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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쾌 1권(23화)
6장 연가(淵家), 그리고 끝없는 수련(3)


“눈도 안 가립니까?”
흔들림을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잘 닦인 길 위를 달리는 마차 안에서 쾌가 물었다.
“그래야 하나?”
“보통 이럴 땐 비밀 유지가 생명이라 하더군요.”
“신비로운 척하실 만큼 뒤가 구린 분은 아니시네.”
쾌의 물음이 우스운지 사내가 킥킥대며 말한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창에 검은 천을 걸쳐 놓은 걸로 봐서는 밖을 못 보게 하려는 게 틀림없다. 아니, 그 반대일 수도.
더 할 말이 없어진 쾌가 침묵하자 사내도 조용히 눈을 감는다. 이런 좁은 공간에서 무방비 상태로 여유를 부리는 것을 보아하니 역시 조금 전에 느낀 위압감만큼 실력도 보통이 아니리라.
“얼마나 남았습니까?”
“거의 다 왔을 걸세.”
마차의 진동이 여전히 적은 것으로 봐서는 외곽으로 빠지지 않은 것이 분명할 터, 그렇다면 개봉부 안쪽이다. 또한, 이 정도의 인물과 고급 마차를 부릴 정도라면 상대는 나름 거물일 것이다. 부유한 상인? 아니면 고관대작?
추리가 길게 이어지기 전에 마차의 진동이 멈췄다.
“내리지. 오는 데 불편은 없었나 모르겠구먼.”
“전장의 군마(軍馬)보다 훌륭했다고 칭찬해 드리죠.”
쾌의 여유에 사내가 또다시 킥킥거린다.

사내의 안내로 들어간 저택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연천평의 장원과 비교했을 때 몇 배는 되는 듯 끝이 보이지도 않는다. 중간 중간 길을 막는 병사들을 보아 이 집의 주인이 조정과 관련 있는 자일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안채를 지키던 호위무장은 쾌를 아는 듯 얼굴에 약간의 경외심마저 품고 있었다. 안채의 규모도 상당해 기다리고 있다던 주인의 방에 이르기까지 한참 걸렸다.
“대인. 찾으시던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연분홍색 장막을 사이에 두고 사내가 기별을 넣는다.
“뫼시게.”
저 목소리는…… 분홍빛 사이로 언뜻 비치는 모습이 눈에 익다.
“들어가게나. 좋은 말씀 나누시게.”
사내가 눈을 찡긋하며 쾌의 등을 탁탁 쳐준다.
장막을 헤치고 들어간 실내에는 그가 있었다.
안충.
우악스러운 쾌의 모습에 차를 따르던 시비가 흠칫한다.
“앉게나. 손님을 세워 두는 것은 주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지.”
쾌가 말없이 고개를 숙인 후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두 눈은 안충의 얼굴을 직시한 채.
“한 잔 올려드려라. 귀하신 분이니.”
안충의 말에 시비가 쾌의 찻잔에 차를 따른다. 그 손이 떨리는 것이 매우 심하여 주전자의 주둥이가 잔에 사정없이 부딪힌다. 흘끗 시비를 돌아보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는 것이 두려움에 잔뜩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허허. 자넬 기다리기 지루하여 잠시 이 아이와 자네 얘기를 좀 했네. 어디까지 했더라…… 옳지. 자네가 맨손으로 도적 두목놈을 열 조각으로 찢어 놓은 부분까지 했었지 아마.”
“정확히는 세 조각입니다. 머리. 오른쪽 상반신……. 나머지는 덤이었습니다.”
표정 없는 얼굴로 한 부분씩 가리키며 말하는 쾌의 모습에 시비가 비명을 흘리며 뒷걸음친다.
“저런…… 오늘 네가 몸상태가 별로인 듯하구나. 들어가 쉬어라. 따로 부를 일 없을게야.”
“……느…… 네…….”
입술이 굳어 말조차 안 나오는 모습으로 시비가 재빨리 사라진다.
침묵과 함께 뜨거운 차의 향기만이 방 안을 맴돈다.
“차에 대해 아는가?”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 지체 높은 관리들의 첫 마디는 항상 이런 것일까. 잠시 연천평과의 첫 만남을 떠올려 본다.
“미천하여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쾌의 대답 역시 그때와 다름이 없다.
“그럴 테지……. 자네와 같은 일반 백성들에게 다례는 뜬구름일 것이야.”
역시 두 사람은 그릇부터 다르다.
“부르신 연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쾌의 말에 안충이 찻잔을 잡은 손을 내려놓는다.
“자네가 비록 손의 위치라 하나 자네와 나 사이엔 바다보다 넓은 신분의 차이가 있다네. 그런 식으로 본관에게 먼저 입을 열다니 예법에 무지한 자로세.”
“궁의 예법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이곳은 궁이 아니라고 대답 드리겠습니다.”
안충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마치 세상에 별 이상한 놈도 있구나 하는 얼굴로 쾌를 빤히 바라보던 안충이 곧 웃음을 터뜨렸다.
“파아핫하하하. 이거 내 자네에게 한 방 먹었구먼. 맞네. 이곳은 궁이 아니지. 내 한 몸 누워 지내는 작은 휴식처일 것이 분명하네. 지금 자네와 나는 그저 주인과 손님의 관계일 뿐. 자자 편하게 차부터 들어 보게나.”
박장대소하며 안충이 쾌에게 차를 권했다.
쾌의 도발에 너무나도 유연하게 대처한다. 여우의 심장을 가진 구렁이. 안충에 대한 쾌의 평가였다.
차를 입에 대는 쾌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던 안충이 물었다.
“요즘 천평이 그 친구 집에서 지낸다고 들었네. 어떤가? 그 집이 작고 초라하여 지내는 데 답답함은 없던가? 내 항상 큰 곳으로 옮기라고 충고하곤 했네만.”
“권해 주신 차 맛이 좋습니다. 첫 느낌은 떫으나 머금고 음미할수록 시원한 향이 머리를 맑게 해 주는 듯합니다.”
안충의 낯빛이 살짝 변했다. 물음에 대한 답을 돌려서 표현함을 알아채지 못했다면 이 정도 머리 싸움을 걸어올 자격조차 없으리라.
“흠…… 곰의 가죽을 덮어쓴 너구리라……. 이번 종군에 참여했던 친구가 그러더군. 헌데 그 친구가 보는 눈이 없었구먼. 내 보기엔 자넨 그냥 사자네. 웅크리고 있는 지혜로운 사자.”
종군? 쾌의 머릿속에 늘 전투에 소극적이고 작전 회의 때마다 사사건건 반대를 표하던 장수 한 명이 떠올랐다. 필시 안충의 사람일 터.
또한 안충의 말속에는 자신의 발이 여기저기 뻗어 있음을 은근히 과시하는 투가 보인다.
“칭찬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이쯤에서 제가 처음 여쭌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본관에게 오겠나?”
제거가 아닌 회유가 목적이었던가? 다리에 들어가 있던 힘이 살짝 풀린다.
“그 말씀에 대한 답은 드렸을 겁니다.”
차에 비유한 답을 말함이다. 이 정도 되는 자가 몰랐을 리가 없다.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함일 터.
“역시 이리 쉽게 자네의 마음을 얻을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네. 본관은 그저 사자에게 날개를 달아 주고 싶을 뿐이라네. 쓰임에 따라 용이 될 수도 있는 사자가 고양이로 전락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본다는 것이 안타깝구먼.”
“걱정해 주시는 점 깊이 감사드리지만 때로는 고양이도 개를 물어 죽이곤 한다지요?”
슬쩍 말투를 낮추며 재차 도발을 해 본다. 하지만 안충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다.
“이만 미천한 백성이 자리를 물러 주십사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으니 더 이상의 만남은 의미가 없다. 안충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럼 소인은 지체 높으신 병부상서 나으리를 뵙고 이만 물러갑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깊게 숙이고 돌아서는 쾌다. 두어 걸음 정도 했을까.
“쾌. 아니, 이제는 비연쾌라고 불러야겠지. 나이는 대략 스물 안팎으로 추정. 출생지 불명.”
쾌의 걸음이 순간 정지했다.
“사문 불명.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듯 전장에 출현. 부장 악요의 소개로 왔다고는 하나 진위가 의심됨.”
책을 읽는 듯 조용한 안충의 목소리만이 실내에 울렸다.
“전장의 도살자, 전귀 등으로 불리며 전투에 임했을 때 그 잔혹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음. 노루보다 빠르고 호랑이보다 강하며 여우보다 잔꾀에 능하다.”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쾌는 안충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종군 후 연천평의 빈객으로 머물며 무예와 학문 단련에 집중하고 있고…… 어디 보자…… 그래 연천평을 백부로 모시고 성을 하사받았다? 허허. 연 자는 알겠네만 비 자는 어디서 왔을꼬?”
“생각보다 훨씬 눈이 많은 분이십니다. 병부상서 나으리는.”
“뭐, 황제 폐하의 총애는 천평이 그 친구만 받는 게 아니라서 말이네.”
황제의 허가를 받은 사조직을 운영하고 있다는 말일까. 쾌는 단지 비열한 소인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평가를 수정했다. 이자, 진실로 무서운 인간이다.
“이상한 건 말이야, 자네란 사람의 과거가 너무 깨끗해. 아니, 깨끗하다 못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단 말이지. 이 대송 하늘 아래 애초에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대리나 서하, 토번. 심지어 거란과 해동, 고려에 이르기까지 자네라는 존재 자체가 무(無)였다고 하면 과장이려나?”
“혹시 모르지요. 진짜로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지도.”
어이없는 쾌의 대답에 안충이 잠시 짧은 웃음을 보였다.
“일단 알아낸 자네에 대한 기록일세. 앞으로 살다 보면 두어 개 정도는 더 알 수 있겠지. 자네가 뒷간 볼일 보러 가는 시간이나 아니면 기루에 가서 누굴 만났는가 하는 것들 말일세.”
“거기에 하나만 더 추가해 주시죠.”
“말해 보게. 심히 궁금하구먼.”
쾌가 안충을 돌아보며 이를 드러내며 사악하게 미소 짓는다.
“‘뒤끝이 장난 아님’ 이라고 말입니다.”

쾌는 안충의 배웅을 사양하고 방을 나와 미로처럼 얽힌 복도를 걸었다. 이 정도라면 길을 잃기 십상이나 예리하게 자신을 건드리는 어떤 느낌을 따라 일단 발을 놀렸다.
양쪽으로 갈라진 복도 우측에서 솜털을 곤두서게 하는 서늘한 기운이 피부를 쑤셔 온다. 역시 그곳에는 자신을 예까지 안내했던 그 사내가 벽을 등지고 기대어 서 있었다.
“어찌 이마에 줄이 새겨진 모양을 보아하니 대인과의 자리가 영 불편했었나 보군.”
첫 만남 때와는 달리 가로 낀 두 팔에 한 자루 검이 검갑째 끼어 있었다. 검을 든 사내는 마차 안에서와는 또 다른 기백을 뽐내고 있다.
“속이 더부룩하여 더 이상 자리를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똥이라도 실컷 싸질러야 이 불편한 속이 풀리겠지요.”
무례한 쾌의 답변에도 사내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열망을 두 눈에 가득 품은 채.
“악요 그 친구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있다지?”
“소문이 빠르군요. 뭐, 지금은 한참 얻어터지고 있긴 합니다.”
“그 친구에게 얻어터질 정도라면 자네 실력도 꽤 알아주겠군. 보통의 상대라면 손도 올리지 않고 떡으로 만들 테니.”
“사부님을 아십니까?”
“악요를? 허, 냉혹한 승부사 ‘흉안(凶眼)의 악요’를 모른다면 강호에서 칼 밥 먹을 자격이 없을 걸세.”
‘흉안? 악 사부와 어울리는 별명이군.’
“그 저주의 시선을 받고 두 발로 걸어 나간 자가 손에 꼽는다네. 그런 사람이야 자네 사부는.”
“제자로서 기분 나쁘진 않군요.”
쾌의 시원한 말에 사내가 껄껄거린다.
“악요의 제자라면 내기(內氣) 따위는 따로 배우거나 하지는 않았을 테고, 그 다부진 몸을 보아하니 역시 끝없는 육체의 수련과 짐승 같은 감각을 익히고 있겠구먼.”
“사부님과 친분이 있으십니까? 어째 하시는 말씀이 그분을 너무 잘 알고 계신 것 같군요.”
“친분?”
사내의 얼굴에 잡힌 미소가 진해졌다. 송곳니를 가감 없이 드러낸 채 비틀린 웃음을 머금고 있으나 물기 어린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그 속에서는 분노의 기운마저 느껴진다.
“아암! 끊어 낼 수 없을 만치 끈끈한 친분이라면 친분이지. 세상이 무너진다 해도……. 결과적으로 그 친구가 강호행을 선택한 것도 나 때문이니.”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악연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음을 쾌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전해 드릴 말씀이라도?”
“그냥 안 상서댁 진 모(秦某)가 안부 전하더라 하게나.”
말을 마친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사라졌다.
사내가 사라진 자리를 노려보던 쾌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다시금 출구를 찾아 떠났다.
다행히 쾌를 알아본 군관 하나를 만나 별 어려움 없이 저택을 나올 수 있었다.
연천평의 장원에서부터 타고 온 말을 따로 챙겼다가 내어 주는 군관을 향해 감사를 표한 후 돌아서는 쾌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몇 걸음이나 갔을까.
“우엑!”
쾌의 입에서 선홍빛 핏덩어리가 토해진다.
“크으…….”
입에 묻은 피를 닦아 내는 쾌의 얼굴이 흥미로 물들었다.
“내공의 힘이라 이건가?”
등을 탁탁 치던 사내의 손길이 떠오른다. 어떤 물리적 힘도 더해지지 않은 평범한 손길. 그 속에 말로만 듣던 무림인의 내기가 담겨 있음이 틀림없다.
“좋겠지……. 다음에 또 봅시다.”
쾌는 저택을 향해 차가운 웃음을 날려 주며 말고삐를 힘차게 잡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