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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쾌 1권(24화)
7장 인연의 끝(1)
퍼엉!
자욱한 흙구름이 주변 삼 장을 허옇게 뒤덮었다. 마치 천둥이 내리치는 듯 고막을 찢는 엄청난 굉음에 주변 건물의 지붕에서 우수수 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잠시 후 서서히 내려 허물어지는 먼지구름 사이로 사람의 그림자가 비친다.
굽힌 왼쪽 다리와 뒤로 한껏 내뻗어 있는 오른쪽 다리, 더 이상 치우칠 수 없을 만큼 앞으로 나아가 있는 상체를 중심으로 일자로 쭈욱 내질러져 있는 오른 주먹 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뚫었다!’
쾌의 얼굴은 희열로 번쩍이고 있었다. 분명히 존재하나 보이지 않던 공기의 벽! 그 마의 영역을 지금 정복했다.
일 년 전, 진신(秦信)의 스쳐 지나간 내기에 호되게 당한 후 악요를 찾아가 내공을 사용하는 무림인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물었다. 그러자 악요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내기? 너 바보냐? 그 까짓것 흘려 버리면 되잖아. 자신 없으면 확 피해 버리던가.”
흘려? 피해? 무슨 수로? 저 무시무시한 내공을?
“나 참…… 그거 뭐 대단한 건 줄 아나 본데 뭐든지 안 맞으면 그만이다.”
응?
“이렇게 생각이 굳어 있어서야. 내기가 실린 주먹이든 발이든 도검이든 몸에 안 닿으면 끝이라고.”
그렇긴 하지만…….
“지금까지 나한테 뭐 배웠냐. 제일 중요한 게 뭐였어? 안 맞고 때리는 거 아녔냐?”
……!
“너 설마 내가 저 패악한 강호 잡배들보다 느려 터졌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물론 아니죠!
“진신 그놈이 그랬다면서? 강호에서 나한테 걸린 놈치고 제대로 돌아다닌 놈 없다고.”
굳이 그 인간이 말 안 했더라도 사부님 딱 보면 그랬을 거 같습니다.
“내 자랑은 아니지만 나 지금도 나가면 내 위로 삼십 명도 안 될걸?”
삼십 명도 많습니다.
“장담하마. 내 전력을 다한 공격을 네가 피할 수만 있다면 저 강호에서 평생 가도 만나기 힘들다는 ‘삼십 명 빼고’ 너 건드릴 녀석 하나도 없을 거다.”
저따위가 가능……하겠습니까?
“속도! 시공을 초월한 속도가 답이다. 이건 피하는 것에만 국한된 부분이 아니야. 그 속도의 한계를 넘어섰을 때!”
꿀꺽!
“너의 숨결 하나하나가 상대에겐 치명적인 칼날이 되어 다가가겠지.”
오늘따라 말씀이 많으시네요. 역시 그 진신이라는 사람 때문이겠죠?
“뭐 아까처럼 어이없게 몸을 대 주는 경우라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그겁니다. 격한 전투의 상황이 아닌, 흔적 없이 다가오는 상대 말입니다.
“몸 밖으로 내보내 버리면 된다.”
……?
“벼락 맞고 살아난 사람 얘기는 들어 봤겠지? 마찬가지야.”
이해하기 너무 어렵습니다.
“밖으로 뱉어 버린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숨 쉬는 것보다 더 자연스럽게 말이지.”
불가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 예전에 네가 말했지 않느냐. 네 아버지는 불가능을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맞습니다. 아버지는…….
“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라. 이게 앞으로 네 수련의 기본이 될 게야. 생각의 힘은 무한하단다.”
생각의 힘. 압니다. 이미 겪어 봤거든요. 위진이라는 사람에게서. 가만, 사부님과 백부님 정도의 고수가 존재를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면 위진, 그 사람 얼마나 엄청난 사람이기에…….
“깨지고 부서지고 뭉개지다 보면 너도 어느 순간 깨닫게 될 것이야. 네 생각이, 네 몸이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흘러가는 길을. 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는 좀 많이 맞자. 수련의 강도를 몇 단계만 올리자꾸나.”
그 후 일 년간 인세의 지옥을 또 겪었다.
악요의 말이 맞았다. 그동안 나름 한계를 정해 버리고 거기에 맞춰 단련하던 자신을 파괴하고 높이, 더 높이 한계를 끌어 올리니 어느 순간 악요가 말한 자연에 가까워지는 반응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 연천평이 충고해 준 것처럼 생각보다 빠른 것이 있다는 그 말. 그것을 이제야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초석을 다지게 된 것이다.
그것은 자연이다.
아무도 걷는다고 생각하고 걷지 않는다.
아무도 숨 쉰다고 생각하고 숨 쉬지 않는다.
아무도 심장아 뛰어라 생각해야 심장이 박동하지는 않는다.
태초에 주어진 자연이었다.
신이 내려 준 자연이었다.
그것을 잊음으로 인간은 좁은 한계 속에 갇혀 버렸다.
자연을 이미 예전에 받아들인 연천평이나 악요는 그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가.
그들조차 죽음을 각오해야 했던 아버지는 또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
그런 아버지와 맞먹는 강자들이 여럿 존재한다는 무인들의 고향, 강호는 도대체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 것인가.
속도의 한계 극복은 자연에 대한 깨달음만으로는 부족했다. 반드시 극한에 이른 육체의 단련이 필요한 것이었다. 결국 악요의 수십 년 수련을 몇 년 만에 따라잡을 정도로 괴물의 신체를 가진 쾌였지만 속도와 저항의 관계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쾌는 자신이 내뻗는 주먹의 속도가 극에 달할수록 점점 주먹이 공기의 저항에 밀려나는 반작용을 경험했다. 그리고 어느 날 완벽히 막혀 버렸다. 공기의 벽, 또는 소리의 벽이라 부르는 허공 속에 숨은 마지막 관문에.
쾌는 선택해야 했다.
연천평은 처음부터 부드러움으로 저항을 받아들였다 했다. 그 저항을 타고 넘어 미지의 세계를 보았다 했다.
악요는 공기의 결을 타고 저항의 중심을 갈라서 넘었다고 했다.
서로 각자의 권을 특정 지은 순간이었다.
쾌에게는 부드러움도, 날카로움도 없다. 있다면 지금까지 친구가 되어 준 바람뿐.
그래서 선택했다. 폭풍이 되어 박살내 버리기로.
수십, 수백, 아니, 수천 번의 도전이 이어졌다. 벽의 저항으로 주먹이 갈라지고 찢어지기를 무한히 반복해야 했다.
이미 인간의 신체라고 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극에 가깝게 단련된 근육과 뼈조차 터지고 부러지기를 수백 번 경험했다.
그러던 어느 날.
쾌의 정신이 아득해지고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 감각조차 없음에도 육체가 저절로 움직였다.
생각을 벗어난 움직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시간에, 결코 이전에 인식해 본 적이 없었던 공간 속에서.
벽이 무너졌다. 바로 지금.
“하……하…… 하핫! 푸핫하하하하하하!”
터져 나오는 눈물의 맛이 달다. 미친 것이 분명하다. 눈물의 짠맛이 달게 느껴지다니.
쾌는 보았다. 아니, 느꼈다. 벽을 허무는 순간 터지는 공기의 파장이 유리 조각처럼 깨어지며 모든 공간으로 날아가 사라질 때 그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을.
뭔가 확실하게 떠올릴 수는 없으나 그 속에서 느껴지는 축하와 환영의 감정. 그리고 아직까지 코끝을 간질이는 은은한 복숭아의 향기. 그냥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잠시 후 쾌는 온몸의 근육이 최소 서른 군데 이상 파열되었고, 뼈는 열 군데 이상 부러졌음을 알았다.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피폐해진 육체가 쓰러진다.
모래 깔린 바닥의 차가움이 그대로 느껴진다.
‘이것으로…… 하나를 얻었다.’
“야!! 너 미쳤니?”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여성의 고함 소리.
세상을 울린 거대한 파괴의 외침에 놀라 연소군과 아소가 달려왔다.
“쾌야! 괜찮아? 아이고 이게 뭔 일이냐!”
울상을 지으며 몸을 만져 오는 아소의 손길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둘 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는 것이 반대쪽 공터에서 격한 대련을 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집 무너지는 줄 알았다. 별채 쪽 지붕까지 흔들거리더라.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야야! 애 떨어질 뻔한 거 알어? 뭐야 이건? 사고 쳐 놓고 엎어져 있네?”
혼인도 안 하고 애도 없는 여자가 말은 잘도 한다. 힘이 완전히 빠져 뭐라 반박하고 싶어도 입술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네 하늘 같으신 백모께서 다행히 지금 출타 중이시라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너 때문에 동생 하나 세상 빛 못 볼 뻔했어, 이것아!”
맞다. 백모가 회임(懷妊)했었지?
다섯 달 전 남인화의 회임 소식에 온 장원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던가.
황제조차 축하한다며 엄청난 선물을 보내왔고 원수와도 같은 안충도 축하 인사를 보내올 정도였으니.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 번째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에 연천평 본인은 물론이고 남인화마저 부끄러워 한동안 식사조차 같이 하지 않았다.
연소군은 손자, 손녀 볼 나이에 이게 무슨 집안 망신이냐며 가출까지 할 기세였고 연승은 그저 좋다고 싱글벙글하기만 했다.
쾌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어떤 묘한 기대감 같은 것에 휩싸였다.
연소군이나 연승처럼 원래부터 있었던 이들을 누나와 동생으로서 맞은 것이 아닌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새롭게 탄생하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흥분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면…… 알 수 없는 운명이거나.
“어즘……두이……애, 거어케…… 브트 드니으…….”
“뭐? 얘 좀 봐. 혀까지 꼬였나 봐. 중독된 거 아냐?”
“쾌야! 나야 나, 아소 형! 이거 몇 개?”
손가락 두 개를 쾌의 눈앞에 펼치며 아소가 황급히 소리친다. 옆에서 연소군이 날카로운 손톱으로 쾌의 살을 콕콕 꼬집기까지 한다.
그 덕분일까 몸의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면서 입술과 혀의 움직임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아…… 요즈음…… 드우리 왜 그러어케 붙……어 다녀……? 사아겨?”
연소군의 주먹이 두 눈 가득히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