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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르트 1권(4화)
2장 청령을 뒤따르는 노인(3)
아무리 심후한 내공을 가지고 있는 청령이라 해도 힘들고 지치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곧바로 임독양맥을 향해 공력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이의 경우 나이가 어려 불순물이 없기에 임독양맥을 뚫는 일이 매우 쉬웠지만(물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미 약관의 나이가 지난 검하은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임독양맥을 타통하기 위해서는 건드리기만 해도 죽을 수 있는 여러 개의 사혈과 자칫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는 마혈들을 지나쳐야 했다. 청령의 공력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한 빨리 해치워야 했다.
그는 곧바로 임맥과 독맥을 향해 기운을 나누어 밀어 넣었다. 신경이 둘로 분산되자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으으읍!”
억지로 뚫으려고 하니 고통이 점점 심해졌다. 질끈 깨물렸던 검하은의 입술이 조금씩 열렸다. 그녀의 고운 이마가 고통으로 찡그려졌다. 그때였다.
뻥―!
그녀는 마치 무언가가 안에서 폭발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머리가 매우 편안해지면서 그동안 독 때문에 숨도 못 쉬던 공력이 서서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역시 연이와는 다르군. 그녀 혼자서도 충분히 독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그 독을 내공으로 바꿔 독기가 상승기운이 되는 기연을 얻을 수도 있을 테지.’
청령이 공력을 거둬들이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땐 이미 나무 사이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청령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애초에 폭포에서 수련을 하자고 마음을 먹었는데 생각보다 좋은 성과를 얻었다. 내심 내공 운용법이 미숙하다 생각하던 그였기에 이 일은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고, 연이나 하은 또한 임독양맥을 타통하는 기연을 얻었으니 앞으로 실력이 일취월장할 수 있을 것이었다.
“으다다닷!”
그가 기지개를 켜며 팔을 쭉 뻗자 뼈마디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곁에는 연이가 그렁그렁한 눈을 껌뻑거리고 있었다. 연이 또한 하룻밤 새에 피부가 굉장히 고와졌다.
그러고 보니 내심 검 소저가 왜 여기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연아, 어서 여기 앉아 봐.”
“응, 오빠!”
연이도 자신을 치료해 주고 구해 준 사람이 청령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말을 잘 따랐다.
“저 사람들한테 쫓기던 이유가 도대체 뭐야?”
연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모른다는 의미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을 훌쩍였다.
“흑흑, 우앙! 검각에 돌아가니까…… 흐윽, 각주님이랑 언니 오빠들이 다 죽어 있었어. 흑! 흑! 그리고 갑자기 이상한 아저씨들이 쫓아와서 언니랑 나는 무조건 도망갔어.”
그러면서 청령의 품 안으로 쏘옥 파고들어 왔다. 청령은 그 모습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걱정 마라. 이제부터 이 오빠가 지켜 줄게.”
혈파가 중원정벌 계획을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 같은 일이 벌어졌다. 만약 그들이 정말 세상에 나온다면 중원정벌은 순식간에 이뤄질 테고, 그때부터 중원은 마도천하가 될 것이었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청령은 청성파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무림맹의 말을 따르고 있어, 죄 없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것은 결코 가만히 두고 볼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등 뒤에서 검하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슬쩍 품에 안고 있던 연이를 풀어 주었다.
연이가 재빨리 달려가 하은의 품에 안겼다.
“어떻게 하다니요.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낙양으로 갈 겁니다. 낙양에는…….”
“낙양도 좋은 방법이죠. 확실히 후기지수들끼리 은밀히 만나는 것보다는 백주대낮에 사람 많은 낙양이라면 혈파의 이목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군사의 계략은 정말 대단했어요. 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혈파는 귀신같이 파악하고 사람이 많은 낮에 후기지수들을 공격했죠.”
“어, 어떻게 그런 일이!”
청령은 진정 분노했다. 무림의 일로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죽어 나갔을 것이 눈에 훤했다.
“세간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무림맹의 군사인 제갈벽이 배신을 했다는 것이 제일 유력해요.”
“아니, 군사가 배신이라니요?”
그는 아직 중원의 자세한 소문이나 진위를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제갈벽은 예전부터 매우 간사한 인간이었어요. 대세가 혈파 쪽으로 기울어진다고 생각하니 여지없이 몸을 돌린 거죠. 그 증거로, 현재 제갈벽의 모습은 낙양에서의 일을 추진한 뒤로 볼 수가 없어졌어요. 오대세가에서 살아남은 세가도 고작 제갈세가뿐이죠.”
“흐음!”
청령은 어느 정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제갈벽을 생각하며 치를 떨었다.
그때 청령이 이마를 쳤다.
“아! 그러고 보니 후기지수들을 강제집병 하겠다는 것도 제갈벽 군사입니까?”
검하은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거기까지 설명한 적도 없건만 청령은 이미 한발 앞서 가고 있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지금 막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그래도 한때는 서생의 삶을 살면서 먹향을 풍기며 책에 파고든 적이 있었다. 그때는 무공을 감추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허투루 공부한 것이 아니었다.
청령은 다시 움직일 채비를 마쳤다.
“그럼 검 소저께서는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검하은은 갑자기 혼란에 휩싸였다. 밤새도록 도망만 다녔으니 어디로 가서 몸을 숨길지는 생각해 둔 바가 없었다.
“그럼 일단 저와 같이 청성파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청성파는 호락호락한 문파가 아니니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비급이 있지 않은가! 그 비급을 맛도 보지 못하고 죽는다면 청성파 사람들은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하고 한이 맺혀 구천을 떠돌 것이다.
검하은은 잠시 머뭇거렸다. 자기 때문에 피해가 가는 것은 아닐지 생각한 것이다.
청령이 빙그레 웃으며 연이를 쳐다보았다.
“지금 당장 갈 데도 없는 데다가, 연이가 있지 않습니까? 연이를 위해서라도 청성파로 돌아가는 게 더 나을 겁니다.”
검하은이 연이를 힐끔 쳐다보았다.
“좋아요. 그럼 그때까지 잘 부탁해요, 청 공자.”
3장 용아천(1)
쿠구구궁!
청성파의 화려한 전각들이 무너져 내렸다. 무사들이 곳곳에 난 불을 끄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어서 불을 꺼라! 불이 옮겨지면 안 된…….”
슈슈슉―!
어둠 속에서 날아온 암기가 무사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사방곳곳에서 암기들이 날아와 귀신같은 솜씨로 무사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청성파의 장문인과 장로들이 혼비백산해 바깥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적습이다! 제자들과 무사들은 들어라! 제자들은 불을 끄고 무사들은 적을 제압하라!”
장문인 천유한의 외침이 끝남과 동시에, 청성파 무인들이 하나하나 진영을 갖춰 갔다.
장로들과 장문인 또한 각각 검을 뽑아 들고 소리치며 적들을 향해 거침없이 휘둘렀다.
혈파의 무사들이 난입하자 청성파 무사들과 제자들은 모두 검을 뽑아 들고 적에 맞섰다.
챙챙챙―!
몇 초식을 서로 겨뤄 본 자들은 모두 사색이 되어 몸을 떨었다. 그들 모두가 바로 청성파 제자와 무사들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혈파의 무공들. 그것은 그들이 어찌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실력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났으니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대부분의 제자들이 죽고 무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살아남은 자 중 한 명이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청성파의 역사는 무너지지 않는다! 청성파 만세!”
만세를 외친 제자의 입에서 피가 토해졌다. 어느새 그의 가슴에 혈파의 고수가 검을 찔러 넣은 것이다.
그 외침이 터짐과 동시에 살아남은 자들은 하나같이 눈물을 괸 채 만세삼창을 불렀다.
“청성파 만세! 청성파 만세! 청성파 만세!”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이 죽어 쓰러질 때까지 제자들과 무사들의 외침은 천하를 울렸다. 청성파가 멸문하는 데는 고작 한 시진도 걸리지 않았다. 장문인과 장로들, 청성파의 최고 배분인 유경련만이 살아남아 숨을 쉬고 있었다.
유경련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자들이 이토록 외쳐 주었으니 후회는 하지 않는다. 살 만큼 살았으니 나 또한 저들과 같이 뼈를 묻겠다.”
확고한 그의 뜻에, 유경련만은 어떻게든 살리려고 하던 장로들 입이 꾹 다물어졌다.
“유한아, 너만큼은 꼭 살아남아 청성파를 재건하거라. 자, 이것을 너에게 주겠다.”
유경련의 품속에서 몇 개의 비급서가 나왔다. 그것은 청령이 떠나기 전에 놓고 간 것들이었다.
“이, 이것은?”
비급서를 받아 든 장문인 천유한이 손을 떨었다. 장로들도 비급서들의 제목을 본 순간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구하천풍검법, 빙허임풍, 구하천풍장법…….’
“이것만큼은 절대 저들의 손에 넘어가서는 아니 될 것이다. 만약 너에게 변고라도 생기면 이 비급서를 즉시 불태워 버려라.”
“아, 아니 됩니다! 어찌 장문인이라는 자로서 문파를 떠날 수 있겠습니까! 전 이곳에 남아 저들의 목을 가지고 황천길에 오르겠습니다.”
“이놈! 네가 그런 생각을 하면 내가 죽어서 어찌 조상님들을 웃는 낯으로 뵙겠느냐!”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천유한의 말에 유경련이 다시 비급서를 빼앗아 들었다.
화르륵―!
비급서들이 불타기 시작했다. 어느새 공력을 끌어올린 유경련이 불태워 버린 것이다.
“허억, 처…… 유경련 어르신! 그것만은!”
장로들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비급서들이 재가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이 비급들을 익히고 있는 제자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청성파가 이대로 멸문한다 해도 그 아이라면 반드시 청성파를 재건할 것이다.”
“그 아이라면……!”
“청령. 그 아이가 이 비급서를 나에게 넘겼다.”
그 말과 함께 유경련의 몸이 궁신탄영의 수법으로 앞으로 튕겨 나갔다. 검을 뽑아 든 그가 호랑이의 맹렬한 기운을 검에 담아 힘껏 외쳤다.
“덤벼 봐라, 이것들아! 노부가 너희를 지옥으로 보내 주마!”
쿠콰강!
호랑이가 아무리 늙었다 한들 그 용맹함이 사라지겠는가! 유경련은 정말 뼈를 묻기로 결심했는지 다음 순간 진원진기를 끌여들였다. 그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날렵해졌다.
진원진기를 사용한 자들은 살아남는다고 해도 더 이상 내공을 수련할 수 없는 일반인의 몸이 된다. 무인에게는 자존심인 진원진기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언정 결코 사용하지 않을 고귀한 기운이었다.
장로들, 그리고 장문인까지 모두 진원진기를 사용해 적들을 패퇴시켰다.
그런 그들의 앞에 열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열둘 중 맨 앞에 있던 자가 창을 가지고 나섰다.
“네놈은 누구냐!”
그자에게서 솟아나는 기운이 범상치 않음을 느낀 유경련이 외치자 그림자가 그를 향해 창을 휘둘렀다.
“그건 염라대왕에게 물어보거라!”
그의 창이 붉은 궤적을 그리며 유경련을 향해 쇄도해 나갔다.
유경련은 그자와 맞선 지 일각 만에 무릎을 꿇었다. 장로들 또한 또 다른 그림자들에 패해 싸늘한 주검이 되어 청성파의 장원에 쓸쓸히 널브러졌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구파일방 중 하나인 청성파.
청성파의 이름은 오늘로부터 역사서에서 지워졌다.
열두 개의 그림자 중 창을 쓰고 있는 자가 옆에 있는 그림자에게 물었다.
“다음 대상이 누군가, 삼호?”
“얼마 전 혈룡대의 열 명의 살수들을 죽인 자가 있습니다. 그가 다음 대상입니다.”
“좋다. 위치는?”
“용아천을 끼고 있는 아미산입니다.”
“아미산이라면 아미파가 있던 곳 아닌가?”
“아미파라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아미파는 이미 멸문한 지 상당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래? 그럼 좋다. 아미산으로 움직인다!”
“예!”
그들이 사라진 뒤 유경련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왼쪽 어깻죽지에서 옆구리까지 단 한 수에 베인 그는 청령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천유한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무인으로서 칼에 맞아 죽는 것은 여한이 없지만 청성파가 자신의 대에서 무너진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령아……! 내 자식 같은 놈. 너만은 죽지 말거라.’
혈파 대부분의 임무를 혈룡대가 처리한다면, 누군가를 암습하는 일을 하는 것은 바로 잠룡수라대(潛龍修羅隊).
총 열두 명으로 이루어진 잠룡수라대는 오늘 한곳에 다다랐다. 옆에는 웅장한 폭포가 있고, 나무 옆에 치워진 시체들은 모두 흑의를 입고 있었다.
잠룡수라대원은 그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아홉 명의 상처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한 명에게 당했을 공산이 매우 큽니다. 다른 한 명의 경우 내가중수법에 의해 내장이 상해 사망했습니다.”
“적의 숫자는 얼마 정도로 추정이 되는가?”
“보폭으로 볼 때 작은 것은 대여섯 살 정도 되는 어린아이고, 다른 보폭은 여인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럼 적은 둘이란 말인가?”
“아닙니다. 희미하지만 다른 한 명이 더 존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는 신기하게도 보폭이 거의 남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전투를 치르고, 자리를 뜰 때까지 최상급 경지의 경공술을 쓰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허어? 그 시간이 제법 짧지 않은데 그렇게 오래 있었다면 많은 공력의 소유자인 것이 틀림이 없군. 그래, 그들이 이곳을 떠난 지는 얼마 정도 되어 보이는가?”
“약 세 시진(여섯 시간) 정도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 쫓는다면 용아천에서 맞닥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좋아, 그럼 십일호와 십이호는 이곳에 남아 현장을 보존한다. 이호부터 십호는 나를 따라와라. 가자!”
“존명!”
잠룡수라대의 대장인 일호는 창을 귀신같이 쓴다 하여, 서도 귀창이라 불릴 정도로 창술의 고수였다. 임기응변에 능하며, 그의 수하들도 암기와 독에 매우 능했다.
그들은 발자국이 남아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찌나 빨랐는지 그들의 신형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