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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쾌 1권(17화)
4장 다시 태어나다(2)(3)


“왔느냐. 다들 고생 많았다.”
아소가 먼저 연천평을 향해 군례를 올린다. 반면, 아소 뒤편에 길쭉히 서 있는 쾌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이곳에서 쾌의 신분은 군인이 아닌 일종의 교관 자격이다. 형식적으로는 악요의 초빙을 받아 군사를 조련하는 외부인이기에 군의 예법을 따르지 않는다.
상석에 앉은 연천평 앞으로 길게 늘어선 장수들은 쾌를 보며 여전히 감탄을 아끼지 않는다.
거석(巨石)을 꽂아 놓은 듯 묵직한 존재감.
삭막함을 넘어 살벌해 보이기까지 하는 무표정한 외모.
거기다 전장에서 보이는 절대적인 무력.
마지막으로 적을 도륙할 때 나타나는 처절할 정도의 잔혹함.
마치 전장을 위해 태어난 사나이를 보는 듯 경외감마저 어린 얼굴들이다.
“소장 주은소! 대장군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총 이백여 기의 적을 맞아 중갑기 셋, 경장기 열둘, 보기 스물일곱이 사상하였고 적의 피해는 전원 사망으로 아뢰옵니다. 상처가 중한 자나 경미한 자 모두 최후의 순간 혀를 물고 자결하여 포로를 취할 수 없었음을 송구하게 생각하옵니다.”
“끄응…….”
여기저기서 장수들의 한숨이 들려온다. 타 지역으로 출정했던 장수들도 비슷한 사정이었는지 포로가 없음에 안타까움마저 내비친다.
“역시 왜인이었나?”
“그러하옵니다. 이전의 왜인을 흉내 내는 수준이었던 인근 해적들과 달리 이번에는 확실히 왜국 본토에서 넘어온 정규군임에 틀림이 없는 줄로 아뢰옵니다.”
아소의 말이 끝나자 장수 하나가 분통이 터지는 듯 식식거리며 말했다.
“대장군!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비록 그 수가 다하여 천에 미치지 못한다고는 하나 엄연한 일국의 군사들입니다. 이들의 약탈이 벌써 한 달째 지속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저 개봉의 조정에서 아무런 사전 정보가 없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마치 눈을 가린 채 늑대굴에 밀어 넣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벌써 네 번의 지방 반란과 열한 번의 각종 도적 토벌에 동원된 우립니다. 주둔한 지 이 년도 안 되어 국경 수비를 교대한 것도 모자라 대송 방방곡곡에 저희 군이 다 투입되고 있습니다. 건국 이래 이토록 혹사당해 본 장수들과 병졸들이 있었습니까? 게다가 이번엔 외적(外敵)이라니요.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올 지경입니다!”
“틀림없습니다, 장군! 저 간악한 안충(安忠)과 장태문(張太門)의 음모가 분명합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다들 조용히 하시오!”
연천평의 호통에 신나게 떠들던 장수들의 입이 한순간에 닫혔다.
‘참 말 많은 사람들이군. 진짜 고생은 병사들이 다 하는데.’
쾌의 감상이다. 하지만 장수들의 볼멘소리가 틀린 것만은 아니다.
아버지가 주동했던 반란을 평정한 이후 그동안 연천평을 오래 따르던 장수들 대부분과 토벌전에 참여하지 않았던 병력 이 천을 그대로 북쪽으로 돌리고 남은 병력과 새로 부임한 장수들, 각 로(路)에서 차출한 증원군 사천을 추가하여 예비대로 전환한 것은 조정의 뜻이었다.
그러나 이후 발생한 세 번의 민란과 각지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도적 떼의 토벌에 연천평의 예비대가 굳이 동원되었고 이것이 벌써 삼 년에 이른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처사이나 황제의 직인이 찍힌 명령서이기에 연천평은 그저 묵묵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예전 연천평을 따르던 장수들이었다면 적어도 이런 시끄러운 징징거림은 없었을 것이라고 쾌는 생각했다.
“쾌.”
“말씀하십시오.”
“무엇을 보았느냐?”
장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쾌를 향했다. 아소도 물론.
한 차례 장수들을 쭉 돌아본 쾌가 연천평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소인이 마지막으로 때려죽인 놈이 적의 우두머리였습니다.”
‘오오’하는 감탄사가 장수들 사이에서 나왔다.
“또한, 부족하지만 어느 정도 한어를 구사할 줄 아는 자였습니다.”
“그자를 통해 알아낸 바가 있던가?”
“쉽게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사실을 실토했습니다.”
아소의 일그러진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왜 말하지 않았냐고 책망하는 눈빛이다.
“왜인들은 대부분 죽음을 앞에 두고도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다고 들었네만 어떻게 가능하였는가?”
연천평의 물음에 쾌가 이를 활짝 드러낸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장수들은 왠지 상상하기 꺼림칙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다.
“힘줄을 하나씩 끊고 뼈를 뽑아 내도 그 입을 굳게 닫고 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 놈의 입에 쑤셔 넣었더니 끝내 소인에게 굴복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장수들 몇 명이 서늘한 표정으로 목을 만졌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연천평 뒤에 시립해 있는 악요는 입가를 부르르 떨며 웃음을 참고 있었고 아소는 황당한 표정으로 혀를 찬다.
“뭐라 하던가?”
“출정은 일만. 심한 풍랑으로 이천. 고려 수군에게 오천. 괴질로 이천. 남은 일천의 목표는 동남해안 초토화.”
장수들을 돌아보며 쾌가 짧게 말했다. 놈들의 계획대로 진행되었더라면 대규모 국지전의 양상이다.
“하늘과 고려국에 감사해야겠군.”
“하나 더 있습니다.”
“말해 보게.”
“충(蟲)!”
“벌레?”
장수들은 의문 가득한 웅성거림이 장내를 소란스럽게 했다.
“놈들이 따르는 영주를 움직인 중원인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중원인? 지금 중원인이라고 했는가?”
한 장수가 경악에 찬 목소리로 급히 묻는다.
쾌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연천평의 눈만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다. 연천평은 말없이 미간을 살짝 구기고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다.
“다들…… 잠시만 물러나 주시게.”
연천평의 해산 명령에 장수들은 불만스런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자리를 비운다.
“어이, 주 대장. 자넨 나 좀 보세나.”
“컥!”
서둘러 나가려는 아소를 악요가 불러 세웠다. 싸늘하게 웃으며 어깨를 걸쳐 오는 악요의 얼굴도 마주치지 못하는 아소가 불쌍해 보이기까지 하다.
“요즘 자네 몸이 매우 ‘허!’하다고 들었다네. 내 대장군 어른의 특별 지시로 자네에게 건강 체조 한두 개 정도 가르쳐 주려 하네만 괜찮겠는가? 아아, 물론 수업료는 없네. 무어? 좋다구?”
“네이…….”
아소를 끌고 나가면서 쾌를 돌아보는 악요가 눈을 찡긋한다.
최근 쾌는 연천평에게 자신이 악요를 통해 익힌 ‘연가권(淵家拳)’과 ‘연가도(淵家刀)’를 아소에게도 전수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지금도 충분히 강하지만 더 거대한 날개를 달아 주고 싶은 쾌의 배려에 연천평도 가전무술을 흔쾌히 내어놓았다.
물론 지도는 ‘악요’가 전담하기로 하고.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연천평의 심각한 표정을 살핀 쾌가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응? 아, 그래. 잠시 두통이 일었다.”
“걱정이 되어 보입니다. 평소의 연 백부님이 아닌 듯합니다만.”
자기 멋대로 쾌의 아버지를 동생으로 인정해 버린 연천평의 억지로 쾌가 ‘대장군’을 백부로 모신 지 벌써 일 년이 넘었다.
물론 이 이상 ‘귀궁’과의 연은 없었다. 쾌도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정치 싸움은 정치 싸움으로 끝나야 하거늘 가련한 저 백성들이 고통을 겪는구나.”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쭈어 보아도 되겠습니까?”
“아니다. 지금은 그저 이 현실에만 충실하자꾸나. 그나저나 쾌야, 요즘 네 심성이 다소 거칠어진 것 같아 내 마음이 조금 불편하구나.”
“죄송합니다.”
작게 머리를 조아리는 쾌를 보며 연천평이 따뜻한 웃음을 머금는다.
“너를 심하게 탓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조급함으로는 네가 원하는 경지에 이르기가 오히려 더 어려울 것이니 마음을 편히 다듬고 인내하여라. 네 나이에 그 정도 능력이면 충분히 훌륭하니 천천히 수련에 정진하여라. 알겠느냐?”
“네…….”
“흠…… 이제 반 년 정도 남았구나.”
“벌써 그리되었습니까?”
“그래. 이제 돌아갈 때가 온 것이지. 내 집, 그리고 너의 집이기도 한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