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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쾌 1권(19화)
5장 귀환, 그리고 가족(2)


해가 서서히 녹색의 지붕 너머로 내려갈 무렵. 저 계단 끝에서 연천평이 보이기 시작했다.
쾌의 생각에 연천평의 표정이 썩 밝지는 않아 보였다. 분명 황제와 독대한다 들었다. 혹, 안충이라는 작자가 들어갔던 것 때문일까?
연천평이 쾌를 발견하고 예의 그 따듯한 웃음을 지었다. 방금 보여 준 모습은 그저 쾌의 기우였을까. 오랜 전투와 긴 행군이 젊지 않은 나이의 연천평에게 꽤 많은 피로를 안겨 주었음이 틀림없다.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연천평을 향해 쾌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소로를 따라 이동한 지 한참. 길은 곧 조금 더 넓은 길로 이어졌고 그 길을 따라 양쪽으로 개간된 농지와 울타리, 작은 초옥들이 스쳐 지나갔다.
“조금만 더 가자꾸나. 힘들다고 투정 부리지 말고.”
연천평의 음성이 잘게 떨린다.
무려 오 년만의 귀향이니 그 설렘이 어떠할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자네들이 나 때문에 고생이 많구먼.”
호위하는 다섯 금위에게 연천평이 말을 건네자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손사래를 친다.
“그럴 리가요. 예부상서 어르신을 예까지 모실 수 있어 영광일 따름입니다.”
그들의 눈에 뚝뚝 흐르는 존경심을 보아 진심을 다한 대답이다.
모두들 허례를 싫어하는 연천평의 성품 때문에 그 흔한 광대들의 시끄러움도, 나팔(喇叭)의 개선 행진도 없이 조용한 귀향을 즐기고 있었다.
“주은소 대장, 자네가 먼저 가서 내 곧 도착함을 알려 주겠나?”
“명을 받듭니다!”
힘찬 대답과 함께 아소가 말을 달렸다.
“쾌. 이 백부가 머무는 곳 주변의 풍광이 어떠하냐?”
“조용해서 좋습니다.”
쾌의 짧은 대답을 들은 연천평이 웃음을 터뜨린다.
“핫하하! 그래. 딱 너다운 답변이로구나. 허나, 앞으로 네가 집에서 편하게 머무르고자 한다면 그 무뚝뚝한 성격부터 고쳐야 할 것이야. 네 백모를 빼고는 다들 성격이 보통이 아니니.”
그 말을 듣고 쾌가 슬며시 악요를 돌아봤다. 벌써부터 입을 까닥까닥하면서 얼굴 근육을 풀어 주는 악요의 모습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 어른의 무사 귀환을 감축드리옵니다!”
큰소리로 외치며 고개를 조아리는 삼십여 명의 장정들과 아낙들 앞에 단아한 귀부인이 서 있었다.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떨리는 눈에 물기가 잔잔히 보이는 미인형의 중년 부인. 연천평의 내자이자 쾌의 의백모 남인화(南人花)임에 틀림없다.
그 옆으로 연천평을 닮은 작은 눈에, 입가에 점 하나가 콕 박혀 있는 아리따운 여성은 장녀 연소군(淵昭君)일 것이고 그보다 어려 보이는 순한 얼굴의 청년은 장자 연승(淵勝)일 터.
“돌아왔소. 그동안 집안과 아이들, 다른 식솔들 돌보느라 고생이 많았구려.”
“여전히 재미없는 분이십니다, 당신은. 오 년 만에 뵈었는데 겨우 하시는 말씀이 ‘고생이 많았구려’라니요. 이럴 땐 꼭 안아 주셔야죠.”
의외로 화끈한 백모라고 쾌는 생각했다.
“크흠. 험…… 음……. 아, 군아, 승아…… 그동안 이 애비가 하라는 공부는 열심히 하였느냐? 혹 내 옆에 없다 하여 소홀히 하지는 않았고?”
역시나 멋없는 연천평의 말에 연소군은 한숨을 푹 쉬었고 연승은 말없이 연천평의 품에 안긴다.
‘가족…….’
쾌의 눈에 연승이 어릴 때의 자신으로, 연천평은 예전의 인자했던 아버지의 모습으로 비추어 보인다.
“자, 자, 다들 들어갑시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창고를 크게 풀어 장원의 온 식솔들과 이웃들이 거하게 잔치 한 번 열어 봅시다.”
무안했는지 급히 사람들을 장원 안으로 모는 연천평의 모습이 새롭게 느껴진다.

“소개하리다. 내 이번 종군에서 얻은 천금 같은 아이라오.”
연못을 끼고 있는 안채 한 곳에서 연천평의 말이 들린다.
상석에 앉아 있는 연천평과 남인화를 향해 큰절을 올리며 쾌가 말했다.
“쾌라 합니다. 연 부인마님.”
고개를 숙인 채 말하는 쾌를 바라보며 남인화가 작게 웃음 짓는다.
“그래. 내 이 사람을 통해 너의 얘기는 많이 들었다. 착한 아이라지?”
착한 아이…… 그랬었지…… 예전에는.
“과분한 말씀입니다. 연 어르신의 보살핌 덕분에 가련한 목숨을 구원받은 미천한 자에 불과합니다.”
“이이가 거두었다면 심성이 나쁜 아이는 아닐 거라 생각이 드는구나. 듣자니 이이가 너의 아버지를 의동생으로 삼았다니 너에겐 우리가 백부요 백모이다. 어르신, 부인, 이런 호칭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니 그냥 백부, 백모라고 부르도록 하여라.”
따뜻하게 맞아 주는 마음씨에 가슴이 찡하다. 쾌는 말없이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렸다.
“이쪽은 큰 여식 소군, 여기는 아들 승이라 한다.”
남인화의 자식 소개에 쾌는 그들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쾌입니다.”
짧은 인사에 연소군은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흥미를 가득 담은 눈으로 쳐다만 보고 있었고 연승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님의 서신으로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저보다 한 살 많으시니 형님이라고 불러 드려야겠군요. 이야, 덩치 좋으시네요. 아무튼 이렇게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반갑게 맞아 주는 연승을 보고 쾌도 어색하지만 눈가에 웃음을 지어 줬다.
“난 연소군. 너보다 여섯 살 위다. 누님이라 불러.”
생각보다 조신하지는 않은 듯하다.

늦은 시간이라 자리를 물리고 내일을 기약하며 안채를 나온 쾌의 뒤로 연소군 남매가 따라왔다.
“야! 너 맞지?”
“네?”
“쾌! 그 쾌가 맞냐고.”
“무슨…… 말씀이신지.”
뜬금없이 불러다 놓고 이상한 말을 하는 연소군을 황당하게 바라보는 쾌다.
“전장의 도살자, 인간 백정, 혈사자(血獅子), 피를 부르는 전귀. 이거 다 너를 부르는 말이람서?”
“아, 누나! 그만하세요. 형님 피곤하신데…….”
“사실 아냐?”
연승의 만류에도 눈을 똑바로 뜨고 쾌를 바라보며 대답을 구한다.
그 모습에 쾌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그게 중요합니까?”
그때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쾌를 바라본다.
“그래. 그 정도는 되야 내 동생으로 인정할 만하지. 됐어. 그럼 오늘은 그만 가 봐. 내일 보자.”
혼자 정신없이 북 치고, 장구 치는 모습에 얼떨떨하다.
“야야, 쾌! 여기 있었냐?”
아직 정신을 못 차린 쾌는 느닷없는 아소의 부름에 이제는 골까지 아파 온다.
“악 사부가 오늘은 너랑 자라고 하시네. 가자. 나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해서리.”
평복을 입고 터덜터덜 다가오는 아소를 보니 남의 집에 와서 참 넉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얜 또 뭐야?”
“응?”
쾌의 큰 덩치에 가려 안 보이던 연소군이 고개를 내밀어 목소리의 주인을 찾음과 동시에 놀란 아소가 주춤거리며 신음을 낸다.
“아까 아버님 곧 오신다고 기별 주시던 군관님이세요 누나. 말씀 좀…… 제발.”
“흠…… 미끌미끌하게 생겨 가지고 목소리도 느끼한 게 쌈 나면 딱! 쥐구멍 찾게 생겼네. 넌 몇 살이니? 이름은? 곱상하게 생긴 놈 치고 키는 크네. 그래 봐야 얘 앞에선 뭣도 안 되지만.”
“아하! 연 장군님 자제분들 되시는군요. 다시 인사 올리겠습니다. 소장! 주은소라고 합니다. 나이는 스물다섯이구요.”
“주은소? 그 나찰마귀 주은소 맞어?”
“엑?!”
“맞네! 그 말 위에 오르기만 하면 나찰의 얼굴을 한 마귀로 변해 적도들 수백 사이를 누비며 대학살을 자행한다는.”
연소군의 말에는 거침이 없다. 전혀 상대의 기분은 배려하지 않는 말투가 거슬리는 듯 아소의 인상이 확 구겨진다.
“내일 떠난다구?”
“아…… 네. 고향에 부모…….”
“그럼, 둘 다 잘 자고. 난 간다.”
자기 할 말만 하고 곧장 돌아서 버리는 연소군을 보며 연승이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둘에게 말했다.
“아, 원래 저렇지는 않은데 오늘 아버님이 돌아오셔서 좀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요. 이해해 주시길.”
말을 마치고 연승이 급히 뒤따라가는 모습을 보며 아소가 중얼거렸다.
“뭐야. 귀하게 자란 아가씨라 버릇이 개차반이구먼. 에이! 똥 밟았다.”
하지만 사라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는 쾌의 눈은 달랐다. 함부로 말하는 중에도 연소군의 눈은 서리 열 겹을 붙여 놓은 듯 차갑기 그지없었다. 무엇을 위해 저런 행동을 했을까?
분명한 사실은 철없는 대갓댁 아가씨의 즉흥적인 행동이 아닌, 지극히 계산적인 움직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호부 밑에 견자, 아니, 견녀 없다고 했던가?
계속 투덜거리는 아소를 돌아본 쾌는 매우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했다.
아소의 입은 비난을 쏟아내고 있지만 그 눈알이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모양새가 꼭 악요 앞에 섰을 때의 그것과 다름이 없다. 저렇게 무의식적인 본능에 충실한 사람도 드물다.
‘새로운 천적의 출현인가…….’
이제는 불쌍하다 못해 밥이라도 평생 사 주고 싶어졌다.
“어? 너, 갑자기 왜 그래? 달밤에 나 껴안고 있는 거 누가 보면 이상한 소문난다?”
그저 조용히 아소를 안아 줄 수밖에 없었다.

피하고 친다.
흘리고 친다.
걸고 친다.
연가권은 이 세 가지 동작을 기본으로 이루어진 지극히 실전적인 무술이다. 무예나 무공이라 일컫지 않음은 군더더기 없는 합리적 기술의 연계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득한 고대 동방에서 전해졌고 그것을 연가에서 이었다는 정도만 들었다.
부웅!
쾌의 주먹이, 팔꿈치가, 손날이 공기를 가르고 지날 때마다 바람이 쓸려 오는 소리가 났다.
세 가지 동작을 체득하는 순간부터는 모든 것이 실전이다. 다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겪는 수련의 고통이 끔찍할 뿐.
쾌는 악요가 장난하듯 뻗어 오는 공격을 약간이나마 피하기까지 다섯 달이 걸렸다. 흘리는 데는 석 달이 걸렸고 걸고 치는 수준까지는 끝내 이르지 못했었다.
그 외의 시간은 끝없는 육체의 단련. 갑자기 쑥쑥 커지는 덩치와 자신도 끝을 알 수 없는 힘이 생겨남에 따라 그에 맞춰 스스로 가혹한 수련을 계속해 왔다.
처음 산을 내려와 도적 토벌에 참여했을 때 적들에게서 수많은 칼질을 당했다. 온몸에 뜨뜨미지근한 자신의 피로 떡칠을 하고 저승사자 옷자락 구경할 때쯤 되어서야 쾌는 보았다.
도의 궤적을, 도끼의 빠진 날을, 철추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그리고 바람이 알려 주는 길을.
정신을 차렸을 때 주변에는 터지고, 찢어지고, 갈라진 열일곱의 시체가 더운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며 피거품을 뿜어내고 있었다.
전장의 도살자라는 별명은 그때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