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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쾌 1권(22화)
6장 연가(淵家), 그리고 끝없는 수련(2)
“칭찬에 인색하십니다.”
“뭐하러? 이제 절반 조금 넘었는데.”
악요의 말은 가진 바 힘의 절반으로도 쾌를 수세에 몰리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끝은…….
“사부님의 경지가 그 정도라면 연 백부님은 어느 정도나 됩니까?”
“몰라. 그래서 더 두려운 권이지. 도는 말할 것도 없고.”
그랬었나…… 부드러움 속에 해일을 감추고 있다는 연천평의 권이 보고 싶어진다. 그러나 아직까지 연천평은 한 번도 자신의 무력을 공개한 적이 없었다. 언젠가 물었을 때 그저 쾌를 향해 예의 그 부드러운 웃음만 지었을 뿐.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쾌가 그 상태 그대로 악요에게 말했다.
“사부님.”
“어.”
“예전에 말이죠. 그러니까…… 전에 첫 번째 민란 때…….”
“네 아버지 때 말이냐?”
“…….”
말을 하고 나서 괜히 마음이 심란해진 쾌는 급하게 물을 들이켰다.
“왜 말을 끊누.”
“……그때 힘을 감추고 계셨잖습니까.”
“그랬지.”
“왜죠?”
그 말에 악요가 쾌를 돌아본다.
“처음엔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전투는 병사들의 몫이거든. 연 장군님과 나의 역할은 지휘였고.”
“처음……이요?”
“그래, 처음. 나중에는 목숨을 걸어야 했지. 아니, 필사(必死)라고 생각했었다.”
“사부님이나 백부님 같은 분들이라면 수많은 적들 사이에 홀로 남으시더라도 섬멸할 능력 정도는 충분히 있으실 텐데요.”
악요가 쾌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두 눈에 의문의 빛이 살짝 스쳐 갔으나 곧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랬을지도. 네 아버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아버지요? 제 아버지나 엽사 아저씨들이 거기 계셨지만 다들 조금 더 뛰어난 사냥꾼들일 뿐인데요. 백부님이나 사부님 같이 무술을 익힌 분들은 아니셨습니다.”
픽.
악요가 입가에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쾌 네가 모르고 있었다면 그게 네 아버지의 뜻이기도 하겠구나. 그동안 네 행동과 성격을 보고 그저 네 심성 자체가 나약해서 말하고 싶지 않은 줄로만 알았지.”
“…….”
“들어라. 모든 것을 다 떠나서, 어떠한 가정과 경우의 수가 있다고 치더라도, 설령 그 자리에 신의 대리자이신 교사께서 계셨다고 하더라도.”
꿀꺽.
쾌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왠지 모를 두근거림이 쾌의 심장을 저려 온다.
“말살(抹殺). 그 외에 고를 수 있는 운명같은 건 없었다. 네 아버지 앞에서.”
쾌는 머리가 띵 하는 감각에 잠시 어지러움을 느꼈다.
“뭐, 네가 없었다면이라는 가정이라면 가정이지. 그런 존재였다, 네 아버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는지도…… 그날 아버지의 다른 모습을 겪고 나서 제가 알고 있는 세상이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네가 아는 진실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부정한다면 네 아버지도 부정하는 것이야. 떠올려 보거라. 아버지와 너의 추억들을. 그것도 진실이 아니더냐?”
“그렇군요. 제가 본 아버지는…… 그 모습 그대로 제 아버지십니다. 어떠한 가감도 없는 그 모습 그대로.”
그리움을 담아 말하는 쾌를 잠시 보던 악요가 갑자기 쾌의 머리를 때렸다.
“에라이! 쓸데없이 사람 멋있는 척하게 만들고 있네.”
“크…….”
선선한 가을바람이 쾌의 땀을 닦아 준다. 황금빛의 바람. 쾌에게 가을바람은 늘 어머니 같은 포근함을 전해 주었다.
“사실은…… 그날 이후 아버지가 뭔가 특별한 분이라는 거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어요. 다섯 아저씨들도 말입니다. 그냥 제 가슴이…… 옛 추억들을 버리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겁니다. 즐거움만 있었던 그때를 말이죠.”
악요는 그저 말없이 쾌의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이해한다는 눈으로.
“사부님. 제 아버지에 대해 아시는 거, 저도 들어 볼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 그럴 권리는 없다. 네 아버지가 원한 바가 아니니까. 명백히 알고자 함은 네가 풀어야 할 숙제가 되겠지.”
“그렇습니까…….”
“다만,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선에서만 해 준다면…….”
쾌의 눈이 전에 없이 초롱초롱해졌다.
“내가 강호에서 팔 년을 보냈다는 것. 강호에는 수많은 강자들이 우글거린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정점에 섰던 세 명의 전설이 내려온다는 것. 이 외엔 더해 줄 말이 없다.”
강호무림. 세 명의 절대자. 그리고 아버지.
“그런데 가끔 말씀하시는 것 중에 신이니 교사니 하시는데 도대체 그분들은 어떤 분들이기에 사부님의 존경을 받으시는지요?”
어느 날 문득 떠올랐었다. 위진이라는 이름이.
“그만 됐고. 일어나! 이번엔 네 녀석 칼솜씨나 좀 보자꾸나.”
엄한 표정으로 재촉하는 악요를 보며 쾌가 즐겁게 웃는다.
“어제와는 또 다를 겁니다. 보여드리죠!”
개봉대로와 연결된 시장길은 언제나 시끌거린다.
중원 전역에서 올라오는 물산들이 고래고래 고함쳐 대는 상인들의 손에 들려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그 시끄러움 속에서 치열한 삶의 기운을 느낀다.
본래 이런 풍경을 그리 내켜하지 않는 쾌였지만 연소군과 연승의 손에 이끌려 몇 번 이곳을 왕래한 지금은 그리 불편하지만은 않다.
“형님, 어때요? 내일부터는 이걸 배우실 겁니다.”
“응. 뭔지 모르지만 네가 골라 준 거라면 그 깊이가 남다르겠지.”
한적한 서점 내에서 연승이 집어든 책을 보며 쾌가 말했다.
“형님 진도가 너무 빨라 가르치는 제가 당황스럽습니다. 이러다 나중에 문(文)으로 이름을 날리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연승의 진심이 섞인 농담에 쾌가 가볍게 웃는다.
무술 수련을 마치면 연승에게서 학문을 배우는 것이 쾌의 하루 일과였다. 지금으로선 딱히 할 일이 없어 편한 마음으로 몸과 마음의 수련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
“형님. 글자와 기본적인 문법만 숙부님께 배웠다 하셨지만 지금 보면 몇 년 동안 학당에서 공부한 학동들보다 형님의 배움이 깊어요. 진짜 따로 공부하신 적은 없으시죠?”
“어릴 때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것 말고는 없어. 뭐…… 글이나 기본적인 입문서, 예의범절 같은 거 가르치실 때는 정말 무섭게 다그치셨지. 사냥도 학문을 알아야 해먹는 거라시면서 말이야.”
쾌의, 아니, 비호의 일이라면 바보로 변할 정도의 아버지였지만 교육자적 입장에서는 누구보다 엄한 호랑이였다. 그때를 생각하는 쾌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날…… 아버지의 죽음을 두 눈에 담은 그날, 불덩이처럼 타오르던 신체의 격한 고통을 느낀 그날 이후 육체의 불가사의한 성장과 더불어 예전에는 떠올릴 수조차 없었던 지혜와 총명의 기운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생각 하나하나, 말 한마디가 하루를 사이에 두고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아소였다. 지켜 줘야 할 부족하고 아둔한 어린 동생에서 어느새 동등한 힘을 가진 동료로, 큰 힘이 되어 주는 사나이로…….
“뭐 아무튼 가르치는 저도 즐겁습니다. 그럼 오늘도 신나는 수업 들어가 볼까요?”
‘……!’
“승아.”
“예?”
“먼저 가거라.”
“형님?”
“나 뒷간에 볼일 좀 보고 따라가마. 어제부터 뱃속이 꾸무리한 게 영 좋지 않네. 오래 걸릴 것 같구나.”
“크…… 형님 같은 사람도 볼일을 보나 봅니다. 그 큰 뱃속에서 다 소화시키고 방귀만 뀌실 줄 알았죠.”
“녀석 농담두…… 아무튼 너무 늦게 되면 오늘 수업 거를 수도 있겠다.”
“만약 거르신다면 대신 내일 엄하게 가르칠 겁니다!”
연승이 서점을 나가고 잠시 후 쾌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린다.
“숨어서 살기(殺氣)를 흘리시는 걸 보니 군자는 아닌 듯합니다.”
그 말에 점원이 놀란 눈을 끔벅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민한 친구로군. 살기가 아니라 그냥 약간의 관심이었네.”
서책 무더기에 가려진 구석의 어둠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힉!”
점원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뒷문으로 빠져나간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이런 경우 대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싸움이 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뉘신지는 모르지만 저에게 관심이 있으시다면 연가장으로 기별이라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 정도로 연 상서댁과는 막역한 사이가 아니라서 말일세.”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적당한 체격에 근육은 별로 없어 보이나 알 수 없는 위압감이 피부를 자극한다.
이자는 강하다. 지금껏 군문에서 보아 온 역전의 무장들과는 다른 전투의 흔적이 느껴진다.
“승부를 보고자 하심입니까?”
사내의 태도에서 거부감을 느낀 쾌가 먼저 물었다.
“오늘은 내가 아니라 다른 분이 자네에게 볼일이 있다네.”
짙은 콧수염에 높은 코, 이마 아래 깊게 빛나는 눈을 가진 사내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잠시 시간 좀 내어 주겠나?”
“용무가 있는 분께서 먼저 찾으시는 것이 예의인 줄 압니다만.”
“객을 청하여 모시는 것도 예의라네.”
말로는 승부가 안 날 듯하다.
“그럼 가 봅시다.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요.”
쾌 자신을 찾는 자가 누군지, 어떤 목적인지 알 바 없지만 만약 불온한 자라면 두 주먹으로 부숴 버리면 그만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