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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쾌 1권(21화)
5장 귀환, 그리고 가족(4)
“인간의 힘으로 어찌 그런 일이 가능했겠느냐. 단지 옛 사람들이 전하는 허황된 전설일 터. 여기 있는 두 자루 이외에는 애초에 존재치 않았을 것이니라.”
연천평이 일어난다. 그리고 여전히 꿇은 채 입술을 달싹거리는 쾌를 바라본다.
“연가도(淵家刀)의 후반 도식이 양손에 각기 다른 도를 들어 사용함도 이와 무관치 않구나. 대성했을 때에야 저 두 녀석을 부를 자격이 있다 하셨으니……. 허나 시조 이후 어느 누구도 월망과 초우를 세상에 내어놓지 못하셨다.”
쾌의 눈이 연천평을 향했다. 두 눈에 어떤 열망을 가득 담은 채.
“언젠가 그러셨지요. 연가권은 연가도를 익히기 위한 과정일 뿐이라고요. 연가의 진정한 무력은 연가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 주셨습니다.”
“옳다.”
“지금은 연가권의 정신을 잊어 그 묘리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였고, 연가도는 백부님의 반의 반의 반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지만…… 반드시 보여드리겠습니다. 저 오만한 두 괴물에게 세상빛을 보여 주는 순간을요.”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볼살이 푸들푸들 떨릴 정도로 강한 의지를 보이는 쾌를 보며 연천평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해 오는 얘기에 따르면 월망과 초우는 연가의 피를 품은 자만이 잠을 깨울 수 있다 하였다. 하지만…… 너라면 저 두 녀석의 오랜 반항을 끊어 낼 것 같구나.”
‘연가의 피!’
가슴이 뜨거워진다. 자신의 일부가, 자신의 피 속에 담겨진 어떤 고대의 부름이 가슴을 데우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한참을 마주 보다 문득 연천평이 입을 열었다.
“쾌야. 너를 이곳에 데리고 온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듣겠습니다.”
“뻔하지! 이제 한 가족이니까!”
난데없이 뾰족한 여성의 목소리가 반사되어 울렸다.
동시에 돌아본 그곳에는 팔장을 낀 채 싱글싱글 웃고 있는 연소군이 있었다.
“너…… 아직까지 깨어 있었느냐?”
“오 년 만에 그리던 아버님이 돌아오셨는데 자식 된 도리로 어찌 쉬이 잠들 수 있었겠습니까?”
짐짓 점잖은 채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연소군을 보며 연천평의 얼굴에 황당함이 번진다.
“거참…….”
한숨 쉬는 연천평을 향해 눈을 찡긋하며 들어오는 연소군이 곧 쾌에게 말했다.
“축하해. 이곳은 나나 승이도 딱 한 번 와 봤던 곳인데 너는 집에 오자마자 바로 구경해 보네? 아버지가 널 꽤나 아끼시는 모양이다.”
거침없는 말투는 여전하지만 아까와 같은 경박함과 거만함이 없다. 역시…….
“분위기가 다릅니다.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쾌의 물음에 잠시 입을 닫고 생각에 잠기던 연소군이 바로 웃는다.
“아까는 보는 눈이 여럿 있었거든. 본의 아니게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미안.”
“그럼, 지금은…….”
보는 눈을 어떻게 따돌렸냐는 물음이다.
“응, 잠든 거 확인하고 왔어. 감시는 하지만 의심하는 단계는 아니니까. 놀라지 마. 아버지도 아시는 일이야.”
평화로워 보이는 장원에 어떤 제 삼의 눈이 있다는 뜻일까. 의문이 일지만 편안해 보이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보니 크게 소란스러운 일은 아닌 듯하다.
“그러니까 너, 왜 여기를 보여 줬는지 알고 싶지?”
“네.”
연소군이 한 차례 연천평을 바라보았다. 연천평이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너를 가문의 일원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시려는 거야. 연 성을 주시려고.”
‘연 성…….’
쾌는 성이 없다. 아버지 비도 마찬가지로 성이 없었다. 이유는 알지 못했으나 지금까지 별 의문 없이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었다.
“어떠냐.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었느니라. 네가 그리하고자 하면 당장이라도 가문의 조상님들께 제를 올리고 싶구나.”
“내려주시는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오나……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고개를 땅에 박으며 완곡한 거절을 표시하는 쾌다.
쾌의 이런 거부를 예상치 못한 듯 연천평과 연소군이 잠시 당황해 한다.
“저는…… 전…… 아버지를 해하고, 아버지가 내려 주신 이름조차 버려야 했던 불효한 자식입니다. 또, 큰 죄를 지은 아버지를 둔 몸으로 이 나라를 수호하는 명문의 성을 감히 추한 이름 앞에 둘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 말씀만은 거두어 주십시오.”
쾌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방울져 떨어진다. 아버지의 죄가 큼에 대한 자괴감에, 자신을 이토록 아껴 주는 연천평에 대한 고마움에, 그 고마움을 받을 수 없는 현실에, 그리고 스스로 약해져만 가는 마음에 북받쳐 수년 동안 보이지 않았던 눈물을 쏟아 내었다.
쾌의 마음을 이해하는 연천평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고 있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연소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쾌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고.
어두운 실내에는 쾌의 흐느낌만이 들리고 있다.
“쾌! 네 아버지 함자가 어떻게 되시지?”
긴 침묵을 던져 버리고 연소군이 물었다.
“비(飛) 자를 쓰셨습니다. 아버지나 저나 성은 없지요.”
간신히 울음을 삼킨 쾌가 조용히 말했다.
“음…… 뭐 저간의 사정은 모르겠지만 일단 쾌 네 말은 한마디로 연 성이 부담되서 받지 못하겠다는 거잖아?”
“…….”
“그럼 이렇게 해!”
쾌와 연천평이 연소군을 돌아본다.
“일단 연 자는 받어. 이건 네가 싫어도 어쩔 수 없어. 하늘 같으신 백부와 백모, 누님과 착한 동생의 뜻이니까.”
“그건…… 제가 드리는 말씀은…….”
“아! 일단 들어!”
“네…….”
천적은 아소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연소군 앞에서 이유 없이 순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비연(飛淵).”
“……?”
“비연으로 하라고!”
‘비연…… 비연쾌…….’
“네 아버지의 비 자에 연가의 연 자. 이렇게 하면 더 이상 불만은 없지? 마음속에 네 아버지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몰라. 하지만 네가 영원히 아버지를 잊으려 하는 것이 아니면 남겨. 늘 네 옆에 모시고 있으라구. 뭐, 거기에 우리 가문도 좀 끼워 주고. 어때? 맘에 들어?”
쾌가 연천평을 바라봤다. 그 역시 살짝 물기가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쾌의 눈이 빛난다. 다물어진 입가에 떨리는 미소가 맺힌다.
‘아버지, 어머니. 이제는 늘 저와 같이 계시겠네요.’
비연의 연은 어머니의 성이기도 하기에.
“백부님! 소질 비연쾌의 절을 받으십시오.”
쾌가 벌떡 일어나 큰소리로 외친다. 엎드린 쾌의 등을 따뜻하게 안아 주는 연천평의 손도 떨리고 있음을 느낀다.
“내가 생각해도 괜찮네. 비연쾌! 참 멋들어진 이름 아냐? 야! 나한테는 뭐 없냐?”
연소군의 깔깔대는 소리가 실내에 가득 퍼진다.
6장 연가(淵家), 그리고 끝없는 수련(1)
떨어진다.
여름 내내 더운 땀을 날려 주었던 그늘의 주인이 눈앞에 하늘거린다.
흙으로 돌아갔다 다시 피어나게 되면 그때 만나자고 인사하는 걸까.
말라 버린 낙엽이 갈라지며 은빛의 뱀이 쾌를 베어 왔다. 왼쪽 아래로 살짝 몸을 구부린 후 오른발은 뱀을 휘두른 자의 내딛는 발을 밖에서 걸고 어깨로 밀어 버렸다.
“어이쿠!”
비명은 남자의 것과 같으나 소리는 여자의 것이다.
큰대 자로 넘어져 찡그리고 있는 연소군의 얼굴에 거대한 주먹이 떨어진다.
부웅!
바닥의 흙모래가 격한 바람의 압력에 밀려 얼굴 주변으로 원을 그리며 넓게 퍼져 나간다.
두 치 위에서 멈춘 쾌의 주먹을 노려보며 연소군이 물었다.
“뭐가 문제지?”
“무거워 보여요. 반 호흡 정도.”
간단한 설명이지만 연소군은 쾌의 말을 이해한 표정이다.
쾌가 내미는 손을 잡고 일어나 묻은 모래를 탈탈 털며 연소군이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얘가 무거워서 출수가 반 호흡 늦는다는 거지?”
애도 은사(銀巳)를 툭툭 치고 나서 아픈 허리를 어루만지는 연소군이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쾌가 손을 쫙 폈다.
“이 정도?”
“흠…… 가만, 야! 방금 너 딴생각 했잖아? 근데 그걸 그리 쉽게 피해?”
“‘생각’보다 빠른 것도 있으니까요.”
잠시 쾌를 이상한 눈으로 보던 연소군이 곧 포기한다.
“그냥 말을 말자. 그거 참 이상하네…… 이거 무겁다고 느껴 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체력 단련을 게을리 해서 그럽니다.”
“나 팔 힘 쎄!”
연소군이 항의한다.
“다리는요? 허리는? 또 어깨는요?”
말을 하는 쾌를 보며 연소군이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누구 혼사길 망칠 일 있냐? 그거 다 키우면 남자들이 퍽이나 좋아하겠다. 나 여자거든?”
“그래서 여자랑 도검은 맞지 않는다고들 합니다만.”
“어떤 썩을 놈이 그딴 미친 소리를!”
쾌의 머릿속에 악요가 귀를 후비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 너랑은 격이 안 맞아서 못 놀겠어. 이따 아소 오면 실컷 괴롭혀야겠네.”
아소에게 오늘 저녁밥은 꼭 사 줘야겠다고 생각하는 쾌였다.
지난 두 달간, 종군과 토벌의 논공행상을 위해 연천평은 하루도 빠짐없이 궁에서 격무에 시달려야 했다. 덩달아 바빠진 악요 역시 뒷간 다녀올 시간도 부족할 지경이었지만, 하루에 한 번은 꼭 쾌와 대련하거나 부족한 부분을 지도해 주곤 했다.
오늘도 역시.
악요의 어깨가 가슴을 밀쳐 온다. 쾌가 피하며 무릎을 쳐올리자 악요는 손등으로 공격을 흘려 버린다.
팔꿈치가 얼굴을 향해 바람을 일으키고 손날이 관자놀이를 노린다.
서로의 다리가 끝없이 상대의 안쪽을 점하기 위해 움직였다.
악요가 보여 주는 속도는 그야말로 전광석화. 눈에 의존했다가는 뼈가 남아나지 않음을 쾌는 예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펑!
소가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쾌 뒤편으로 후욱 밀려 나갔다.
십(十)자로 교차된 쾌의 팔 가운데 악요의 주먹이 닿아 있다. 쾌의 거대한 덩치와 강철을 조각해 놓은 것 같은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가벼운 한 수로 보이지만 그 충격이 상당했음을 쾌의 찡그린 콧날이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비연쾌. 사(死).”
악요의 무덤덤한 한마디.
“알지? 바로 다음 공격이 뭐가 들어갈지는.”
알기 때문에 죽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전이었다면.
“그래도 오늘은 어제보다 더 버텼습니다. 어제는 또 그제보다 오래 걸렸죠.”
“그래?”
악요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웃는다. 저럴 때 보면 아소가 늘 말하는 것처럼 변태기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쾌는 살짝 오한이 드는 몸을 빠르게 문질렀다.
악요가 마른 풀을 찾아 털썩 앉는다. 반 시진 동안 쉬자는 의미. 그 모습에 쾌는 재빨리 시원한 물을 대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