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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쾌 1권(25화)
7장 인연의 끝(2)


잡아 온 연천평의 두 손이 너무나 따뜻하다. 다시 손을 들어 머리를 매만져 주는 감촉이 부드럽다. 온몸이 조각나 한 걸음도 할 수 없는 쾌에게 연천평과 악요가 찾아온 것이 두 시진 전이었다.
“고생 많았다. 이 백부는 쾌 네가 참으로 자랑스럽구나.”
연천평을 바라보는 쾌의 눈이 초승달 모양을 그리며 살짝 주름이 간다. 그 눈 그대로 악요를 쳐다보는 쾌.
“아직 멀었어. 시간의 벽, 공간의 벽은 어쩌구?”
역시 악요답다. 하지만 얼굴에 몹시 흥분된 기색이 철철 넘치는 것이 쾌의 놀라운 발전에 잔뜩 고무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그 모습에 쾌가 얼굴을 괴상하게 찌그렸다. 웃고 싶고 말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아 속이 터질 듯 답답하다.
“네가 조금 무리한 것이 사실이구나. 물론 너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만 솔직히……. 지금 네가 살아 있다는 게 더 놀라운 일이다.”
연천평이 쾌를 책망하는 말투로 말했다.
“진신 그놈 때문에 네 녀석이 열받은 건 알지만 그렇다고 무식하게 힘으로 박살내다니. 참…….”
이번엔 악요. 다음 말이 더 가관이다.
“피하고 흘리고 지나가는 것도 아직 미숙한 녀석이 속도의 끝을 먼저 보아 버리다니. 어린이한테 대검을 쥐어 준 꼴인가.”
미숙하다뇨. 저 얼마전에 일부러 벼락까지 맞았는데……. 덕분에 엉덩이 쪽에 구멍이 뚫려 버렸죠. 그 초자연의 기운, 그쪽으로 내뱉어 버렸거든요.
“허허. 악요 이 사람아. 그 정도가 어딘가. 이 아이, 자네나 내가 이십 년 넘게 수련한 결과를 오 년 만에 넘어 버렸다네. 오늘은 그저 칭찬이 필요한 날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크…… 크크……크크큭.”
이제야 약간이나마 솔직해지는 악요를 보며 쾌의 눈이 서서히 감긴다.
‘두 분……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넉 달이 흘렀다.
집안에 여인의 찢어지는 비명이 가득하다.
노산(老産).
아이가 태어날 날이 다가올수록 모든 식구들의 근심도 더해져만 갔었다. 유달리 건강한 남인화였지만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황제의 배려로 황궁 어의까지 수시로 출입하면서 출산에 대비했지만 노산의 위험성은 그런 것들을 충분히 뒤엎고도 남는다.
그리고 지금의 저 비명은 일반적인 산모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고 있다.
대범하기로는 천하제일이라 생각했던 연천평조차 안절부절못하며 저 담 너머 별채 마당을 서성이고 있었고 이쪽의 연소군은 아예 쭈그려 눈물을 펑펑 쏟아낸다. 옆에서 연승이 그녀를 꼭 껴안고 같이 눈물을 흘린다.
“아소, 너는 일루 오고 쾌, 너는 소군 옆에 가서 같이 위로해 주고 있어.”
악요가 차가운 말투로 지시했다. 그 역시 남인화로부터 받은 은혜가 적지 않기에 걱정이 태산일 것이 분명하다. 평상시보다 더 무뚝뚝한 말투와 표정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쾌는 쪼그린 두 사람에게 다가가 조용히 안아 주었다.
연소군과 연승은 쾌에게 와락 안겨 둘 다 서럽게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감정 표현에 어지간히 서툰 쾌였지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고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저 두 사람을 꽉 껴안고 기다리는 것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일 뿐.
비명이 멎었다.
그 순간 쾌의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지 못한다.
주변에 깊은 정적이 찾아왔다. 이 순간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불안감이거나 기쁨이거나…….
순간 별채의 문이 확 열렸다.
주름이 쭈글쭈글하고 허리가 직각으로 굽어진 노파 하나가 문에서 튀어나온다. 연천평의 아버지 때부터 이 장원을 지켜 온 실질적인 이 집안의 최고 권력자(?)라 할 수 있는 시비장 맹파파였다.
집중된 모두의 시선을 싸늘하게 돌아본 맹파파가 말했다.
“새끼 도련님이우. 아씨는 무사하우. 다들 걱정 말구 일들 보시우. 글구 군이랑 승이, 쾌 너희는 언능 가서 씻구, 천평 도련님 따로 보구 자.”
이가 거의 다 빠진 입으로 살짝 미소 지은 채 할 말만 하고 돌아서는 맹파파.
잠시 후 모두들 기쁨의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쾌의 눈이 어떤 기대감으로 빛나고 있다. 사정없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어루만진 채.

* * *

장원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아이가…… 울지 않는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삼 일이 지난 지금까지 그 흔한 칭얼거림도 없다고 한다. 맹파파가 아이를 받을 때 옆에서 거들었던 시비의 말에 따르면 꼭 감겨 있어야 할 아이의 눈이 반쯤 열려 있었다 한다. 그리고…….
초점이 없어야 할 두 눈동자가 분명히 주변을 인식하고 있었고 연천평과 남인화를 직시한 후 한 방울 눈물을 떨어뜨렸다고 했다. 얼굴 가득 슬픔을 담은 채…….
맹파파가 입단속을 시켰으나 소문은 금방 확산되었다. 누구는 아이에게 귀신이 들었다고 했고 누구는 노산이라 태어난 아이가 병을 달고 나왔다고도 했다. 그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은 없었다.
“형님. 안에 계시지요?”
거처에서 책을 읽던 쾌를 밖에서 연승이 찾았다.
“들어와라. 안 그래도 막히는 것이 있어 내가 가 볼까 했었다.”
주렴을 걷고 들어온 연승의 표정은 여전히 영 좋지 못했다. 지금 연승의 저 주름이 이 집안 모두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휴…….”
“백모님은 어떠시냐?”
“저나 누님도 아직까지 어머님을 뵙지는 못했어요. 아버님도 그렇고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네요.”
연승의 한숨에 땅이 내려앉는 착각마저 든다. 그런 연승을 조용히 지켜보던 쾌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백모님께서 불편하셨다면 분명 우리에게 어떤 언질이라도 주셨을 거다. 지금껏 아무 말씀 안 주시는 것을 보아하니 백모님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을 듯하구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머님이 꽤 강골이시거든요. 다만…….”
“동생 때문이겠지. 안다. 그 말도 안 되는 소문.”
“문제는 말이죠. 진짜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단 한 번도.”
심란한 듯 머리를 벅벅 긁어 대는 연승의 마음이 진하게 전해져 왔다.
쾌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승을 등졌다. 그런 쾌의 행동에 연승이 고개를 갸웃한다.
“나는 말이다. 죽은 어머니의 몸에서 꺼내어졌단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배를 갈랐지.”
숨을 몰아쉬는 연승의 놀람이 전해져 왔다.
“약해도 너무 약했어. 아마 지금 저 아이보다 훨씬 말이다. 물려 주는 젖을 빨지 못해 입에 흘려 주었다더구나. 태어난 그 순간부터 죽을 고비를 수십 차례나 넘겼다지.”
“형님…….”
“그래서 결과는 어떠하냐. 죽어 가던 아이는 지금 네 눈앞에 괴물이 되어 서 있다.”
몸을 돌리며 쾌가 진지한 얼굴을 보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연승의 입가에 곧 작은 미소가 걸렸다.
“훗! 그렇군요. 저 아이도 아버지의 자식. 저와 누님, 그리고 형님의 동생이지요. 곧 누구보다 우렁찬 울음을 토해 낼 겁니다.”
쾌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이는 이대로 스러져서는 안 된다. 쾌의 심장을 강하게 자극했던 그 느낌이 말해 주고 있다. 저 아이의 운명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고.
“두 분 다 예 계십니까?”
시비 몽원이 두 사람을 부른다.
“안채에서 찾으십니다.”
쾌와 연승이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연천평이 이들을 찾는다. 분명 아이를…….
몸이 떨려 온다. 끝자락에 이른 겨울 공기 때문은 아니었다. 가슴 아래 깊이 숨겨진 무언가가 쾌의 전신을 두드려 온다.
안채를 구분 지어 주는 통로에 다가갈수록, 처음 세상에 나온 병아리처럼 저도 모르게 몸이 비틀거린다. 동생을 처음 보는 기대감도, 기쁨의 감정도 아니다. 마치 오랜 세월 그리워해 온 짝을 만나러 가는 외길에 선 수줍은 소녀의 설렘이랄까.
쾌는 낮게 쬐이는 태양 빛이 오늘따라 유난히 뜨겁다고 생각했다. 곳곳에 쌓인 눈을 녹이면서 피어오르는 공기의 울렁거림이 눈을 자극해 오고 있다. 저 햇살. 언젠가 본 적이, 아니, 꿈꾸어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언제였더라…….
“얘 너무 얼어 있는 거 아냐?”
“저도 떨려요, 누나.”
“저 큰 놈이 덜덜 떨어 대는 거 좀 웃긴다.”
쾌를 보며 놀려 대는 연소군의 손 역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쾌는 정신없이 쿵딱거리는 가슴에 조심스럽게 손을 대었다. 수백, 수천 발의 화살이 메마른 땅에 꽂히는 것처럼 요란스러운 심장의 외침이 그대로 느껴진다.
안채를 둘러싼 담 입구 너머로 연천평의 모습이 날아가는 눈기운에 흐늘거린다.
쾌의 몸이 담을 지났다. 그리고.
눈앞에서 번개불이 터진 듯 온 세상이 하얗게 밝아 왔다.

예전의 자신보다 훨씬 더 작고 연약해 보이는 아이가 따사로운 햇살 아래 서 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던 아이가 쾌를 향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눈부시게 하얀 이를 드러낸 채 환하게 웃으며 그 작은 두 손을 내밀며 다가온다. 안아 달라는 것일까.
이마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미소만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다가온다.
‘인연의 끝…….’
아이를 향해 쾌도 같이 웃어 주었다.

낮게 깔린 겨울 구름 사이로 해가 그 따스한 손길을 뻗어 땅을 어루만진다. 부드러운 태양의 손길 아래 의자에 앉은 남인화의 모습이 보였다. 그 품에서 하품하고 있는 작은 아기.
남인화 주변으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신기한 눈을 동그랗게 뜬 연소군과 연승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따뜻한 미소를 보이는 연천평이 쾌를 향해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떨린다. 무릎에 힘이 빠지는 것이 꿈속에서 달리지 못해 쓰러지는 느낌과 흡사하다. 그렇게 천천히 쾌는 아기에게 다가갔다.
아기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쾌를 바라본다.
언제까지나 잠들어 있을 것 같았던 아기가 쾌를 향해 입을 옹알거린다.
주변 사람들의 놀람을 뒤로하고 쾌가 아기 앞에 조용히 꿇었다. 아기는 그 작은 눈에 눈물을 담은 채 몸을 둘러싼 천 사이로 손을 뻗어 왔다. 아기를 바라보는 쾌의 한쪽 눈에서 마찬가지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쾌는 떨리는 손을 들어 아기 앞으로 내어 주었다. 그 큰 손을 힘겹게 잡는 아기의 작은 손. 잡고 있는 쾌의 검지를 놓칠세라 꽉 움켜쥐는 아기의 연약한 힘이 가슴을 울렸다.
“나의…… 인연…….”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 쾌를 향해 아기가 웃었다. 흐르는 눈물 속에서 쾌의 미소도 짙어졌다. 잠시 후.
쾌의 손을 놓은 아기의 눈에 초점이 사라지며 다시 눈을 감는다. 그리고……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태어난 지 삼 일만에.
놀라운 기사에 연소군과 연승이 망연한 표정으로 아기와 쾌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넌…… 대체 어떤 아이니? 쾌…….”
연승은 말없이 멍한 표정으로 쾌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었고 남인화는 잠깐 놀란 듯했지만 곧 우는 아기를 달랜다.
쾌가 연천평을 돌아본다. 잠시 눈웃음을 짓던 연천평의 입이 열렸다.
“이제 내가 가진 인연의 끈을 너에게 주겠다. 끝으로 인도해 주겠느냐?”
결연한 눈빛으로 쾌가 고개를 짧게 끄덕인다.
“지켜다오.”
쾌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연천평이 조용히 부탁했다. 아기를 돌아본 쾌의 얼굴에 평소의 비틀린 웃음이 아닌 어릴 적 늘 보여 주었던 환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나는 인연의 끝이자 또 다른 끝으로 인도할 운명을 가진 자.’
불현듯 아버지가 떠오른다. 아버지가 말했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나를 여기까지 이끈 것일까.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아이의 이름은 비(飛)라 하기로 했다.”
쾌의 고개가 빠르게 들렸다. 놀란 두 눈으로 연천평을 뚫어지게 바라보나 연천평은 더 이상 말없이 허공을 응시하며 눈을 감고 있다. 연소군은 그저 살짝 어깨만 으쓱할 뿐.
“비…… 연비(淵飛)! 좋네요. 제 동생 이름으로 딱 어울립니다.”
연승이 기뻐하며 아기를 쓰다듬는다.
쾌가 연천평을 향해 절하며 작게 흐느꼈다. 그런 쾌의 등을 톡톡 두들겨 주며 눈물짓는 연소군.
“이야아. 우리 비아(飛兒)는 좋겠다. 든든한 형님들에 착한 누님이 있어 앞으로 세상 살 일 걱정 없겠네. 대신 요 며칠 우리 걱정하게 한 거 나중에 열 배로 받아 내고야 말겠다!”
연승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만이 안채에 가득 퍼졌다.

그리고 육 년의 세월이 흘렀다.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