저가 여기에?”
“자초지종을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어서 빨리 연이를 데리고 도주하세요! 이렇게 있다간 죽을지도 모른다구요!”
최소한 연이라도 살려 보낼 생각이었다. 검하은이 등에 업힌 연이를 청령에게 넘겼다.
마혈을 점했는지 연이는 죽은 듯 마비된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연이를 넘기고 나서야 검하은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연이가 청 공자와 안면을 트고 있었으니 다행이야. 이로써 연이는 살아남을 수 있겠지. 연이야! 넌 검각의 마지막 후손이야. 네가 훗날 이 일을 기억한다면 검각을 재건해 주길 바란다!’
“어서 가시라니까요?”
그녀가 소리친 그때까지도 청령은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였다. 복면을 뒤집어쓴 일단의 무리가 검하은의 뒤를 급습해 왔다.
“이, 이런! 제가 이들을 최대한 막아 보겠어요. 이 틈을 타서 얼른 도망가세요.”
그녀는 아직도 머뭇거리는 청령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짜증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검하은이 보기에 청령은 일류도 되지 못한, 이류무사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 도망간다 해도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녀는 장검을 꺼내 들고 내공을 주입했다. 실낱이 흩날리는 것처럼, 그렇게 검기(劍氣)가 솟아올랐다.
하지만 청령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은 검각을 무너뜨리기로 작정을 했나요? 아니면 저들과 동조라도 했나요?”
청령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복면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
“어서요!”
그 말과 함께 그녀가 복면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간, 옆구리가 불에 덴 듯 시큼한 느낌이 들었다.
“크윽!”
사흘이나 계속되는 추격전에 내공을 소모하고 정신적 피로감에 휩싸인 검하은이 그들의 공격을 당해 낼 재간은 없었다. 검하은은 옆구리를 왼손으로 감싸고 검병을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끄, 끝났어. 최소한 일각(15분)이라도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저들을 너무 과소평가한 게 나의 잘못이었어. 이, 이토록 허무하게, 백오십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검각이 무너지는 것인가?’
그녀의 고운 이마가 찡그려졌다. 그녀의 눈앞에 용맹한 기운을 담고 있는 열 개의 검이 나타났다. 그때였다.
그녀에게 전음이 들려왔다.
“살고 싶다면 당장 뇌려타곤을 하십시오, 검 소저! 그리고 전 여자를 두고 도망가는 그런 놈이 아닙니다.”
그녀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뇌려타곤은 형편없게 땅바닥을 구르는 자존심을 버리는 수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음대로 땅바닥을 볼품없이 굴렀다.
당연히 열 개의 검은 허공을 갈랐다. 그들은 설마 콧대 높은 검각의 소각주가 뇌려타곤을 할 줄은 몰랐기에 순간 허점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허점을 틈타 청령이 장을 후려쳤다.
“구하천풍장!”
그의 손바닥에서 아홉 갈래의 맹렬한 기운이 뻗어 나왔다. 복면인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들은 재빨리 검을 거둬들이고 방어 초식을 펼쳤다.
콰앙!
“큭!”
장을 맞은 복면인들이 그 강력한 공력을 견디지 못하고 오 장 밖으로 튕겨 나갔다. 구하천풍장의 위력이 아홉 명을 즉사시켰으나, 아직 한 명의 복면인이 살아남았다.
그는 그들 중에 기세가 제일 거대했다. 복면인들을 이끌고 있던 대장이었다. 그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제길, 설마 저년이 믿는 구석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군. 그래도 그렇지, 우리 혈룡대가 이토록 허무하게 당할 줄이야…… 그렇다면!’
순간 복면인 대장이 땅에 누워 있는 검연의 앞으로 다가가 칼을 목에 대었다.
“여, 연아!”
연이는 마혈을 점해 있어 움직일 수 없는 몸이었기에 저항도 하지 못했다.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놀라 입술을 벌벌 떨 뿐이었다.
“잠깐, 더 이상 움직이지 마라. 만약 너희 둘 중에 누구라도 움직이면 이 고운 목이 순식간에 잘려 나갈 테니까.”
“더, 더러운 놈! 감히 움직이지도 못하는 아이를 인질로 잡다니.”
“어, 언니. 나, 난 괜찮으니까 그냥 이놈을 죽…… 꺄악!”
복면인이 칼을 살짝 누르자 연이의 목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 이상 입을 열면 가만두지 않겠다. 너희도 검을 내려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끄윽!”
칼이 연이의 목을 더욱더 비집고 들어갔다. 복면인들의 칼에는 대부분 극독이 묻어 있기에, 미미하나마 그 상처를 통해 독이 침투했다. 연이는 물론, 검하은도 옆구리에 당한 상처 때문에 얼굴빛이 대번에 변하고 있었다.
검하은은 사실상 극독에 중독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정신력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이윽고……
검하은은 결국 검을 내려놓았다. 다리가 어찌나 부들거리는지 위태로워 보였다. 그녀는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에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다.
“연이는 내가 잘 알아서 구하겠소. 검 소저는 촌각이라도 빨리 운기를 하시오.”
“하, 하지만……!”
“당신 말대로 검각을 이대로 무너뜨릴 작정입니까?”
검각의 재건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상승경지의 무공을 가지고 있는 자가 꼭 필요했다. 연이는 삼류 수준도 되지 못했으니, 검하은이 없다면 혼자 검각을 재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결국 검하은은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는 곧바로 운기에 들어갔다.
그것을 본 복면인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이런 상황에 운기에 들어간다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운기 중에는 개미 한 마리가 몸을 기어 다녀도 기혈이 뒤틀릴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복면인과 검하은의 거리는 고작해야 일 장 반. 그리고 검의 길이가 삼 척 정도 되니 고작 두 보만 걸어가 찌른다고 해도 검하은의 목숨을 취할 수 있을 터였다.
복면인은 검하은과 청령의 거리를 계산해 보았다.
적어도 삼 장은 돼 보이는 거리였다. 아무리 상대가 일장에 아홉의 혈룡대를 죽인 자라 해도 자신은 혈룡대에서 경공술로 극의를 이뤘다. 중원을 둘러보아도 신투가 아닌 이상 자신을 경공으로 이길 자는 없었다.
‘저년의 목을 취한 후 곧바로 다시 인질극을 벌이면 된다. 멍청하군! 이런 상황에서 운기라니. 하긴,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순간이겠지.’
운기를 한다고 해도 치료가 가능한 독이 아니었다. 살짝 베기만 해도 일각이면 어떤 고수라도 죽일 수 있는 극독이었다.
‘흐하하, 결국 운기 때문에 고통의 시간만 늘어날 뿐이다. 저놈이 아무리 고수라 해도 저년에게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공격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짝 반보를 움직였다. 어찌나 은밀했는지 먼지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복면인이 연이의 목에서 칼을 떼고 마지막 남은 한 보 반을 걸으며 검하은에게 칼을 뻗은 것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파밧!
그때, 청령이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으로 검하은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손목이 번개같이 움직여 검신을 쳐 냈다.
탕―!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청령은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뜨는 복면인을 향해 일권을 내질렀다.
쿠웅!
내가중수법이 가미된 공격이었는지라, 복면인은 겉은 멀쩡했으나 내상이 깊었다. 즉사했는지 다리에 힘이 스르륵 풀려서는 그대로 쓰러졌다.
청령은 복면인을 밀쳐 내고 곧바로 연이를 구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령, 령 오빠…….”
“더 이상 말하지 마. 몸에서 힘을 빼.”
간절히 자신을 부르는 연이를 보던 청령이 아혈을 점했다. 일단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볼 일이었다. 점해 있던 마혈을 풀고 곧바로 연이를 일자로 눕혔다.
그의 손이 허공에서 움직이자, 연이의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추궁과혈의 수법이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연이의 거골혈, 견정혈, 결분혈, 경문혈 등을 점해서 더 이상 독이 어깨 밑으로 퍼지는 것을 막았다. 길이 막히자 독 기운이 팔과 머리 쪽으로 밀고 들어갔다.
청령은 곧바로 연이의 모공 쪽으로 내공을 집어넣었다.
만상귀일신공으로 얻은 내공들은 모두 악랄하고 폭력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청령의 공력이 독 기운을 일순간에 휘어잡았다. 청령은 이마에 난 땀을 닦아 낼 새도 없이 곧바로 거골혈부터 경문혈까지를 다시 점했다가 풀고 자신의 공력으로 임독양맥을 타통하여 하단전으로 이끌었다.
“쿨럭!”
연이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튀어나왔다. 파랗게 질려 있던 얼굴에는 어느새 편안한 기색이 깃들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임독양맥을 타통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연이가 자신의 내공을 더 잘 받게끔 몸에 살짝 변화를 준 것뿐이었다.
청령은 자신의 내공을 손바닥으로 다시 흡수했다. 공력들이 하단전에서 뽑아져 나와 청령의 손바닥으로 모였다.
그의 손바닥에는 극독과 공력이 한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게 바로 그 독이로군. 생각보다 지독해. 이 정도 위력이라면 혼자서 중소문파를 무너뜨리는 것도 일도 아니겠어.’
화르륵―!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 열양지기에 독이 한순간에 타올랐다. 청령은 재빨리 호수로 달려가 연이의 목을 축여 주고, 운기에 들어가 있는 검하은의 등 뒤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옷을 찢자 마침내 속곳이 드러났지만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속곳까지 그대로 찢었다. 그녀의 뽀얀 살결이 월광 때문인지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그는 곧바로 검하은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제부터 제 말 잘 들으십시오. 검 소저에게 열양지기의 공력을 밀어 넣을 것이니, 내 공력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혹시 고통이 뒤따르더라도 입을 열어선 절대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
그녀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거의 경악 상태에 빠져 있었다.
열양지기가 어떤 기운인가. 태양지체가 아닌 이상은 몸과 어우러지지 않아 백이면 백 죽는다는 희대의 기운이 아니던가!
하나, 그녀는 뛰어난 안목으로도 청령이 태양지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상 청령이 갖고 있는 열양지기는 그가 붉은 전갈의 내단을 먹고 만상귀일신공으로 운기해서 우연히 얻은 기운이었다. 다만 그때 열양지기뿐만 아니라 빙정을 먹고 얻은 한기까지 있었으니, 그 둘이 상쇄해 태양지체가 아니라도 청령이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청령은 열양지기가 효과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검하은의 모공을 통해 공력을 집어넣었다. 그의 공력이 마음껏 몸속을 유린하고 다니는 극독을 하나하나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처 부위도 크고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그녀의 몸에 퍼진 독은 연이의 경우보다 훨씬 심했다.
“크윽.”
고통의 단말마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하지만 열양지기는 너무 거대한 기운이었기에, 검하은이 쉽게 받아들일 만한 것이 아니었다. 연이의 몸에 흘러 들어간 열양지기의 양은 미미했지만, 검하은의 단전에 들어간 공력은 극독뿐만 아니라 그녀의 몸도 같이 불태우고 있었다.
청령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대로 가다간 독을 잡기도 전에 화상으로 검 소저가 죽을 것이다. 아까와 같이 그냥 열양지기를 뺀 공력으로 무작정 잡아서 소멸시키는 방법밖에는 없어.’
그는 서둘러 열양지기를 거둬들이고, 연이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순수할 정도로 포악한 공력으로 극독을 잠재웠다. 하지만 독이 퍼지는 속도와 잠재우는 속도가 거의 일치했기에 독을 잡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