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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쾌 1권(20화)
5장 귀환, 그리고 가족(3)
“훅…… 훅…….”
밤공기가 차가움에도 쾌의 몸에선 끝없이 땀이 흘러내린다. 늘 하는 수련이지만 가상의 적, 악요를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쾌의 공격을 번번이 흘리고, 걸며 반격해 오는 다양한 연계기에, 비록 상상의 산물이지만 그것을 막기에 급급하다.
막는 순간 더 이상 연가권이 아니다. 막음은 살기 위한 발버둥일 뿐.
‘실전이…… 더 많은 실전이 필요해. 더 치열하고, 더 처절한 전쟁터가…….’
희미한 달빛에 악귀처럼 일그러진 쾌의 얼굴이 뿌옇게 비친다.
그때.
“잠을 쉽게 이룰 수 없더냐?”
“백부님.”
연천평이 느린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다.
“나도 쉬이 잠들 수 없어 간만에 집안을 좀 둘러보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와 봤더니 역시나구나.”
빙긋 웃으며 다가와 몸을 일으키는 연천평에게 고개를 숙이며 쾌가 말한다.
“먼 길 피곤하실 텐데 어찌…….”
뒷짐을 지고 천천히 별채 주변을 돌아보던 연천평이 입을 열었다.
“전장의 공기에 전염된 자는 일상의 공기에 쉽게 적응하기 힘든 법이란다. 오늘만큼은 함께 종군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뜬눈으로 밤을 보내지 싶구나.”
그 말에 쾌가 슬쩍 별채를 돌아본다. 그런 의미에서 역시 아소는 대단한 사람이다. 하늘 무너지는 줄 모르고 잠들어 있으니. 쾌의 눈치에 연천평도 슬쩍 웃음 짓는다.
“주 대장은 정말 뛰어난 인물이야. 네 생각은 어떠하냐?”
“어릴 적부터 모든 면에서 남다른 재능을 뽐내던 사람이었습니다. 저 따위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천재지요. 장난스럽고 가끔 한심해 보이는 이면에는 세상을 들어 올릴 놀라운 능력이 숨어 있을 겁니다.”
“너를 너무 과소평가하는구나. 너 역시 시대가 낳은 천재임이 분명하거늘…….”
연천평의 칭찬에도 묵묵부답인 쾌다.
“그래, 수련은 진전이 있느냐? 내 보아하니 불만이 얼굴에 가득하더구나.”
“막혀 있습니다. 보여야 할 길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느낌입니다.”
잠시 쾌를 잔잔하게 바라보던 연천평이 물었다.
“네가 보는 나의 권은 어떠하더냐?”
“부드럽습니다. 마치 무희가 하늘하늘 춤추는 것과 같이요.”
“그럼 악 부장은?”
“날카롭습니다. 끝없이 회전하는 수레바퀴에 칼을 달아 놓은 듯.”
“너의 권은?”
“……!”
“차이를 알겠느냐?”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깨달음은 순간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힘과 파괴 본능에 취해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왜 그것을 망각하고 있었을까. 바람은 막히면 돌아갈지언정 결코 그 걸음을 멈추지 않음을…….’
그리고 그 바람이 절대의 힘을 얻었을 때에 이르러서야 막힌 것을 뚫어 버린다는 것을.
연천평이 늘 충고한 말이 옳았다. 조급함이 모든 것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오직 철저한 파괴만을 위해 그 쉼 없어야 할 움직임을 멈추곤 했다. 그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내 하나만 더 알려 주마.”
“경청하겠습니다.”
“네 손에 아끼는 물건이 있다. 허나 네 실수로 그것을 떨어뜨리게 되었다. 너는 어떻게 할 테냐?”
“떨어지기 전에 잡습니다.”
“그 순간 무슨 생각이 들더냐?”
“아무 생각 없스……!”
쾌가 말을 잊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연천평이 조용히 쾌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래…… 그것이 너의 권을 궁극으로 인도해 줄 것이야. 때로는 생각의 속도보다 빠른 것도 있다는 것만 명심하면 된다.”
“감사합니다, 백부님.”
말을 다한 두 사람은 나란히 선 채 한참 동안 달을 바라보고 있다.
이윽고 연천평이 쾌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꼭 너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다.”
연천평을 따라간 곳은 장원 후문에 위치한 작은 별관이었다. 문이 잠겨 있지 않은 것을 보니 별로 중요한 장소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연천평의 표정이 매우 엄숙한 것이 분명 가문의 비지(秘地)라는 생각이 든다.
두근!
문이 열리고 갑갑한 공기의 묵은 냄새를 느끼자 쾌의 심장이 울었다.
예상한 대로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쾌 자신을 부르고 있다.
“이곳은…….”
쾌의 물음을 가볍게 저지한 연천평은 이내 공간 구석 천장에서부터 늘어져 있는 새끼줄을 조심스레 잡아당긴다.
드드드드드…….
아래쪽에서 약간의 진동이 일고 곧 흙먼지가 살짝 오른다.
갑작스런 변화에 엉거주춤 뒷걸음을 치는 쾌를 보며 연천평이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두 눈 가득 의문을 담은 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쾌를 향해 가벼운 웃음을 짓던 연천평은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거적을 치워 보아라.”
“네.”
거적을 걷자 그곳에는 아래로 길게 이어진 계단을 따라 어두컴컴한 공동이 드러났다.
“가자꾸나.”
쾌는 말없이 연천평을 따랐다.
어둡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과 마주했을 때의 불안감? 아니면 기대감일까?
그것조차 아니라면 감정의 밑바닥을 자극하는 미지의 어떤 것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
쾌는 잘게 떨려 오는 몸과 규칙적으로 반응하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연천평의 숨결을 따라 천천히 발을 옮겼다.
깊은 어둠에 눈이 적응했을 때 뒤에서 미약하게 들어오는 빛 사이로 굳게 잠겨 있는 철문을 보았다.
만근의 강철로 막아 놓은 듯 육중함을 자랑하는 철문은 인간의 힘으로는 깨뜨릴 수 없어 보인다.
“한 번 밀어 볼 테냐.”
“밀리기나 하겠습니까.”
쉽게 포기해 버리는 쾌의 대답에 연천평이 껄껄거리다 혀를 찬다.
“사내 녀석이…… 쯧.”
억지스러운 연천평의 반응에 쾌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연천평이 품을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쾌는 억천 번의 호흡이 한꺼번에 정지할 만큼의 충격을 받았다.
연(淵)
저 글자가 새겨진 목걸이를 쾌는 알고 있다. 아니, 지금도 상할세라 몇 겹의 천으로 둘둘 감은 채 목에 걸고 있다.
다르지만 같다.
수십, 수백 번을 보고, 또 보면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느껴 왔던 소중한 유산과 너무나도 똑같다. 삼수변(三水邊) 마지막 획 중간이 끊어져 있는 것까지 동일하다.
순간적으로 숨을 멈춰 버린 쾌를 돌아보며 의아한 눈빛을 보내던 연천평은 곧 철문 중앙에 비어 있는 원형의 틈으로 줄에 걸린 장신구를 끼워 돌렸다.
그그그그그긍!
사방을 울리는 굉음이 고막을 진동시킴과 동시에 영원히 닫혀 있을 것 같았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닿으면서 쾌는 간신히 정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내부의 공간은 좁았다. 그리고……
천장에 작게 뚫린 구멍에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 아래 그것이 있었다.
“가까이 오너라.”
연천평의 말에 쾌는 홀린 사람처럼 무거운 걸음을 천천히 디뎠다.
사람의 형상을 한 갑주가 달빛을 반사하고 있다.
중원의 그것이 아닌 듯 처음 보는 형태의 찰갑(札甲).
쇄골 부위부터 완만하고 넓게 퍼지며 올라오다 끝이 아래로 살짝 휘어진 목가리개.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게 솟은 간주(幹柱)와 양옆에 독수리 날개 문양의 철편을 달아 놓은 투구.
비어 있는 안면부의 어둠과 그 속에 존재하는 침묵이 쾌의 가슴을 떨리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일어나 호통을 칠 것 같이 생생한 갑주의 뒤편에 사선으로 교차된 두 개의 거대한 도(刀)!
‘너희가 나를…….’
멍한 표정으로 다가온 쾌가 옆에 서자 연천평은 곧 갑주를 향해 크고 길게 절을 올렸다.
한참을 숙인 채 미동없던 연천평이 쾌에게 말했다.
“너도 올려라.”
털썩!
힘없이 무릎 굽힌 쾌가 쓰러지듯 몸을 조아린다.
잠시 후 쾌가 고개를 들었을 때 연천평은 눈을 감은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무엇이 보이느냐?”
“그리움, 회한……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무(武)…….”
혼자 중얼거리는 쾌를 조용히 바라보는 연천평.
“우리 가문의 시조께서 남기신 것들이니라. 고대의 유물이지.”
“…….”
“네가 방금 보고 짐작했다시피 우리 가문의 뿌리는 애초에 중원에 있지 아니하다.”
쾌는 여전히 말이 없다.
“시조의 함자는 연남생(淵男生). 멸망한 동쪽 구려국(句麗國)의 후손이셨지.”
들어 본 적이 없는 나라다. 아득한 고대에 사라져 버렸을까?
“지금 그 자리엔 발해라는 나라가 세워져 옛 영광을 기억하고 있다 한다.”
“그렇군요.”
쾌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떤 거대한 기운에 휩싸인 듯 나오는 말에 힘이 없다.
“시조께서는 그 나라의 기둥이 되어 만년 영화를 이끌어야 할 분이셨지만 결국 조국을 멸망케 하셨다. 그리고 그 매국의 대가로 이곳, 중원의 나라에서 부귀를 누리셨지.”
그렇게 여기기에는 갑주에서 느껴지는 한(恨)이 너무 강렬하다.
“후에 역모에 연루되어 일족 대부분이 죽음을 맞았지만 역모 이전에 성(性)을 바꾸고 살아남은 후손들이 있어 다시 가문을 일으키셨다. 중원의 무장 가문으로.”
잠시 숨을 돌린 연천평이 계속 말을 이었다.
“긴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연씨는 망국의 후손도, 역적의 자손도 아닌 당당한 중원의 명문가로서 그 역할을 해 왔단다. 오늘날 이 유물들은 그저 조상들의 기억을 간직하기 위한 마지막 유산일 뿐이지. 하지만 정말 그것이 다일까?”
마지막 말은 쾌에게 물은 것이 아닌 듯했다.
“이 기관과 유물들은 고조부께서 낙양에 있던 옛 가문의 금지에서 그대로 옮겨 온 것이라는구나. 굴러다니던 돌덩이 하나까지도.”
“백부님.”
“말해라.”
“중원땅에 연 성을 가진 가문이 또 있습니까?”
“내 알기론 존재치 않는다. 다만, 시조께서 두신 형제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그 최후와 후손들에 대해서 나로서는 알지 못하는구나.”
“…….”
더 이상의 물음도, 대답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쾌의 시선이 닿은 곳을 의식한 연천평이 말했다.
“왼쪽 긴 놈은 월망(月닌)이라고 한다. 오른쪽 큰 놈은 초우(超牛)라 부르고.”
‘월망…… 초우…….’
“본래 시조의 부친께서는 한번에 다섯 자루의 도를 자유로이 다루시던 절대궁극의 무인이셨다고 전해지는구나. 후에 형제와 아들들에게 각기 이름을 붙인 도를 나누어 주시고 가셨다고 한다. 그중 두 자루가 여기에 있다. 나머지의 행방은 알지 못한다.”
‘월망…… 초우…….’
쾌는 연천평의 말을 흘려들으며 자신을 부른 두 녀석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되뇔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