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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쾌 1권(13화)
3장 다시 태어나다(2)
“호야…… 그럼 마음 단단히 먹고 들어. 부탁이다. 어떤 말을 듣더라도 절대! 저얼대! 정신 놓지마.”
“네.”
“……아주 예전부터 크고 작은 전쟁이나 자연재해, 아니면 인간의 탐욕과 실수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거나 고통에 신음할 때마다 가장 부족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땅? 돈? 아니야. 식량이었지.”
어릴 때는 책벌레라는 놀림을 받을 정도로 공부를 즐기던 아소였다. 어찌나 영특했던 지 글방 선생이 큰 고을 학당에 보내 보라고 할 정도였으니. 대갓집에서 태어났더라면 능히 대송을 가로지르는 학식 높은 문관이 되었을 것이라고 모든 이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이 넓은 중원땅에 가장 많이 존재하는 생명체가 무엇이 있을까. 닭도 아니고 소나 말, 개? 다 아니다. 항상 넘쳐 나는 건 인간이었단다.”
점점 아소의 말이 가관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자 함일까? 의아한 중에도 얼핏 돋아나는 소름에 피부가 서늘하다.
폭넓은 지식을 자랑하는 것은 좋으나 지금 하고자 하는 말과 아버지는 무슨 상관관계가 있단 말인가?
“인간이 가장 무섭고 잔인해질 때가 언제인지 아니? 인성과 도덕을 상실한 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야. 극한의 상황은 인간을 야수로 만들지.”
그동안의 가벼운 모습을 버리고 또박또박 진지한 말을 쏟아내는 아소가 생소하기만 한 비호였다.
“그래. 식인(食人). 사람이 사람을 베어 먹는 천인공노할 행위가 이 땅에선 너무나도 많이 일어났단다. 지금에 와서는 풍습(風習)이라는 말로 미화되기까지 해. 그런데 말이다. 더 무서운 사실은 이 저주스런 행위가 용인되지는 않지만 묵인(默認)된다는 거야.”
머리 한 구석이 찌르르 쑤셔 온다. 분명 듣고 이해하고 있으나 부정하고 싶은 자기방어적 반응이었다.
“혀…….”
“대꾸하지 말고 그냥 들어!”
아소가 소리쳤다.
“어릴 때 기억나니? 못된 장난치다가 혼나거나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한테 우리 부모님들이 뭐라고 하셨는지를. ‘너 자꾸 그러면 저 무서운 황소(黃巢)가 와서 이놈! 하고 잡아간다!’ 라고들 하셨지? 왜 그러셨을까? 역사에 대해 무지했던 그분들이 황소가 누군지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다 알고 계셨던 걸까? 아니야.”
비호는 이제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 끄억끄억 괴상한 신음을 흘렸다.
“그 당시를 살았던 우리 선조들이, 그 무서운 기억을 대대로 물려줬던 거야.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인신연회를 말이야.”
“그, 그러니까아…… 혀, 형 말은…….”
비호의 떨리는 물음을 잘라 내고 아소가 계속해서 말했다.
“전쟁이란 건 말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참혹한 폭력이란다. 특히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던 적은 죽거나 상처 입었을 때 가장 훌륭한…….”
“그마안!!! 그만요! 형!! 제발…… 그만해요…….”
감정을 마음속 깊이 묻었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그것을 세상에 내어놓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론 더 이상 희노애락을 잊고 살고자 했었다.
비호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아소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차분한 어투로 비호의 심장을 찔러 댔다.
“……수백 명이었어. 역도들을 섬멸하고 승리의 환호가 미처 식기도 전이었지. 한쪽에서 소란이 일더구나. 아귀다툼도 그런 다툼이 없었어. 온몸에 피를 묻힌 병사들이 악을 써대며 소리 지르더라 ‘내 꺼야! 내 꺼!’ 그들은 이미 수천의 역도들을 베면서 피 맛을 알아 버렸거든. 사실 아저씨가 그리 가시고 나서는 일방적인 우리의 학살이었지만 그 흥분은 쉽게 가라앉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커어…… 흑흑흑…… 끄으으으으…….”
소리 내 울지 못하고 깔린 이불을 양손으로 쥐어뜯으며 비호는 입술을 터질 듯 깨물고 있다. 그 모습을 슬픈 눈으로 지켜보며 아소가 말했다.
“누구도 말릴 수 없었어. 짐승의 그것보다 더 누렇게 변해 버린 병사들의 눈빛은 그 자리를 방해하는 어느 누구라도 베어 버리겠다는 의지가 충만해 보였거든. 대장군도, 그를 수행하는 호위무장들과 병사들도 그 상황을 망연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거야. 말렸다간 바로 반란이라도 일어날 분위기였지.”
“허어어어어…… 으허어어억…… 꺽!”
아소가 비호에게 다가가 조용히 안아 준다. 어느새 아소의 눈에서도 벌건 눈물이 끝없이 흐르고 있었다.
“아저씨가 보여 주셨던 그 어마어마한 무력 기억하지? 미신에 찌든 병사들의 눈에는 아저씨가 귀신을 부리는 야차의 현신이라고 느껴졌겠지. 그 힘을 조금이라도 얻고자 아저씨를 그리한 것일 테고.”
비호의 몸이 덜덜 떨리며 컥컥대는 신음마저 이제는 흘러나오지 않는다.
“미안하다…… 아저씨를 지켜 주지 못해서.”
비호의 떨림이 멈췄다. 억눌린 신음도 이불을 발갛게 물들이던 눈물도 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 저 끝까지 아버지를 아프게 했나 봐요.’
잠시 후 감았던 눈을 뜬 비호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듯 굳은 얼굴을 풀지 않는 아소를 보며 비호가 말했다.
“형, 고마워요. 덕분에 나 결심할 수 있게 되었어요.”
“무슨 소리야? 결심이라니…….”
비호가 차갑게 웃는다. 그 웃음에 아소의 표정이 복잡하게 구겨졌다.
“너…….”
그때 군막을 열고 큰 키에 독수리의 눈을 가진 장수가 들어왔다. 대장군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부장(部長) 악요(岳曜)였다.
“호. 깨어났나? 대장군께서 기다리신다네.”
군영지 한복판에 떡하니 위치한 대장군의 임시 군막은 밖에서 보기에는 일반 병사(兵舍)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입구에 약간은 무료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호위병들이 없었다면 대송 최강의 무장이자 예부(禮部)의 가장 웃어른이며 황제의 ‘검과 붓’이라 불리는 이가 거처하는 곳임을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악요의 안내로 들어간 군막에는 각 병대를 대표하는 쟁쟁한 무장들이 대장군과 더불어 원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이여∼ 꼬마 영웅 오셨구나.”
“덕분에 살았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꼬?”
“클클, 용기는 무신, 겁나서 눈 꼬옥 감고 덜덜 떨고 있었겠제.”
반갑게 맞아 주는 무장들의 인사에 비호는 표정 없는 얼굴로 깊이 고개를 숙인다.
“왔느냐. 고생 많았다. 거기 앉아라.”
듣기 편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특징인 대장군이 비호를 환대했다.
“그럼 저희들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분분히 일어서 군막을 나가는 무장들에게 비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군막 안에는 대장군과 비호, 그리고 대장군 뒤에서 굳은 자세로 서 있는 악요만이 남았다.
“허허. 뭘 그리 멀뚱 서 있느냐. 앉으래두.”
대장군이 재차 말하자 악요가 눈짓으로 앉으라는 시늉을 한다. 그제야 비호는 원탁을 사이에 두고 대장군과 마주앉았다. 잠시간 조용한 침묵이 그들을 스쳐 지나간다.
또르르르르.
차를 따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어색한 침묵을 털어 내는 대장군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차에 대해 아느냐?”
“미천하여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저런…… 그런 뜻이 아니었거늘.”
대장군은 손을 뻗어 친히 비호에게 차를 권했다. 예전 같으면 황송해서 무릎이라도 꿇었으련만 너무나도 담담히 대장군을 대하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도 놀랍다. 당장 옆의 악요만 해도 눈을 부라리는 것이 지금 비호의 행동이 예법에 크게 어긋나는 것일 터.
“나 역시 차를 알지 못한다. 그저 부족하지 않은 삶 속에서 찾은 작은 사치라고만 해 두자. 한 번 들어 보거라. 텁텁하면 얘기하구.”
반 모금을 입에 물고 그 향을 음미한 후 조금씩 넘기는 비호를 보며 대장군이 헛웃음을 흘린다. 분명 쓴맛을 진하게 느꼈을 터이지만 눈썹에 변화 하나 없는 것을 보며 흥미를 느끼는 듯하다.
“호오…… 차를 알지 못한다 하나 그 맛과 향을 다루는 법을 아는구나. 어느 고인이 그런 가르침을 내려 주었느냐.”
“어릴 적부터 신체가 허약하여 아비로부터 약초에 대해 배웠습니다. 약효를 온전히 흡수하기 위해 다례를 적용한 것도 아비의 생각이옵니다. 또한 차의 쓴맛이 역하지 않았냐고 물으신다면 약의 독함이 차의 향취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아뢰옵니다.”
“허허허. 너를 보니 네 부친의 됨됨이와 정성을 알 만하구나. 그래 부친께선 어떤 분이신가?”
비호의 눈이 잠시 원탁에 머물렀다.
‘아버지는…… 다정하고…… 또…….’
“제 아비는 형호남로 영주에서 소를 잡는 천한 백정이옵니다. 생활이 궁핍하여 산에서 약초를 캐어 살림에 보태 왔기에 미흡하나마 얕은 지식을 익혔을 뿐이옵니다.”
“사람이 어찌 귀하고 천함의 구분이 있겠느냐마는 타고난 생이 그러하다면 그 삶에 충실한 것이 대송을 살아가는 백성의 도리일 터. 다만, 네가 부친을 천히 여기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리 여기지 않을 것이니라.”
듣기에는 그럴 듯한 대장군의 언사이나 이 순간 위진이 말했던 궤변이란 단어가 문득 떠오른다.
“넓으신 말씀 감사드리옵니다.”
“그래. 요 며칠 고열로 정신을 잃고 있었다 들었다. 지금은 어떠하냐.”
“대장군께서 심려해 주신 덕에 털고 일어났습니다.”
“허허허. 내 들은 바와는 다르게 매우 조신한 아이로구나. 직접 보니 마음이 절로 흐뭇하다.”
유쾌한 웃음을 터뜨린 대장군이 비호를 바라보는 눈길이 매우 부드럽다. 하지만 뭔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눈치가 역력한 것이 비호의 심장을 은근히 뛰게 만들었다.
“오늘은 네가 매우 피곤해 보이니 나중에 다시 보자꾸나. 들어가 쉬어라.”
대장군은 이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악요의 뒤를 따라 군막 밖으로 나온 비호는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넘어 땀까지 줄줄 흘려 대는 아소를 보았다.
악요에게 짧게 고개를 숙인 비호의 귀에 아소가 속삭였다.
“그래. 대장군께서 뭐라셔?”
“그냥……. 차맛이 어떻고 뭐 그랬어요. 아버지에 대해 물으시길래 아까 형하고 말 맞춘 대로 했구요.”
덤덤히 말하는 비호를 보며 아소는 질린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으구……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데. 암튼 나중에라도 예전의 너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냥 내 바람이 그래. 흐유…… 일단 십년감수했다. 그냥 넘어가셨다니…….”
“제삼정찰대 조장 주은소(朱銀少)!”
아소의 본명이다.
“히끅!”
“들어오라. 대장군께서 보자신다.”
“네이…….”
갑자기 아소를 찾는 대장군의 행동에 비호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심은 이미 했고 이제 남은 것은 실행뿐.
“혼자 갈게요. 저 일단은 그냥 자고 싶으니까 안 오셔두 되요.”
“그, 그래 알았다. 그럼 푹 자. 일어나면 내 군막으로 오셔!”
악요를 따라 굳어서 벌벌 떠는 모양으로 군막에 들어가는 아소다.
문득 돌아서는 비호의 눈이 뭔가를 보고 반짝인다.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본 후 조용히 다가가 땅에 어지러이 나 있는 풀들을 한 가닥씩 뜯어 품에 쑤셔 넣는 비호의 얼굴이 서늘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