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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쾌 1권(14화)
3장 다시 태어나다(3)


깊어도 참으로 깊은 밤이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구슬프게 들리는 것이 죽어 간 수천 영혼들을 애도하는 듯하다.
비호는 따뜻하게 데워진 물잔 두 개를 들고 밤고양이처럼 소리 죽여 군영지 외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간간이 반가운 모습으로 지나가는 순찰병들의 눈에는 고마운 감정이 가득하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들의 목숨을 지킬 수 있게 해 준 격이니.
어두운 가운데 이를 한 가득 드러내고 웃어 주는 저들도 저 입에 피를 잔뜩 바른 채 아버지를 삼켰을까?
비호의 걸음이 멈췄다.
‘아버지. 저 왔어요.’
여덟 개의 장대 끝에 각각 사람의 머리가 스산한 밤바람에 흔들거린다. 주변에 넘치도록 가득한 포대 안에는 분명 죽은 역도들의 귀가 잔뜩 들어 있을 것이다.
“형님들.”
“헛! 누구냐!”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비호의 부름에 혼비백산하는 두 병사가 펄쩍 뛴다.
“아니, 꼬마 장군님 오셨네. 이 늦은 밤에 여긴 뭔 일로 온 건감?”
귀신이 아닌 것을 알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병사가 물었다.
“죽은 놈들 대가리 지키고 계시느라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요. 마실 것 좀 따뜻하게 해서 가져왔어요.”
불쑥 물잔을 내밀며 비호가 말했다. 표정이며 말투가 영락없이 예전의 어리숙한 그대로다.
“이야아. 이런 영광이!”
“생명의 은인인 것도 모자라서 이런 속 깊은 배려라니. 넌 분명 크게 될 거야.”
과장되게 고마워하며 두 병사 모두 물잔을 순식간에 비운다. 둥둥 떠다니던 이파리까지 그대로 씹어 삼키는 것을 보아하니 입이 심심하긴 했나 보다.
“그래. 어제 낮에서야 일어났담서? 몸은 좀 괘안냐?”
“이제 살 만하네요.”
“에휴…… 난 한참 뒤에 있어서 너 있던 데 난리난 거 소리만 들었다. 그놈의 빗소리 사이루 아주 기냥 퍽퍽 하면서 애들 죽는 소리만 나는데 간 떨려서 뒤집어질 뻔했지.”
“나두 맨 뒤루 숨어서, 말이며 기마대 애들 갑주 입혀 주느라 앞에선 뭔 난리가 났는지 첨엔 알지도 못했어. 그래, 어떻든?”
그 학살의 현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귀궁의 숨을 끊어 낸 비호가 마냥 신기한지 이것저것 물어보는 병사들을 빤히 바라보는 비호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그냥…… 정신을 차려 보니 저기 저 사람이 제 앞에 죽어 있더라구요.”
손가락으로 가운데 장대에 걸린 머리를 가리키며 비호가 말한다. 그것을 바라보는 두 병사의 눈에 두려움이 스친다.
죽어 있다고는 하나 마귀의 환생이라고까지 여겨졌던 귀궁이었다. 언제라도 갑자기 ‘이노옴’하면서 머리를 뽑아 버릴 것만 같아 오금이 저릴 것이 분명하다.
비호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분명 이 정도 시간이면 효과가 나타날 텐데…….
그렇게 일각 가까이 두런두런 입을 놀리던 중 병사 한 명이 픽 쓰러졌다. 그 모양을 동그랗게 뜬 눈으로 황당하게 바라보던 나머지 한 명도 곧장 뒤로 넘어가 버린다.
비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조금 전 보여줬던 순박해 보이는 얼굴과는 영 딴판이다.
그 차가운 시선은 곧 내걸린 수급들 중 가장 높이 매달려 있는 쪽으로 향했다.

얼마나 먼 거리를 달려왔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가슴에 품은 보자기를 든 채로 뛰고 또 뛰었을 뿐.
한참을 달리다 숨이 막혀 왔던 걸까. 땅을 짚은 채 헉헉거림을 반복하던 비호는 곧 날카로운 돌을 찾아 그나마 단단하지 않은 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는지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그렇게 구덩이를 완성하고 나서 보자기를 풀어 놓았다.
“추우셨죠? 이제 좀 따뜻하게 쉬세요.”
중얼거리는 비호 앞에 아버지의 머리가 놓여 있었다.
온통 피떡으로 말라붙어 흉한 몰골이지만 가늘게 뜬 눈이 비호를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미소와 함께.
준비해 온 가죽부대를 풀어 아버지의 머리를 정성스레 씻기며 비호는 계속 말했다.
“언젠가 아버지 머리 감겨 드리겠다고 약속했던 거 기억나시죠? 늦었지만 이제라도 아들 효도 제대로 받으시네요. 크…….”
세 개의 부대를 다 쓰고 나서야 풀어 헤쳐진 머리를 틀어 올렸다. 생전 자애롭고 근엄했던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인 것 같아 더욱 애처롭다.
“지금쯤이면 어머니랑 같이 계시겠죠……. 나중에 제가 찾아가면 먼저 가신 벌로 크게 혼내 줄 거라고 전해 주세요…… 또…… 많이 보고 싶어 한다고도…….”
한참 동안 말없이 아버지를 바라보던 비호는 크게 한 번 훌쩍이고 나서 아버지의 머리를 묻었다. 누가 볼 것이 두려운지 평평하게 고른 땅 위에 풀을 뜯어 흩어 놓는다.
길게 두 번의 절을 마친 비호의 귀에 중저음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네 부친었더냐?”
대장군 연천평이다. 결국.
“어찌 아셨습니까? 제 주변을 감시라도 하셨는지요?”
연천평을 대하는 말투가 낮에 보였던 극존칭과 사뭇 다르다.
“우연이라고 말한다면 믿겠느냐?”
“세상에 우연이란 것은 없다고 배웠습니다. 있다 함이라면 단지 필연이나 인연이겠지요.”
“인연이라…… 그 말 오랜만에 듣는구나.”
연천평도 인연을 말한다. 생각보다 인연을 믿는 이들이 세상에 많다고 생각한 비호였다.
“아소 조장은 거짓말에 서툴지요?”
“그래 떠듬떠듬 눈치 보며 그 입으로 거짓을 말하는 모습이 우습더구나. 그래도 끝까지 모른 척해 주었더니 나중에는 신나서 처음에 했던 말도 잊고 엉뚱한 대답만 하길래 그냥 보냈다. 내 나중에 혼쭐을 내줄 생각이다.”
아소의 모습이 그려지자 은근 웃음이 나올 것만 같다.
“홀로 귀한 걸음을 하신 것 같군요. 혹여나 산짐승에 상처라도 입으실까 걱정됩니다.”
주변을 잠시 살핀 뒤 연천평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비호가 의미 가득한 말을 내뱉었다.
“무척이나 빠르더구나. 죽다 살아난 어린아이라 여기기엔.”
“모르셨습니까? 오천 명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뛰어다니는 발 빠른 아이를요. 제 심부름 중에는 대장군 어른이 시키신 것도 있을 텐데요?”
“알고 있었다. 군영을 제 집처럼 헤집고 다니던 작은 아이를. 허나 이제는 순박한 웃음으로 달리는 것을 좋아하던 아이는 없는 듯하구나. 내 눈엔 상처투성이의 어린 야수 한 마리만 보인다. 그리고 물론 그런 작은 짐승 따위에게 겁을 먹을 만큼 내가 익힌 무(武)의 깊이가 가볍지는 않구나.”
멋지게 받아치는 연천평을 어이없게 바라보던 비호가 픽 하고 실소를 흘린다.
“잠시 주제를 잊은 짐승이 대장군 어른께 뭐 그리 근심을 드리겠습니까. 하지만 최후, 최악의 상황에서 물러섬 없는 근성을 가르쳐 주신 분은 대장군 어른 본인이십니다.”
비호의 손이 허리 뒤편으로 슬그머니 움직였다.
그런 비호를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온 연천평은 곧 비호의 옆에서 무덤을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 의외의 행동에 비호의 눈이 잠시나마 떨린다.
“수천의 목숨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베어 버리는 과감한 결단성과 그에 걸맞은 강대한 무력. 같은 남자로서 부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구려. 때를 잘 만나 세상에 나오셨더라면 일국을 다스리는 제왕으로서 전혀 부족함 없는 기개였소이다.”
무릎을 꿇은 채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연천평의 모습에 비호의 죽어 있던 심장이 떨려 왔다. 저 위대한 무장이 아버지를 인정하고 있다. 변두리 산골 일개 사냥꾼이었던 아버지를…….
“그대의 처절한 절규 속에서 진한 슬픔을 느꼈소. 나 역시 두 아이의 아비로서 어찌 그대의 심정에 동조하지 않으리오. 하지만 그 방법이 잘못되었음이 아쉽구려.”
안다, 아버지가 옳지 않았음을. 쓸모없는 아들 따위가 뭐라고 수천의 인명을 희생시키고 당신마저 스러져 가야 했는지…… 아버지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대가 아들을 알아보았을 때 나는 보았다오. 바로 아버지의 얼굴이었소. 나찰도 수라도 아닌 아버지의 얼굴…….”
비호의 숙인 고개 아래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나를 마지막으로 바라볼 때 그대의 눈을 보고 알았다오. 이 아이를…… 그대의 사랑하는 아들을 나에게 맡기고자 한다는 것을. 그 때문에 아들의 손에 목숨을 바친 것 아니오?”
그런 것이었나? 아버지가 대장군을 한 번 더 바라보았던 것은.
“잘 가시오. 비록 나라를 어지럽힌 역도의 우두머리였지만, 남자로서, 아버지로서 그대에게 부족하나마 조의를 표하겠소.”
말을 마친 후 연천평은 일어나 뒷짐을 진 채 비호를 등진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연천평은 영원할 것 같았던 침묵을 깨고 말했다.
“따르겠느냐?”
“……말씀하신 것처럼 나라를 혼란으로 몰고 간 역도들의 우두머리요, 수천을 머뭇거림 없이 몰살시킨 희대의 악인에, 대장군 어른의 십년지기들을 처참히 죽게 만든 자의 자식이올습니다. 그래도 거두시렵니까?”
비호의 목소리가 떨린다. 아버지에게 바치는 연천평의 조의에 감동한 듯 격정에 차 있다.
“언젠가 왕구 그놈이 그러더구나. 기막힌 녀석이 있다고. 잘만 키우면 뭔가 해내도 크게 해낼 아이라고. 꼭 거두어야 한다고 말이다.”
왕구 형님이 그 정도로 깊이 생각했었던가. 감사한 마음에 눈물이 난다.
“그때 왕구가 어떤 것을 보았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알고 싶구나.”
비호가 일어났다. 그리고 연천평을 향해 크고 길게 절하기 시작했다.
“이 목숨 장군께 맡기겠습니다.”
그제야 연천평은 비호를 돌아보았다.
“네가 그 귀한 목숨을 맡길 만큼 난 큰 인물이 아니니라. 너의 목숨을 맡길 거대한 그릇은 따로 있을 것이니 잠시만 내게 의탁한다 여기거라.”
“…….”
고개를 든 비호를 전에 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대장군이 말을 이었다.
“네 부친을 위해서라도 이제부터 그 이름을 버려라.”
“아비를 해한 자식이 어찌 아비가 내려 준 이름으로 부끄럽게 살아가겠습니까. 장군께서 내려 주십시오.”
“쾌(快)!”
‘쾌…….’
“이제부터 너를 그리 부를 것이다.”
“마음속 깊이 감사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비호, 아니, 쾌를 일으키며 연천평은 아직은 작은 소년의 어깨를 보듬는다.
“내가 가진 ‘인연의 끈’을 ‘끝’으로 인도할 거대한 바람이 되어라.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태풍이 되어 세상을 떠받칠 ‘인연의 끝’이 되어다오…….”
이해할 수 없는 연천평의 말을 지금은 그저 머리로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쾌였다.
그리고 지금…… 쾌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