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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쾌 1권(18화)
5장 귀환, 그리고 가족(1)


“우아! 여기가 사람 사는 데 맞아? 끝이 보이지도 않네 그냥.”
아소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쉴 새 없이 떠들어 댄다.
“으아아. 저거 봐봐. 저기 배 지나간다아.”
아소는 운하를 따라 웬만한 집채보다 더 큰 배가 느릿하게 지나가는 것을 보며 호들갑까지 떨었다. 그 모습을 약간은 한심한 듯 쳐다보며 쾌가 한숨을 쉰다. 말고삐를 살짝 당겨 은근슬쩍 아소의 뒤편으로 한참을 처지는 모양이 일행이 아닌 척하려는 것 같다.
“봤냐? 저기, 저 배 위에 나긋나긋한 소저들! 지금 나 쳐다보는 거 맞지?”
이대로 두었다가는 손까지 흔들어 줄 추세다.
“체통을 지켜라.”
악요가 이를 빠득 갈면서 입술만 살짝 움직이며 경고하자 그때야 주눅 드는 아소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분위기에 이제야 주변을 천천히 감상할 여유가 생긴다.

개봉(開封).
거대한 삼중 성벽에 에워싸인 대송(大宋)의 심장부.
천하의 중심이며 중원의 모든 문물이 함께 공존하고 있고 온 세상의 빛과 영광을 품고 있다는 황제의 도시.
태산을 깎아 던져 놓은 것 같이 웅장한 성벽을 통과하면서부터 펼쳐진 엄청난 규모의 신세계에 아소나 쾌 같은 산골 청년들은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예비대 육천을 해산하고 군역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보살펴 준 하늘에 제사지낸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곳까지 왔다.
몇 년 동안 생사를 함께해 온 때문인지 지긋지긋한 군생활을 마치는 순간에 다들 기다렸다는 듯 눈물로 이별을 고했다. 뱀을 잘못 먹어 정신이 나갔다던 한 병사는 마지막 날 아소의 손을 잡고 서럽게 울면서 제 사는 고향에 꼭 놀러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떠나갔다.
쾌는 품에 손을 넣어 곱게 접힌 천의 감촉을 느꼈다.
쾌가 가르친 궁병대 대원들 전원의 이름과 사는 곳이 빽빽하게 적혀 있는 땀내에 찌든 천쪼가리가 쾌의 얼굴에 작은 미소를 만들어 준다.
장창을 곧게 세운 중갑기 육십이 맨 앞에서 ‘대장군’의 무사 귀환을 상징하며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고, 그 뒤로 경장기, 궁보병대가 따른다. 연천평이 탄 가마는 중간에서 수십의 호위에 싸인 채 이동하고 있었고 옆과 뒤쪽으로 아소를 포함한 각 대의 장들이, 문관 몇몇과 쾌는 바로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간다.
멀리 보이는 녹빛의 황궁과 직선으로 이어진 대로 양옆에는 연천평의 행렬을 환영하는 백성들이 무수히 나와 크게 환호하고 있다. 다들 두 눈에 존경과 신망의 기운이 가득한 것이 개봉에서 연천평의 인기는 황제에 버금간다는 말이 사실인 듯하다.
중간중간 젊은 처자들이 준비해 온 꽃 뭉치를 병사들에게 던질 때마다 젊은 병사들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생소하기도 하다.
“쾌, 어떠냐? 개봉에 온 소감이.”
어느새 다가온 악요가 말머리를 나란히 하며 묻는다.
“놀랍습니다, 사부님. 이 대단한 도성을 사람의 힘으로 건설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군요.”
셀 수도 없이 드넓게 펼쳐진 수만 채의 지붕들과 그 흔한 개똥조차 구경하기 힘들 정도로 잘 닦인 도로, 그 길을 따라 끝없이 맞춰 심어진 푸른색의 나무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한 층, 한 층 솟구쳐 있는 장대한 탑들을 보며 쾌가 감탄했다.
“특히 황궁을 향해 쭉 흐르는 강과 주변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어찌 이런 경치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요? 부자연스럽긴 하지만 나름 잘 살려 조성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을 따라 떠도는 수십 척의 배들과 둑을 가득 메운 형형색색의 민가들을 보며 쾌가 말했다.
“누가 자연이라든? 저것도 사람이 만든 거야. 다 저기 저 백성들의 피와 땀이지.”
악요의 말에 쾌는 적이 놀랐다. 성 밖에서부터 이어진 거대한 강 줄기인 줄로만 알았다. 약간의 부조화를 느끼긴 했지만 설마 인력으로 퍼 올렸을 것이라는 생각은 애초에 들지도 않았었다. 새삼 황제와 권력이란 것에 대해 거부감이 든다.
“연 장군님, 아니, 연 백부님은 도대체 어떤 분입니까? 이렇게 백성들로부터 환대를 받는 관리가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훗. 그동안 옆에서 모시면서 네가 느낀 바 그대로 아니겠냐. 백성들의 귀와 눈, 그리고 입이 수십, 수백만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더 정확한 평가가 어디 있겠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악요의 말이다.
“여기 개봉과 같은 규모의 성이 이 중원에는 여럿이 있다. 이에 약간 못 미치는 규모라면 수십이 넘지. 수천 년 전부터 권력은 낮은 자들의 고통과 눈물로 이런 영화를 만들어 왔단다.”
“그것을 ‘악(惡)’으로 보아야 합니까?”
“권력 말이냐?”
“…….”
“세상에 악이란 없다.”
악요가 단정 짓는다.
“다만 가진 자와 배고픈 자, 빼앗으려 하는 자와 지키고자 하는 자들만 있지. 모두 각자의 정의가 있는 것이야.”
악요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조금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는 엄격하고 사나우며 아주 가끔 재미없는 농담을 즐기는 차가운 사내라고만 알았거늘.
“모든 것은 말이다. 그저 평등할 뿐이야. 신(神) 앞에선……. 모두가 말하는 각자의 정의도, 세상이 말하는 악도…… 황제도, 백성도…….”
신?
언젠가 누군가에게서 들었던 것만 같다. 누구였더라…… 생각이 더 이어지기도 전에 악요가 마무리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연 어른은 참 훌륭한 분이지. 네가 말하는 악의 기준에도 한참 미달인데다가 이 시대가 원하는 세상의 이치에도 곧잘 순응하시거든. 그래서 내가 마음으로 따르는 것이기도 하고.”
“간만에 돌아오셔서 들뜨셨나 봅니다. 평소답지 않게 말씀을 많이 하시네요.”
“그런가? 흠…… 이봐! 주 대장! 또 입 헤벌리고 어딜 쳐다보나? 거참 사람도.”
갑자기 아소를 향해 호통을 치는 악요를 보고 쾌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지금껏 몇 년을 같이 생활해 오면서도 악요에 대해 채 절반도 알지 못함을 이제야 깨달았다. 알 수 없는 분…….

팔백의 병사들이 황궁 외곽에 줄을 맞춰 도열했다.
가마에서 내린 연천평은 병사들을 돌아보며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난 오 년간 그대들의 노고에 황제 폐하를 대신해 치하하는 바이네.”
입을 다물고 서 있는 병사들의 얼굴에 감격의 기운이 넘친다. 그런 그들에게 따뜻한 웃음을 지은 연천평은 곧 돌아서 황제가 기다리는 궁전을 항해 높이 뻗어 있는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연천평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을 쯤 중갑기를 인솔하던 부장 사홍(師弘)이 갑자기 병사들을 돌아보며 외친다.
“드디어 돌아왔다. 이 시꺼먼 밥벌레 놈들아! 그동안 비루먹은 개처럼 똥밭에서 구르느라 고생 좀 했다!”
병사들의 껄껄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역시 거친 사내들끼리의 교감이랄까. 욕지거리에도 불구하고 정다운 기운이 듬뿍 담겨 있다.
“웃어? 이 잡것들이! 왜? 날아가는 참새 똥꼬라도 봤나? 내 앞에서 누런 이빨 보이면 한 번에 옥수수 한 개씩이라고 했어, 안 했어?”
병사들이 신나서 왁자지껄 떠드는 것이 즐거워 보이는지 황궁을 지키는 금위(禁衛)들도 고개를 쭉 내밀고 웃으며 쳐다본다. 어지간히 무뚝뚝한 쾌의 입가에도 살짝 웃음이 걸려 있다.
“오 년간 밀린 묵은 때, 집에 가서 탈탈 털고 오늘 하루 잠이나 푹 처주무시도록! 마누라 있는 것들은 알아서 자알 할 것이고, 없는 것들은 그냥 벽 보고 반성해! 그럼 내일 정오까지 북문 앞에 올 놈들은 술 처먹고 죽을 각오가 들면 기어오도록! 해산!”
“우와아아아!!!!!”
종군을 마치면 보름 간 휴가가 주어진다. 징집된 군역자들의 경우 현지에서 해산과 동시에 고향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지만 이들처럼 군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지금의 휴가만큼 달콤한 것도 없을 것이다.

“쾌야. 넌 뭐할 거냐?”
“그냥 여기 있다가 연 백부님 나오시면 집으로 모셔야지.”
“끙…… 그럼 난 뭐하지.”
이미 현지에서 군에 투신한 아소는 내일 고향에 며칠만 다녀올 예정이다. 쾌의 요청으로 오늘은 연천평의 본가에서 하루 보내기로 했으나 지금 당장 갈 곳이 없는 것이 문제다.
고향…… 가고 싶고 보고 싶으나 마음속에 떠오르는 여러 감정들을 지우기 위해서는 잊어야 한다. 적어도 쾌의 생각은 그러했다.
친가족 같은 아삼네 식구들은 몇 년 안에 개봉으로 아소가 데리고 올 테니 지금은 안부만 전해 달라는 것 외에는 할 말이 없다.
“주 대자앙∼ 아니, 아소. 넌 나랑 가야지? 배고픈 사부 밥통 좀 채워 주시게.”
악요가 넌지시 아소를 불렀다. 순간 똥으로 세수하다 한 입 삼킨 표정을 짓던 아소는 곧 돌아보면서 환하게 웃는다.
“네이∼ 사부님. 어디로 모실까요?”
‘사람이 변해도 저리 변할까…….’
입속으로 혀를 홰홰 내두르는 쾌다. 물론 자신에 비해서는 순방향이지만. 어릴 적부터 남자로서 존경스럽던 아소가 악요 앞에서 만큼은 여섯 살 수준이었다.

기다림은 지루했으나 쾌는 미동조차 없다. 한낮의 태양이 뜨거울 법도 하나 땀 한 방울 흘림 없이 목석처럼 그 자리에 서 있을 뿐. 황궁 주변을 지키는 금위들조차 그런 쾌의 모습에 질린 표정이 역력하다.
황제와의 독대가 길어지는 것을 보니 역시 듣던 바와 같이 그 총애가 각별하다 싶다.
“오오! 이런, 마른날 갑작스레 하늘이 어두컴컴해져서 내 우장을 챙겨 오지 않은 것을 걱정했더니 웬 훤칠한 대장부가 그늘을 드리운 것이로세.”
뜬금없이 뒤에서 호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길 좀 비켜 주실 수 있으신가? 내 돌아가기엔 너무 먼 듯하네.”
그제야 쾌는 뒤를 돌아보았다.
의관을 깨끗하게 차려입은 미중년의 사내가 쾌를 올려보고 있다. 주변에 다른 수행원이나 환관의 안내도 없이 이곳까지 걸음을 한 것을 보면 그 지위가 꽤 높을 것이다.
쾌는 말없이 자리를 비켜 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런 쾌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보이던 짙은 눈썹의 관리가 앞서 가던 걸음을 멈추고 쾌를 돌아본다.
“혹시, 예부상서 그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신가?”
“맞습니다.”
“그렇구먼. 궁의 예법을 모르는 것을 보아하니 하급 군관이겠구먼.”
쾌는 대답없이 다시 고개를 약하게 조아릴 뿐이다.
“흠. 거대한 곰을 연상하게 하는 몸집하며 세상을 잡아먹을 듯한 그 눈빛. 자네가 그 소문의 쾌?”
‘……!’
“맞는가 보군. 허허, 이거 내 눈이 오늘 호강하는구먼. 수만의 적도들을 홀로 무찔렀다는 금강역사의 화신. 쾌!”
“과찬이십니다.”
이 사내에게 뭔가 이질적이고 비틀린 냄새가 난다. 그 의도는 알 수 없으나 가까이 하기에는 위험하다고 본능적인 신호가 알려 온다.
“반갑네. 본관은 안충이라고 하네. 황제 폐하의 은혜로우심으로 미진한 능력이지만 이 나라, 대송의 병부상서를 맡고 있다네. 혹 들어는 보았는가?”
“미천한 백성인지라 귀하신 명성을 알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누군지 모를 턱이 있나. 연천평을 음해하는 세력의 괴수라 알려진 자가 아닌가. 쾌는 저도 모르게 위아래 어금니가 마찰함을 느꼈다.
그렇게 쾌를 아래위로 그윽하게 훑어보던 안충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다시 걸음을 옮긴다.
“아! 한 가지 내 빠트린 것이 있구먼.”
계단을 오르던 안충이 돌아보며 말한다.
“자네가 비록 전장에서 큰 공을 세우고, 또 그 힘의 끝을 알 수 없는 무인 중의 무인이라고는 하지만 자네 말마따나 미천하기 그지없는 한낱 백성이 아닌가. 자네가 서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네.”
‘말로써 사람을 죽이는 자라 하더니 과연 명성이 대단하십니다.’
속으로 은근한 부아가 치미는 쾌다.
“오늘은 연천평 그 친구가 돌아온 매우 경사스러운 날이니 내 그냥 넘어감세. 대신!”
그 소리에 미동조차 없어야 할 금위들도 흘끔 눈을 돌린다.
“다음부터 궁의 예법을 어긴다면 그 죄를 물어 극형에 이르게 할 것이야.”
제 딴에는 근엄하게 주절거리는 듯하나 속으로는 비열한 소인배의 근성이 보인다.
쾌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다면 이자는 틀림없이 ‘악’에 근접한 인간일 터.
“명심하겠습니다. 나으리.”
들린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이를 드러내며 말하는 쾌를 잠시 바라보던 안충은 다시금 인자한 미소를 드리운 채 계단을 올랐다.
지금이야 그저 자신에게 되도 않는 협박을 지껄이고 갔으나 추후에 연천평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저 치가 좋아하는 말싸움이 아닌 피의 보복을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목을 풀어 주니 관절이 아우성을 친다. 그 소리를 들은 금위 하나가 눈이 개구리만큼 커지며 쾌를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