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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쾌 1권(15화)
4장 다시 태어나다(2)(1)
한낮의 태양이 뜨겁다.
다섯 손가락을 곧게 펼친 손을 쭈욱 뻗어 태양빛을 가려 본다.
손가락 사이로 비치는 빛이 눈을 찡그리게 만들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쾌. 이제 시작하지.”
살짝 돌아본 뒤쪽으로 자신의 그림자가 유달리 커 보인다.
“응.”
물소의 뿔을 댄 흑각합성궁(黑角合成弓)에 적시(鏑矢)를 메기기 전, 살짝 침을 발라 본다. 언제부턴가 첫 발에는 항상 작은 의식처럼 깃대에 입을 맞추는 버릇이 생겼다.
슈우우…….
얼굴을 간질이는 바람이 시원하다.
‘남동풍. 위쪽으로 두 마디. 칠백오십 보.’
쾌는 크게 한 번 호흡한 뒤 활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내리며 시위를 한껏 잡아당겼다.
숨을 다 내뱉고 멈춘 그 짧은 순간, 퉁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점이 되어 사라진다. 시위의 진동이 팔을 찌르르 울렸다.
명적의 비명은 길지 않았다.
멀리서 표적이 목을 관통당해 피를 뿌리는 것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 신호와 동시에 반대편 언덕에서 대송(大宋)이 자랑하는 중갑기마대 오십과 경갑기 팔십이 뿌연 먼지를 날리며 달려 내려온다. 그 뒤로 대형을 갖춘 보졸 삼백여 명이 따르는 것이 보였다.
당황한 적들이 차비를 갖추기도 전에 중무장한 기마대에 한쪽이 쓸려 나간다. 뒤를 따르는 경갑기 역시 우왕좌왕하는 적들의 목을 확실하게 끊어 내고 있다.
포로들을 인솔하던 적 일부가 병장기를 들어 올렸다. 힘없는 아녀자들을 살해하고자 하는 꼴이 역겹다는 생각이 잠시 든다.
쾌의 활에서 화살이 연속으로 빠져나갔다. 다섯의 목과 머리가 차례차례 피로 물든다.
대열 뒤쪽에서 잠시 놀란 눈을 끔벅거리던 적 기병들이 쾌가 서 있는 언덕을 쳐다보았다. 칠백 보가 넘는 거리에서 동료들을 정확히 저격하는 놀라운 솜씨에 경악한 듯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보통 놈들은 아닌데? 화살촉의 방향을 보고 내 위치를 찾아내다니.’
쾌는 적들의 전투 경험이 생각보다는 넓다는 사실에 작은 감탄을 보냈다.
적 기병대 뒤쪽에서 수괴(首魁)로 보이는 자가 뭐라 소리치는 것을 시작으로 오십의 인원이 이쪽 언덕으로 내달려 오는 것이 보였다.
“온다. 준비해.”
나직하게 말하는 쾌의 뒤에 쪼그리고 있던 이십 명의 동료들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두두두두두!
적들의 말굽 소리가 대지를 떨게 한다. 그 상황에도 큰 덩치를 바로 세운 채 미동조차 없는 쾌의 모습이 일견 위태해 보이지만 눈빛에 작은 떨림조차 없는 것이 믿는 바가 큰 듯하다.
“다섯…… 넷…… 셋…….”
숫자를 거꾸로 세며 쾌는 조용히 살을 활에 걸었다.
“둘…… 하나…… 발(發)!!”
대기하던 궁수들 중 열 명이 먼저 일어나 화살을 갈겼다. 적기(敵騎) 대여섯이 굴러 떨어졌다. 짧은 시차를 두고 뒤의 열 명이 화살을 날리는 사이 앞쪽 궁수들이 다시 살을 메긴다.
매우 조직적으로 훈련받은 듯 궁수들의 움직임은 침착했다. 두 번의 공격 후 적기 이십이 죽어 나가자 쾌의 입에서 다음 명령이 떨어졌다.
“산개(散開)!”
궁수들이 전력을 다해 뛴다. 사방으로 퍼진 궁수들을 보며 적들이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미 이곳의 지형에 대해 다들 숙지한 터라 약속에 맞춰 알아서 엄폐할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쾌 하나뿐.
적들의 말이 내뿜는 거친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을 때 쾌는 당겼던 시위를 놓았다.
터엉!
아래쪽으로 넓게 목을 가리고 있는 특이한 형태의 투구를 쓴 적의 머리가 뒤로 확 넘어갔다. 즉사(卽死)!
적의 죽음을 감상할 틈도 없이 다음 화살이 쏘아졌다. 약간 비껴 맞은 듯 화살이 투구에 튕겨졌지만 어마어마한 힘에 목이 뒤로 완전히 돌아가 버린다. 즉사(卽死)!
그 사이 적들은 코앞에 다가와 있다. 쾌는 각궁을 목 뒤로 둘러맴과 동시에 주인을 잃고 달려오는 말의 고삐를 쥐어 챘다.
“끼요요오오옷!”
적이 괴상한 고함을 지른다. 마상(馬上)에서 창이나 월도(月刀)가 아닌 길고 완만한 대도(大刀)를 든 모양새가 중원의 마적(馬賊) 패거리는 아닌 듯싶다.
쾌 하나에 적기 이십이 달려들었다. 뒤따라오는 적들을 흘끔 바라본 쾌는 나머지 적들이 궁수대를 추격하는 것을 보며 비웃는 듯 미소를 짓는다.
달리는 말 위에서 각궁을 풀어 잡은 쾌는 화살 두 개를 뽑아 시위에 걸었다. 그와 동시에 몸을 뒤로 틀며 살을 쏘았다.
한 놈이 목을 꿰뚫려 나가떨어진다. 그 뒤로 달려오던 놈은 오른쪽 광대뼈에 화살을 맞고 짐승 같은 비명을 지르며 낙마한 후 뒤따라오던 동료들의 말굽에 밟혀 곤죽이 된다.
그렇게 여덟 발의 화살이 적들의 숨통에 틀어박혔고 어느새 십여 명으로 줄어든 적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외침이 끝없이 이어졌다.
말 위에서 마주쳐 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위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쾌는 잠시간 바람의 노랫소리에 취한 듯 살짝 눈까지 감는다.
“고노오야로오오오!”
적의 고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리에서 빠져나와 대각으로 길게 돌아온 적이 어느새 쾌의 면전에서 대도를 휘둘렀다.
쉬잉!
귓전을 스치는 도의 궤적이 어설프다. 마상 전투의 경험만큼은 짧은 것일까? 바로 자세를 회복한 쾌의 각궁에 코를 찍혀 피가 낭자한 채 구르는 놈을 향해 가볍게 화살을 먹여 줬다.
장전을 날려 둘을 더 지옥으로 안내한 후 쾌는 말의 속도를 줄였다. 쾌의 돌발 행동에 적들도 어리둥절했지만 곧 삼 장(三丈)을 마주보고 섰다.
적들은 약간 건방져 보이는 얼굴로 자신들을 오시하는 쾌를 바라보며 이를 갈아 댔다.
쾌가 말에서 내렸다.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말의 목을 쓰다듬기까지 하는 모양이 여유가 넘쳐 보인다. 그런 행동이 삶을 포기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는지 놈들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일제히 말에서 내리며 칼을 빼어 든다.
내려서 보니 정말 작다. 육 척(六尺)이 넘는 쾌 자신과 비교했을 때, 가슴 어림밖에 닿지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말에서 내린 그들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자신들의 진정한 무력은 땅을 딛고 섰을 때 나온다고 시위라도 하는 것일까. 역시 이들에게 말은 단순한 이동수단 외에 별다른 의미가 없음이 확실하다.
“말로만 듣던 왜인(倭人)인가?”
역시 대꾸가 없다. 다만 이리를 연상케 하는 충혈된 눈을 번뜩이며 대도를 강하게 잡아갈 뿐.
쾌는 두 손을 깍지 끼운 채 위로 힘차게 뻗었다. 우드득 하면서 관절의 긴장이 풀린다. 쾌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뼈가 우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들린다.
“와라!”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약간 질린 표정을 짓고 있는 적에게 쾌는 손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토오시로!”
“하잇!”
아직도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쾌를 노려보던 적의 수괴가 한 놈을 부르자 짧게 대답한 녀석이 곧 홀로 마주 섰다.
쾌는 이 작은 적들이 전장에서 나름 예우를 갖추는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우야야야얍!”
그 순간 대도를 내려찍으며 놈이 달려들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저 큰 대도를 이 정도로 다루기 위해서 놈들은 피나는 수련을 쌓았을 것이다.
내려침을 피한다면 그 방향으로 대도를 그어 올 것이 분명하다. 쾌의 머릿속에 적의 다음 행동이 순간 그려졌다.
하지만.
침착하게 대도의 끝을 바라보며 살짝 몸을 튼 쾌는 적이 도를 비틀기도 전에 두 팔 위로 자신의 팔을 걸쳐 버렸다. 졸지에 팔이 내리눌린 적의 놀란 표정을 무심하게 바라보면서 큰 손으로 적의 얼굴을 잡고 땅에 패대기쳐 버린다.
“나니?”
적을 눕혀 버린 쾌의 주먹이 뒤쪽으로 힘껏 당겨진다. 쾌는 짧은 시간 공중에 머물던 거대한 주먹에 온몸의 체중을 실어 고개를 간절하게 흔들어 대는 적의 안면을 향해 꽂았다.
철퍽!
피부를 싸늘하게 하는 파육음이 터졌다.
눕힌 적의 얼굴을 반 이상 파고 들어간 주먹을 그대로 둔 채 쾌는 적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이누칙쇼오…….”
한 놈이 중얼거린다. 욕이 분명할 것이나 알아들을 수 없으니 거 또한 상관없다.
골편(骨片)과 뇌수, 이가 붙어 덜렁거리는 주먹을 뽑으며 쾌가 천천히 일어났다. 손에 묻은 이물질을 탈탈 털어 버리며 손목을 뿌드득 꺾는 모습을 보는 적들의 눈에 공포가 어린다.
“사코타! 안도오! 겐죠!”
이름을 불린 세 놈이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다가온다.
전의를 절반 정도 상실한 적을 더욱 쉽게 다루는 법을 쾌는 알고 있다. 피가 차갑게 얼어붙을 것만 같은 소름 끼치는 미소. 이를 환하게 드러내는 사악한 웃음에 적들의 기세가 사그라지는 느낌이 온다.
“토오오오오!”
한 놈이 도를 사선으로 내려침과 동시에 두 놈이 양쪽으로 퍼져 쾌의 대각 방향 뒤를 점한다.
피했다 느낀 순간 뒤쪽에서 바람 소리가 들린다.
바람이 불러 준 대로 허리를 꺾자 위쪽으로 날카로운 기운이 스쳐 지나간다. 세 번째 공격은 찌르기다. 이것만큼은 피할 수 없다고 바람이 알려 온다.
쾌는 오른 다리를 축으로 삼고 허리를 굽힌 채 회전하면서 왼손으로 도면을 밀어 버렸다. 순간 중심을 잃은 놈의 얼굴이 앞으로 밀려 나온다.
빠각!
엄청난 회전력을 더한 팔꿈치에 관자놀이를 가격당한 놈은 눈알이 빠져 버렸다. 그대로 소리 없이 무너지는 녀석을 방패 삼아, 찔러 오는 다른 놈의 칼을 받고 옆으로 밀쳐 버리자 놈은 미처 칼을 빼지 못한 상태로 같이 넘어간다.
쾌는 당황해하는 놈의 머리를 잡고 힘주어 두 번 돌려 버렸다.
와드드드드득!
목뼈가 산산조각 나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놈도 쓰러졌다.
삼인 합공의 연환 공격을 생채기 하나 없이 막아 내고, 거기에 더해 두 놈을 골로 보내 버린 무지막지한 힘에 질린 나머지 한 놈이 뒷걸음을 친다.
쓰걱.
어느새 말에서 내린 수괴가 떨고 있는 녀석의 머리를 날려 버린다. 얼굴 절반이 잘려 나간 줄도 모르고 손으로 더듬더듬 사라지고 없는 머리 근처를 휘젓던 놈이 곧 힘없이 엎어졌다.
“키사마와…… 바케모노카.”
“그거 칭찬인가?”
두 팔을 크게 돌리면서 몸을 풀던 쾌는 수괴의 말에 웃으며 대꾸했다.
“네놈…… 괴물?”
어눌한 한어(漢語)로 놈이 말한다.
잠시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던 쾌가 곧이어 폭소하기 시작했다.
“파하하하하핫! 뭐야? 이거이거 칭찬이 아니잖아. 거기다 어설프지만 우리말도 좀 하는군.”
“네놈…… 투귀(鬪鬼)…… 인정……. 도전……받겠나?”
“풋!”
말이 끝나자마자 웃음을 보이는 쾌를 보며 수괴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아, 미안. 토끼의 도전을 받은 호랑이의 모습은 상상해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작고 길게 찢어진 두 눈을 깜박거리던 놈은 이내 뜻을 깨닫고 인상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놈이 남은 두 놈의 졸개들에게 뭔가를 명령했다. 침울한 표정을 짓던 두 놈은 수괴의 갑옷을 천천히 벗겼고 수괴는 곧 아랫도리만 천으로 둘둘 감은 반라의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 앞부분을 시원스럽게 민 모양이 우습게 보이기도 했지만 결사의 각오를 다진 듯 두 눈에 독기를 철철 흘리는 것을 본 쾌는 곧 웃음을 거두었다.
자신의 키만큼 큰 도를 양손으로 꽉 쥐고 직각으로 올려 자세를 취하는 것이 일격필살의 승부를 보려는 듯하다.
쾌는 주먹을 서서히 쥐었다. 오도독거리는 관절의 비명이 짧게 울린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오른 다리를 길게 뒤쪽으로 빼고 주먹을 턱 아래까지 올려 준비를 마쳤다. 역시 일격을 노린다.
여유가 넘치는 쾌의 표정과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틈을 찾고 있는 것 같으나 도저히 파고들 공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터.
이마를 따라 내려오던 땀방울이 놈의 눈에 들어갔다. 그 순간.
쾌의 몸이 허공을 찢고 날았다. 수괴 역시 대도를 사선으로 치켜 올리며 쾌의 공격을 무산시키려 한다.
“끄아아아아아압!”
수괴의 기합이 길게 반사되어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