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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쾌 1권(16화)
4장 다시 태어나다(2)(2)
“아, 진짜 이 자식! 왜 이렇게 오래 걸려?”
경갑을 차려 입고 말 위에 턱하니 앉아 있던 아소가 투덜거린다.
“쾌 그노마 그거 변태 기질이 있지 말입니다. 한 번 지대로 걸려든 먹이감이다 싶으면 두고두고 놀다가 막판에 때려잡지 말입니다.”
옆에서 젊은 병사 하나가 조잘댄다.
“알거든? 근데 너 그거 아니?”
“그거라고 하시면 제가 어찌 알지 못하지 말입니다.”
“너 말투 재수 없는 거. 일단 한 대 맞자.”
병사가 후다닥 도망가면서 외친다.
“잘못했지 말입니다아∼∼∼”
“에효. 말을 말자. 근데 저거 왜 저러냐? 뭐 잘못 삶아 먹었나.”
“네. 지난번 토벌전 때 혼자 몸보신한다고 뱀을 삶아 먹고 나더니 저럽니다.”
옆의 병사가 거든다.
“킁. 그놈의 뱀이 항상 문제야.”
아소는 쾌가 사라진 언덕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어디 한 군데 긁히고 오기만 해 봐라. 내 이놈을…….”
“미안해서 어쩌지? 오늘도 멀쩡하네.”
늘어선 군마(軍馬) 사이로 쾌가 걸어 들어온다.
“컥!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냐!”
“형이 ‘아, 진짜 이 자식!’ 할 때부터?”
양손과 허리춤에 적들의 머리를 주렁주렁 매달고 서 있는 쾌를 보며 아소를 포함해 병사들이 인상을 찌푸린다.
“다른 놈들은? 적 포로는 있고?”
쾌가 주위를 뺑 둘러보며 물었다.
“보시다시피.”
아소가 손을 들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쾌는 눈을 돌려 포로로 잡혀 있던 양민들을 바라보았다. 펑펑 울면서 병사들의 손을 잡고 연신 감사의 말을 전하는 그들의 모습에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툭!
아소가 어깨를 쳐 온다.
“궁병대 애들 안 볼 거야?”
“봐서 뭐하게. 그 정도에 다칠 만한 놈들은 없어.”
“어련하시겠냐. 누가 가르쳤는데.”
어깨를 으쓱하며 보일 듯 말 듯 입 가장자리를 씰룩거리는 쾌를 보며 아소가 자리를 옮기자는 눈짓을 한다.
“왜?”
“애들 들을까 봐.”
쾌는 그렇게 아소의 뒤를 따랐다.
“넌 좋겠다. 목숨이 한 스무 개쯤 되서.”
해안이 내려다 보이는 산 비탈길에 걸터앉은 아소가 물었다. 그 말에 담긴 걱정의 기운에 쾌는 말없이 한 번 웃어 준다.
“또! 또! 그냥 웃고 말지? 에휴.”
한숨 쉬며 바닥에 널린 잡초를 거칠게 뽑아 드는 아소를 잠시 보던 쾌는 곧 시선을 돌려 해안을 응시했다.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온다.
쾌는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다. 모든 바람에는 색깔이 있다. 너는 무슨 색일까? 푸른색? 아니라고?
눈을 뜬 쾌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을 취하려거든 자신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거 누가 말했더라?”
개미 한 마리를 눌러 죽이려다 쾌의 말을 듣고 흠칫한 아소의 눈에 곧 그리움이 솟는다.
“스승님. 비 아저씨.”
한동안 둘은 말이 없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앞만 바라보고 있을 뿐.
“삼 일 후가 아저씨 기일이다.”
“…….”
“그냥 알아 두라고.”
“고마워 형. 형이 말 안 해 줬으면 또 잊고 넘어갔겠네.”
그 말에 피식 웃어 버린 아소가 다시 물었다.
“아저씨 어디 모셨는지 아직도 생각 안 나?”
“응. 이젠 별로…… 더 이상 필요 없어. 왜냐면…….”
쾌가 심장 부근을 탁탁 쳤다.
“여기 계시거든. 어머니도 왕구형님도 정찰대 형님들도 두삼도 그때 가신 분들 모두.”
쾌를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며 아소가 농을 건넨다.
“야야, 그럼 나 왕구 형님 하루만 빌려 주라. 간만에 술이라도 한잔하게.”
마주 보며 크크거리는 것이 잠시 예전으로 돌아간 듯하다.
“쾌, 아니, 호야.”
호(虎)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가끔, 아주 가끔 꿈속에서 들어 본 것만 같다.
“너 그때 대장군 어른하고 아저씨 묻으러 다녀온 날 이후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얼마 뒤 너 전사(戰死) 처리되고 사라졌을 때 나 진짜 죽고 싶었다.”
그 당시 아소가 흘린 눈물이 폭포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였으니.
“백만 년도 더 전에 얘기를 왜 이제사 물어봐? 그동안 궁금해서 어찌 참았나.”
“그건…… 너 눈이 죽어 있었거든. 내가 알던 작은 동생 ‘호’가 아닌 큰 덩치에 살기(殺氣)만이 가득한 ‘쾌’라는 괴물이 되어서 돌아온 네 눈이 말이야. 그래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역도들의 잔당 처리 작전 중 악요의 이끌림에 인적이 전혀 없는 산속으로 숨어든 것이 삼 년 전이다. 이후 일 년 동안 인세의 지옥이 여기 있구나 하고 느낄 정도로 고통스러운 수련을 쌓아야 했다.
눈을 감으며 아소의 말을 듣던 쾌의 기억이 천천히 뒤로, 뒤로 흐른다.
퍽!
“어억!”
나뒹구는 젊은 사내. 입가에 피를 흘리는 것을 보아하니 꽤 여러 번 맞은 것이 확실하다.
“여전히 약해 빠졌어. 멍청하다고 해 줄까?”
“크으.”
흐르는 피와 침을 닦아 내는 사내는 비호. 아니, 이제는 쾌라고 불리는 아이.
“때리는 재미도 없고, 손맛도 없고, 이건 뭐 그냥 짜증만 나는군.”
차가움이 뚝뚝 떨어지는 말을 내뱉는 키 큰 남자는 다름 아닌 악요.
“아직, 더 버틸 수 있습니다. 다시 해요!”
“꺼져.”
그냥 움막으로 들어가 버리는 악요를 보며 쾌가 인상을 쓴다. 서러움에 눈물을 흘릴 만하거늘 눈물보다 독기가 흘러나온다.
벌써 한 달째. 이유를 모른 채 맞기만 했다. 다짜고짜 끌려온 것도 모자라 저 강철 같은 주먹으로 끝없는 구타라니. 그런데 참 이상하다. 맞으면 맞을수록 온몸이 시원해 온다. 고통은 뼈에 사무치나 그 상쾌함으로 충분히 상쇄할 만하다.
더불어 그 작고 약하던 신체도 점점 강해지고 단단해진다. 또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키가 자랐다. 한 달 만에 아소와 비교했을 때 목 부근까지 이르렀으니.
분명 아버지와 이별한 그날 전신을 강타한 불덩어리. 머리끝에서 터져 나간 그 어떤 것으로 인해 자신은 변했을 것이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세 달. 몇 시진 동안 신나게 맞고 나면 지옥을 연상케 하는 체력 단련.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구타. 쾌에게 악요는 사람이 아니었다. 악귀!
“크어억!”
악요의 주먹을 정면으로 받은 쾌가 하늘을 난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걸레처럼 퍼지는 쾌. 그런 쾌를 지켜보는 악요의 얼굴에는 여전히 어떠한 표정도 없었다.
“몇 개로 보였나?”
“여, 여섯 개입니다.”
“흠. 어제보단 나아졌군. 그래도 덩치만 큰 바보일 뿐.”
뒤돌아서는 악요에게 쾌가 절규했다.
“왜! 왜! 저에게 이러십니까? 최, 최소한 저를 키울 생각이시라면 한마디라도 살갑게 해 주시면 안 됩니까? 악 부장님!”
악요가 걸음을 멈췄다. 숨이 막히는 정적.
“넌 아직도 네가 예전의 작고 찔찔거리는 어리광덩어리라고 생각하나?”
“……?”
“그 꼬맹이는 죽었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기괴한 괴물은 어떠한 의문도, 질문도 없어야 한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라면.”
‘다시…… 태어난다?’
“나에게 질문한 죄로 오늘 저녁은 없다. 알아서 흙을 파 먹든 똥을 처먹든 그건 네가 알아서 하도록!”
‘다시 태어난다고?’
악요는 사라졌지만 쾌는 여전히 그의 말을 되씹으며 멍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쾌의 입에서 소름 끼치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킥! 킥킥키.”
좌우로 길게 벌어진 입에서 침과 함께 새어 나오는 징그러운 소리.
“캬캬! 캬하하하하하!”
이번엔 하늘을 향해 괴소를 내뿜는다.
“네! 좋습니다. 원하신다면 괴물이 되어 드리죠! 그리고 반드시 후회하게 해 드릴 겁니다! 인간이 아닌 괴물을 키워 내신 것을요!”
피 묻은 손으로 땅을 헤치며 흙을 파먹는 쾌는 더 이상 그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릴 일 따위는 없을 것이라 다짐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두 달 후. 쾌는 처음으로 악요의 주먹을 피한다.
악요를 부장 어른이 아닌 사부님이라고 부르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나를 죽이고 있었어. 작고, 약하고, 여리고, 소심하던 호라는 아이를. 그리고 그 아이가 죽고 쾌라는 무자비한 인간 백정이 태어났지.”
“허이구. 그놈 말본새 보소. 누가 들으면 남 말하는 줄 알겄네. 인간 백정이 뭐냐, 인간 백정이?”
“다들 그러지 않나?”
아소가 순간 말을 잊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때? 내 눈.”
쾌가 짓궂은 표정으로 묻는다.
“반 정도? 음…… 굳이 따지자면 살아 있는 시체랄까…….”
“그거 마음에 든다. 살아 있는 시체.”
자신의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쾌를 보며 아소가 한숨을 쉰다.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목숨 걸고 다닐래?”
“더 강해질 때까지.”
“강해져서 뭐하게? 중원 정복이라도 해 보시게?”
쾌의 눈이 살짝 떨린다.
환한 햇살 아래 눈부신 미소를 보이던 아이. 자신을 향해 팔을 내밀며 어서 오라고 손짓하던 환상 속의 작은 소년……. 그리고 나의 인연.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이 있어.”
꿈꾸는 듯 몽롱한 목소리로 쾌가 중얼거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한참 쾌를 바라보던 아소가 말했다.
“그거 혹시…… 나냐?”
의외로 진지한 아소의 물음에 킥킥대던 쾌가 벌떡 일어난다.
“또 궁금한 건 없구?”
“흠…….”
자신보다 한 뼘이나 더 커 버린 쾌를 올려보며 아소가 코끝을 살짝 찡그린다.
“뭘 먹으면 일 년 만에 그렇게 비오는 날 대나무 자라듯 쑥쑥 커질 수 있지?”
“물, 야채, 고기, 쌀. 아! 가끔 나무껍질이나 흙, 오줌, 똥? 뭐 이 정도. 형두 악요 사부님 밑에서 한 번 배워 볼래? 혹시 알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을 나는 칠 척의 괴물을 보게 될지도…….”
“싫다! 싫어! 으…….”
‘매의 눈’ 악요를 떠올리자 괜히 엉덩이가 간지러워지는 듯 벅벅 긁어대는 아소를 보며 쾌가 사악하게 웃음 짓는다.
늘 당당하고 세상에 두려울 것 없어 보이는 아소가 유일하게 겁내는 사람이 악요였다. 옆에만 가도 매 앞에 쥐처럼 얼어붙어 말도 제대로 못 꺼내는 꼴을 보면 사람마다 알 수 없는 상성이란 것이 있는가 싶기도 하다.
“다 농담이고, 내가 누구 아들인지 잊었어?”
볼 일이 끝났다는 듯 먼저 자리를 떠나는 쾌가 흘리는 말에 아소가 중얼거린다.
“맞아. 비 아저씨는 정말 대단한 거인이셨지…… 역시 부전자전! 근데, 가만!”
쾌는 어느새 저 앞에 멀리 가고 있다.
“야! 얌마! 너 올해 몇 살이야!”
“열여덟.”
“머리만 대따 커졌지 아직 똥꼬에 털도 덜난 게 돌아오고 나서부턴 이 형님한테 왜 맨날 반말이야!!!”
쾌의 농담에 성이 난 듯 아소가 악을 쓰며 따라온다.
“우리 친형제 아녔어? 형제끼리 반말하는 거 당연하잖아.”
말문이 막힌 아소가 하릴없이 머리만 긁어대는 소리가 들린다.
간만에 느끼는 상쾌한 기분이다. 이렇게 변한 자신을 예전과 다름없이 대해 주는 아소가 좋다.
이 순간만큼은 놓아 버린 감정이 조금씩 살아남을 깨닫는 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