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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르트 1권(5화)
3장 용아천(2)


일전의 싸움으로 상당히 기운이 쇠약해진 연이와 검하은이 힘들어 하자 청령은 가던 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하루빨리 청성파로 돌아가기 위해 세 시진을 넘게 쉬지 않고 달려왔기 때문에 이번 휴식이 이리도 달콤할 수가 없었다.
한숨 돌린 연이가 냇가에서 입을 적셨다.
밤에 있었던 일로 인해 공포에 질릴 법도 하건만, 연이는 상당히 잘 참아 내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청령은 검각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청령이 일각도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자 연이가 살짝 입을 내밀고 투정을 부렸다.
“오빠, 다리가 너무 아파. 좀만 더 쉬었다 가자.”
“연아!”
그런 연이의 행동에 그만 검하은이 크게 꾸짖으려던 중 청령이 연이에게 다가가 등을 내밀었다.
“자, 어서 업혀. 내가 너무 강행군을 했나 보다.”
“헤헤헤.”
금세 기분이 좋아진 연이가 청령의 등에 업혔다. 겉보기엔 왜소해 보였던 청령의 등이 의외로 상당히 넓고 편했기에 연이는 곧바로 잠들어 버렸다.
연이의 코고는 소리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던 검하은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미안해요. 연이가 원래 이런 아이가 아닌데.”
“후후, 여기까지 군말 없이 따라온 것도 응당 칭찬해야 할 일입니다.”
검하은은 슬쩍 하늘을 쳐다보았다. 며칠째 내리는 폭우에 땅이 질퍽해졌기 때문에 걸을 때마다 발자국이 남았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고개를 아래로 내리고 청령의 발자국을 봤을 때는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바, 발자국이 하나도 남지 않았어.’
물론 무인들에게 이런 흙바닥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녀도 충분히 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진정 놀라게 한 것은, 연이를 업은 이후에도 지금까지 쭉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음?”
그때였다. 청령이 눈을 반짝이며 귀를 쫑긋거렸다.
검하은이 그런 청령의 행동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시죠?”
“앞쪽에서 병장기 소리가 들립니다.”
“예?”
검하은이 깜짝 놀라서 공력을 끌어올렸다. 오감을 극대화했지만 그녀는 병장기 소리의 ‘병’자도 들을 수 없었다.
‘대, 대체 어디서 들린다는 거지?’
“빨리 갑시다. 사람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것을 보니 무슨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다음 순간 청령이 한 발자국을 내디뎠을 때, 그의 신형은 어느새 저 멀리 가 있었다. 검하은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그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 * *

섬서에 위치한 석가장은 예로부터 상계를 이용해 그 세를 불려 나갔다.
그들의 힘이 날로 강해져서, 상단을 세운 지 고작 삼십 년 만에 천하이십대상단의 반열에 들 수 있었다.
보통 산적들은 석가장의 깃발만 봐도 벌벌 떨건만, 석가장의 소가주인 석윤서 앞에는 지금 도합 이백여 명으로 보이는 산적 떼가 늘어서 있었다.
석윤서가 앞으로 나서며 호기롭게 외쳤다.
“너희는 이 깃발이 보이지도 않더냐! 썩 물러나지 않을까!”
석윤서가 이렇게 당당한 이유는 당연히 무사들에게 있었다. 무사들의 숫자가 팔십 명을 넘는다. 석가장의 무공은 과거 오십 년 전에 천하백대무공의 반열에 오른 적이 있을 정도로 상승절기였다.
석가장의 무공을 익힌 무사 열 명만 있어도 산적 백 명 정도 때려잡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물며 팔십 명이나 되는 무사들이 있으니 고작 이백여의 산적에게는 코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얼굴이 털로 뒤덮인 중년의 사내가 거대한 도를 휘두르며 산적들의 앞으로 나섰다.
“어린놈이 감히 겁도 없이 어디서 떠드는 것이냐? 너희는 이 앞으로 지나갈 수 없다.”
“흥! 지나갈 수 없다니! 감히 힘없는 농민들을 꼬드겨 산적이나 만들어 놓은 주제에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석윤서도 이제 약관에 불과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상승절기를 익힌 자였다. 어렸을 때부터 훌륭한 사부와 영약을 바탕으로 웬만한 무인들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멍청한 놈! 너희는 이 앞이 어디인 줄이나 알고 있느냐!”
“내가 그것도 모를까 봐? 용아천이 아니더냐!”
“흐흐, 용아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겠다는 것이냐! 얼마간 내린 폭우로 인해 지금 용아천이 어떤 상황인 줄이나 알고 있느냐!”
용아천은 폭우 때문에 물이 불어나 쉽게 건널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석윤서가 이 길을 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너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썩 꺼져라!”
석윤서의 허리춤에서 번쩍 하는 도가 뽑혀 나오자 산적 대장이 주춤하고 뒤로 물러섰다.
“이놈이! 천하이십대상단에 들어간다는 석가장이라기에 제법 머리가 잘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이리도 멍청한 놈인 줄은 상상도 못했구나. 오늘은 친히 너희를 상대하기 위해 손님들이 와 계시다!”
그의 말과 함께 밑동이 어른 허리만 한 나무 위에서 두 개의 신형이 밑으로 떨어졌다. 그들을 바라본 석윤서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허헉! 흑백쌍마(黑白雙魔)! 설마 네놈들, 녹림채였단 말이냐? 이럴 수가!”
저들이 처음부터 상단에 시비를 걸어 왔다는 것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음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만큼 흑백쌍마의 무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항상 둘이 짝을 지어 다니는 흑백쌍마는 이미 나이 팔십을 넘긴 노괴였다. 장법을 얼마나 귀신같이 쓰는지 녹림채에서는 십대고수에 들 정도였다.
“껄껄껄. 이런 촌구석에도 우리의 별호를 들어 본 놈이 있구나. 안 그렇습니까, 형님!”
“그렇구나, 아우야. 헐헐, 오늘은 기분이 매우 좋구나.”
석윤서는 도를 든 손을 살짝 내려놓았다. 현재 산적들과 무사들이 싸우게 되면 양패구상이다. 지금의 그에게는 싸움을 피하고 상단의 물건을 하루빨리 가져다주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석윤서가 그들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안녕하십니까? 무림의 말학 석윤서라 합니다.”
“껄껄, 네가 석가장의 첫 번째 아들이로구나. 얘기는 많이 들어 봤다. 도법으로 쾌검술을 구사한다지?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구나.”
석윤서가 노괴를 힘껏 째려보다 눈을 풀었다. 그러고선 그의 품속에서 금전이 든 주머니를 꺼내 그들에게 던졌다.
“그건 제 작은 성의입니다. 부디 그걸로 노여움을 푸십시오.”
두 노인 중 왼쪽에 있는 자가 주머니를 낚아챘다. 그 수법이 얼마나 빠른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절정에 오른 금나수법이다! 최소 대성한 것이 틀림이 없다.’
만약 금나수법으로 암기를 던졌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간담이 서늘해지는 석윤서였다.
노인이 주머니를 열어 보더니 살짝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의 노여움을 풀기에는 조금 적은 것 같구나. 안 그렇습니까, 형님?”
오른쪽에 있던 노인도 주머니를 보더니 실망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그런 것 같구나. 아무래도 노여움을 풀지 못하겠다. 내 너희를 죽이고 그 물건을 가져가야겠다.”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또다시 품속을 들어갔다 나온 석윤서의 손에는 이번에도 작은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그의 손이 허공으로 던져진 순간 노인의 손이 다시 주머니를 붙잡았다.
흑백쌍마가 주머니를 확인한 순간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과연 석가장의 재력은 만만치 않구나. 하나, 이런 금액을 서슴없이 내놓는 걸 보니 네가 갖고 가는 물건의 금액이 얼마나 할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구나!”
석윤서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받을 건 다 받고 결국에는 공격을 감행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흑백쌍마 어르신들, 조심하십시오. 저 또한 요물들에게 상단의 물건을 넘길 수는 없습니다.”
파밧―!
그가 귀신같이 도를 뽑아 들고, 번개 같은 속도로 노인의 머리 위에서부터 쪼갤 듯한 기운으로 내리쳤다. 그의 보법이 얼마나 빨랐는지 노인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후웅!
도가 허공을 갈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 있었던 그들의 신형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실로 대단한 신법이구나! 어쩔 수 없다. 혼자서는 어떻게 상대할 실력이 아니다.’
석윤서가 무사들을 보더니 손가락으로 산적들을 가리켰다. 곧 석윤서를 지키는 수신호위 세 명이 그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이들은 석가장에서도 이십 대에 드는 고수들이었다.
“석가장 무사들은 당장 정도를 어지럽히는 산적들에게 매운 맛을 보여 주거라!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 석가장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음을 새겨 주어라!”
그의 외침에 무사들이 각자의 병장기를 들고 산적들을 향해 달려갔다. 산적들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활시위를 무사들에게 겨눴다.
“쏴라!”
휙휙―!
이백여 개나 되는 화살이 쉴 새 없이 날아왔다. 무공수위가 낮은 자들이 화살에 맞아 속절없이 쓰러졌다. 바닥에 점점 시체들이 쌓이자 무사들은 동료의 시체를 방패막이 삼아 앞으로 진군해 나갔다.
“죽어라! 이놈들!”
하나 둘씩 접근해 오는 무사들이 생기자 산적들은 활을 버리고 각자 자신 있는 병장기를 꺼냈다. 그리고 하나 둘 무사들과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챙―챙! 채앵!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산적들과 검을 섞어 본 무사들의 눈에 경이가 어렸다.
‘이놈들! 결코 그냥 산적들이 아니로구나. 녹림채라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거늘. 최소 삼류무사 정도의 무공은 익혔다.’
산적들의 검에서 깔끔한 삼재검법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것은 누군가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산적들의 숫자가 워낙 많기 때문에 무사들은 그 삼재검법을 막는 데만도 급급했다.
한편 석윤서는 흑백쌍마의 무위에 대경실색할 정도였다. 게다가 환경마저 불편해, 산에서는 최고라는 흑백쌍마는 마치 아직도 내리는 대폭우조차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바닥을 훑고 다녔다.
실로 지고한 경지에 오른 경공술이었다.
“분광검법(分光劍法)!”
이번에는 흑백쌍마가 동시에 놀랐다. 석윤서와 그의 수신호위가 펼치는 것은 점창파의 분광검법이 틀림이 없었다.
다만, 그 분광검법이 분광도법이 되어 도로 펼쳐지고 있었다. 석가장 쪽에서 자신들에게 맞게 개량한 것이 분명했다.
“흐음? 그러고 보니 석가장의 초대 가주가 점창파의 방계제자로구나.”
“멍청한 노인네! 한눈팔고 있을 시간이 없다!”
분광도법의 절기들이 석윤서의 도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분광도법은 과연 쾌도술이 분명해 보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빠르기로 노인의 몸을 베어 내고 있었다.
그때, 노인이 이채를 발산하며 그 도를 간단히 피해 냈다. 순간 허공을 가른 가공할 위력의 도를 수신호위 하나가 대신 얻어맞았다.
“커헉!”
방심하다 가슴이 꿰뚫린 수신호위는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다. 순간 눈동자가 멍해진 석윤서는 곧바로 도를 빼 들고 노인을 향해 불같이 화를 냈다.
“이놈! 가, 감히! 용서할 수가 없다.”
“어린놈이 어른 공경을 할 줄 모르는구나!”
노인의 장이 석윤서의 가슴을 후려쳤다.
“크흑!”
제법 공력이 실린 공격이었는지 석윤서가 뒤로 주춤거리며 열 보나 물러났다. 그의 입가에는 선혈이 흘러내렸다.
석윤서가 주위를 둘러보자 이미 그의 수신호위는 피떡이 되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나마 다른 곳의 상황은 조금 나았다. 무사들은 가까스로 산적들을 전멸시켰다. 하지만 그들 중 멀쩡히 두 다리로 땅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석윤서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흘흘흘, 어린놈이 까분 대가는 확실히 치러야겠구나. 너희 사지를 잘라 한낱 미물의 먹이로 줘야겠다!”
“쿨럭, 네, 네 이놈! 내 죽는다 해도 원귀가 되어 너를 용서치 않으리라!”
“껄껄껄, 그런 놈들이 한둘이었는 줄 아느냐? 잔말 말고 어린놈은 죽어라!”
그의 손바닥이 무서운 기세로 석윤서의 복부를 향해 쇄도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