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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쾌 1권(12화)
3장 다시 태어나다(1)


순수한 무(無).
다만 순백(純白)의 공간이 아닌, 절대적인 암흑(暗黑)으로 채워진, 존재 그 자체가 불가능한 비(非)공간.
살아 있다는 그 어떠한 느낌도, 사유(思惟)한다는 그 어떠한 존재의의(存在意義)도 허용치 않는, 그저 무의식 속 목표를 향한 방향성만이 허락된 비현실의 세계.
하지만 설명이 불가능한 어떤 감각의 소리를 비호는 인지하고 있었다.
생명의 끝에 감추어진 비밀의 영역에서 미약하나마 의식의 흐름이 있음에, 모든 감정이 무효함에도 불구하고 비호는 실낱같은 한 가닥의 의지를 떠올렸다.
거부감.
속해 있는 차원에 대한 명백한 거부감이 그것이었다.
태초의 존재가 정해 놓은 미지의 선을 넘게 되면, 다시는 생육(生肉)으로서 기능하지 못함을 자각한 영혼의 몸부림이랄까.
인식과 느낌.
지독한 삶의 욕망을 깨울 수 있는 최후의 몸부림이 잠들었던 의지를 잡아 올리고 있었다.
비호는 시간(時間)도 오감(五感)도 정지한 무한의 세계 한가운데에서 다가오는, 아니, 그럴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새로운 차원의 경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끝없이 영원할 것만 같은 암흑의 세계를 찢어 놓은 듯, 너무나도 강렬한 빛을 발하는 ‘공간’의 입구에서 비호는 어떤 초월적 존재를 느꼈다.
그, 아니, 그녀일까?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까닥이며 손을 내미는 존재에게서 비호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의 감정을 공유했다.
반가워하는 미소와 손을 잡아 오는 따뜻한 느낌이 포근하다.
“인연이라…….”
희미한 의식의 소용돌이 속에 마지막으로 들렸던 말이 떠오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궁한 감사의 마음이 가슴을 가득 채워 온다.
비호는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중얼거림을 뒤로하고 서서히 몸의 감각이 살아 오고 있음을 느꼈다.
손과 발의 촉감보다 먼저 느껴진 것은 배고픔이었다. 살아 있음을 가장 단순하게 증명해 주는 원초적인 갈망. 어이없어 웃음이 나온다.
비호는 눈에 들어오는 장소가 군막 안임을 인식했다.
익숙하진 않지만 병사들의 땀 냄새가 배어 있는 것에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 온다.
‘십칠조…… 그래. 아버지의 손에 한 명도 남김없이 세상을 떠나야 했지.’
비호는 오른손이 촉촉한 느낌에 살짝 고개를 돌렸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아소가 두 손으로 비호의 오른손을 꽉 잡은 채로 잠들어 있다.
근본은 다르지만 마음으로 맺어진 형제. 비호에게 아소는 혈육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사람이었다.
비호는 떨리는 왼손으로 아소의 두 손을 잡아 갔다. 분명 그날 이후 비호가 깨어나기까지 이 자리를 지켰음이 틀림없다.
“어…… 응?”
눈물과 콧물이 말라붙어 있는 볼썽사나운 얼굴로 막 잠에서 깬 듯 걸쭉한 침을 흘리며 아소가 정신을 차렸다.
“호! 야이……야! 야야!”
놀라 사나워진 얼굴로 비호에게 소리치던 아소는 곧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형. 미안해요. 고생시켜서.”
“아휴! 너어! 도대체 몇 날 며칠을 요래 푹! 고꾸라져 있었는 줄 알어? 심장, 간, 허파 할 것 없이 다 떨어지게 걱정시켜 놓고! 삼 일이야 삼 일!”
“나 배고파요. 밥 좀…….”
“그래? 아, 알았어! 내 금방 다녀올 꺼구마!”
언제 사투리를 배웠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시 순식간에 보글보글한 죽 한 그릇을 들고 들어오는 아소다.
“며칠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 일단 이걸로 뱃속부터 달래 줘. 내 나중에 고기 들어간 밥 실컷 먹게 해 주마.”
천상의 오리 고기를 받아 먹는 듯 소중하게 쥐어 든 죽을 호호 불면서 천천히 음미하며 먹는 비호를 바라보는 아소의 표정이 꽤 어둡다.
“어떻게 되었죠?”
죽 그릇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비호가 물었다.
“어떻긴! 다 끝났지. 역시 대장군님 숨겨 둔 한 수가 있더라구. 우와아! 전마(戰馬)로 수레를 끌게 하고 식수통에 갑주를 숨겨서 오셨을지 어떻게 알았겠냐. 중갑기마대(重甲騎馬隊)랑 경갑기(輕甲騎) 애들이 먼저 쫘악 밀고 마무리는 우리가 끝냈어. 우리 애들 피해는 거의 없었고.”
팔을 크게 벌려 과장하는 모양새가 평소의 모습과는 영 다르다.
“히야아. 너가 그걸 봤어야 하는데. 진짜 씨꺼먼 녀석들 백 명이 그 큰 장창 쭈욱 내밀고, 두두두두 하면서 싸악 쓸어버리는 데 이건 뭐…… 내가 거길 지원했어야 했는데. 히야…….”
아소의 마음 씀씀이에 목이 멘다.
비호는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끼자마자 죽 그릇으로 얼굴을 가리고 후루룩 삼키는 시늉을 했다. 혼자 손짓 발짓 다 섞어 신나게 떠들어 대던 아소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잠잠해졌고 그렇게 어색한 시간이 잠시 흘렀다.
“…….”
“고마워요.”
“뭐가.”
은근히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아소다.
“아버지 편하게 보내주셨잖아요.”
그 피보라 속에서 두 눈알이 잔뜩 충혈된 채로 이를 악물고 서 있던 아소의 모습을 보았다.
“그래…… 내가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다른 누가 아저씨 몸에 손대는 거 도저히 용납이 안 되더라.”
“형이라 다행이에요.”
또다시 침묵이 둘 사이에 줄줄 흐른다. 군막 내에는 비호의 쩝쩝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아직은 떨리는 손으로 그릇 바닥까지 박박 긁어 먹던 비호가 아쉬운 표정을 짓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소가 침묵을 끊었다.
“너 왠지 좀 변한 거 같다?”
“……네?”
“아니…… 그냥 좀 더 커진 거 같기도 하고…… 말투며 표정도…… 흠. 암튼, 그래.”
“그런가요?”
씁쓸한 웃음이 번진다. 비호 자신도 알고 있다. 예전이었으면 난리발광을 떨었을 텐데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차분하다.
“형.”
“어? 어, 그래.”
“아버지 시신은요?”
순간 아소의 미간이 내천(川)자를 그리며 눈빛이 심상치가 않다.
“내…… 가 수습해서 묻어 드렸다.”
어렸을 때부터 아소는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았다. 본처 만난 첩마냥 눈을 아래로 내리깐 모습이 진실을 감추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거짓말.”
“……!”
“아,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아니다. 내 좀 당황했을 뿐이야. 너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첨이거든.”
비호를 신기한 눈으로 잠시 바라보던 아소는 곧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잘 들어. 아저씨가 너에게는 한 분뿐인 아버지시고 나에겐 둘도 없는 스승님이셨지만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에겐 잔혹한 역도들의 우두머리일 뿐이야. 인정하기 싫어도 이건 사실이다.”
“알아요. 아니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흠…… 그래. 그러면 말하기가 좀 편하겠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망설이는 모양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 비호의 무표정한 모습이 익숙하지 않은 듯 입술만 달싹거리다 곧 어금니를 꽉 문 채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저씨 머리는 지금 군영지 외곽에 다른 무리들 몇몇과 함께 걸리셨어.”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다. 하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고 이가 부러질 듯 턱에 힘이 들어간다.
“그럼 아버지 몸은요? 다른 시신들이랑 섞여 저기 어딘가에 묻혔겠군요.”
찔끔.
아소의 신체가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비호는 순간 뭔가 충격적인, 그리고 소름 끼치는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형…… 제 얼굴 똑바로 봐요. 형? 형! 형! 아, 좀 똑바로 보라구!!!!”
악을 쓰는 비호를 정말로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아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태어난 이래 이렇게 흥분하여 막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 터.
“형…… 미안해요. 제가 지금 정신이 나간 건 확실해요. 아닌 게 이상한 거죠. 근데요 형. 형만은 저한테 솔직하게 말해 줘야 되요. 나중에 다른 사람이 진실을 깨닫게 해 주는 거…… 그거 너무 싫어요. 형이니까…… 형이니까 듣고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시겠죠?”
비호가 지금까지 이 정도로 자신의 의지를 내 비친 적이 있었던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여기 아소뿐만 아니라 비호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소의 질끈 감았던 눈이 천천히 들린다. 아래쪽부터 잔뜩 젖어 있는 것이 서럽게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