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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쾌 1권(11화)
2장 비틀린 그러나 가슴 아픈 부정(父情)(5)


아버지와 비호 두 사람만의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지금의 상황이, 이 참혹한 현실이 그들에게 긴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얼굴에 안타까움과 후회의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곧 무언가를 결심한 듯 아버지의 눈빛이 결연해졌다.
시선을 돌려 비호의 주변 병사들을 훑어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잠시 짓더니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기이한 행동에 놀라 병사들이 뒷걸음질 친다.
이번에는 대장군을 바라본다.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대장군을 일별한 아버지는 다시금 비호를 향해 따뜻한 웃음을 보냈다.
너무나도 따뜻한…….
아버지의 말이 앞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며 방향을 틀어 곧바로 달려갔다.
그렇게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갈 줄은 생각도 못했던 비호는 자신도 모르게 달려갈 뻔 했다.
“으그, 이것아 진짜 정신이 헤까닥 해 버린 거냐! 아까부터 왜 미친 짓만 골라 해!”
비호를 잡아끌며 두삼이 투덜거렸다.
그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비호의 두 눈은 아버지의 모습만을 쫓았다. 멀어지는 아버지의 넓은 등이 믿음직스럽다.
아버지는 분명 이 상황을 뒤바꿀 뭔가를 하러 가셨을 거다. 아버지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비호의 세계에서만큼은 아버지는 천하제일이었기에.
비호는 아소에게 눈을 돌렸다. 상황 파악이 끝난 듯 아소의 표정은 전보다 풀어져 있지만 긴장의 끈을 아직 놓지 못하고 있다. 그런 아소에게 비호는 걱정 말라는 웃음을 보냈다.
아버지 주위로 야묘와 다른 엽사들 몇 명이 모여드는 것이 멀리 보인다. 곧 얼마간의 대화가 끝나고 엽사들이 사방으로 퍼졌다. 아마도 아버지의 명을 전하려는 것일 터.
“전방! 거어∼창(擧槍)!”
느닷없는 명령에 병사들이 반사적으로 극을 올려 세웠다.
‘아, 아직요…….’
사정을 모르는 대장군이 안타까웠다. 조금만, 조금만 있으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끝날 텐데.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기세를 풀지 않는 것이 대장군의 신조라고 들었다. 허나 지금은 아니어야 한다. 적어도 비호의 마음속 외침은 그러했다.
뒤에서 궁병대가 대형을 갖추는 소리가 들린다. 예고된 대학살 속에서 명예로운 최후를 위한 마지막 준비였다.
떨어지는 빗줄기는 가늘어질 줄을 모른다. 멀리서 용이 울부짖는 듯 천둥이 굉음을 내고 있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갈수록 비호의 마음속에서는 작은 불안감이 꿈틀거렸다. 마치 사냥감의 숨통을 향해 마지막 한 발을 메겨 당기는 그 찰나(刹那)의 순간 속에 빠져든 것과 같은 착각마저 든다.
아버지가 움직였다.
동시에 뒤로 길게 늘어서 있던 역도들이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그들은 전진하고 있었다. 병장기를 곧장 이쪽으로 향한 채 느리지만 확실하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을 한참 벗어난 움직임에 비호는 얼어붙었다.
돌아서기 전 아버지의 얼굴은 냉혹한 학살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이들 모두를 죽이고자 함일까? 더 이상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
그때.
아버지의 말이 젖은 대지를 박찼다.
퓽∼
쓰읍!
공기가 가늘게 떨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오른쪽이 허전해지면서 피떡이 얼굴에 확 튄다.
돌아본 자리에 있어야 할 종찬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극한의 속도로 날아온 직사에 목이 뜯겨 머리통이 공중에 붕 떠 있다.
잘생긴 얼굴 상한다고 훈련 중에도 눈만 빼꼼 드러낸 채 천으로 얼굴을 둘둘 말았던 실없는 친구였다.
종찬 뒤쪽으로 늘어선 병사들도 그 가공할 힘에 세 명이 산적(散炙)처럼 꿰여 무너지고 있었다.
놀라고 자시고 할 겨를조차 없다.
턱!
이번엔 양송이었다. 코 아래를 저격당해 안면 상반부가 사방으로 비산한 채 어지러이 팔을 휘젓다가 힘없이 쓰러진다.
겁이 많아 밤에 볼일도 못 보러 다니던 얌전한 친구였다.
마찬가지로 뒤의 병사 두 명의 몸에 아기 주먹만 한 구멍이 뻥 뚫려 내장 조각이 튀어나온다.
“뜨어억!”
나름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하려 했던 병사들의 입에서 두꺼비 숨 넘어가는 비명이 울렸다.
퓽! 씨우웅!
순식간에 두 발의 화살이 동시에 날아와 또 양옆의 병사들을 줄줄이 쓸고 지나갔다.
내리치는 번개의 빛이 멀리서 말을 달려오는 아버지를 문득문득 비춘다. 이 어둠 속에서도 아버지는 엄청난 속사(速射)로 한 줄, 한 줄 정확하게 숨골을 끊어 내고 있었다.
한 번의 당김에 대여섯 명이 죽어 넘어간다.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죽음의 숫자를 가뿐하게 초월하는 경지다.
갑자기 뒤의 두삼이 방패를 들어 비호의 가슴과 얼굴을 가렸다. 소용없음을 알겠지만 약속을 최대한 지켜보겠다는 생각이었을까.
가죽을 후려 때리는 소리가 비호의 머리 위에서 들렸다. 그리고 얼굴을 가렸던 방패가 서서히 아래로 미끄러진다.
턱!
비호의 어깨에 무거운 어떤 것이 걸쳐졌다. 두삼의 얼굴이었다.
두 눈 사이에 뚫린 큰 구멍으로 부서진 뇌와 핏덩어리가 점점이 흩어져 나온다. 충격으로 빠져나와 덜렁거리는 눈알이 마치 큰 구슬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 와중에도 비호 주변의 병사들은 계속 튕겨져 나갔다. 이 기막힌 죽음이 삼십에 달했을 때 뒤편에 위치해 있던 궁병대에 발사 명령이 떨어졌다.
“발(發)!!”
이백여 발의 화살이 일제히 아버지를 향해 날아갔다.
세찬 비의 무게와 바람의 방해였을까. 화살들은 달려오는 아버지의 근처에도 못 미치고 어지러이 떨어져 내린다.
“우우…… 우!”
주변 병사들이 본능적으로 비호를 중심으로 하여 원을 형성했다. 원의 맨 앞쪽에 위치한 자들은 필사적으로 뒤를 밀어내며 자리를 피하고자 안간힘을 써 댔다.
그러면서도 아무도 비호 홀로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는다. 죽음의 공포와 지독한 어둠이 그들의 사고마저 마비시켜 버렸기 때문일까.
“발!”
궁병대의 두 번째 공격이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대부분 아버지의 뒤편으로 훌쩍 넘어가 버린다.
이제는 말발굽이 젖은 땅에 부딪쳐 튕겨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아버지는 비호 가까이 달려오고 있었다. 거센 빗소리 속에서 아버지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은 분명 착각이 아닐 것이다.
세 번째 공격은 효과가 있었다.
아버지의 말이 고슴도치가 된 채 구슬픈 비명을 울리며 쓰러졌고 아버지는 하늘 높이 솟구쳤다 떨어져 굴러야 했다.
역도들이 빗줄기를 헤치며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장수들과 조장들이 소리쳐 명령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병사들의 시선은 오직 단 한 사람, 귀궁이라 불리는 비호의 아버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네 번째 화살비를 여유 있게 피하며 장전(長箭)을 시위에 걸었다. 철궁이 한껏 휘어지는 것이 보인다.
텅!
쓰아아앗!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무려 일곱 명이 참혹하게 부서지며 뒤쪽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져 버린다.
이제 비호의 반경 삼 장 내에는 더 이상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그리고 아버지의 철궁에서 마지막 한 발이 쏘아졌다.
“끄아아아아아아악!”
괴수의 포효가 저러할까. 하늘을 무너뜨릴 것과 같은 거대한 고함이 아버지의 입에서 토해졌다.
비호를 향해 칼을 빼어 들고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아버지의 모습에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난리를 쳐댔다. 번쩍이는 번갯불 사이로 비호는 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빗물 사이로 진홍색의 물줄기가 섞이는 것을.
그것은 피눈물…….
비호는 드디어 깨달았다.
아버지는.
모두를 죽여 비호를 살리고자 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스스로를 죽여 비호를 살리고자 하고 있다.
아버지의 마지막 화살은 뒤편의 깃대를 부러트렸고 깃대가 쓰러지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비호의 머리 위로 떨어지며 펄럭이는 깃발.
아버지가 비호의 품에 뛰어듦과 동시에 깃발이 둘을 감쌌다.

* * *

빗줄기가 가늘어지면서 하늘에 난 틈 사이로 달빛이 길게 내리 비춘다. 아니,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방이 매우 고요한 것이 방금 전의 난리통은 꿈인가 싶기도 하다. 꿈?
비호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걸렸다. 왜 이제야 알았을까.
이 모든 것은 꿈인 것이다. 기나긴 악몽. 바보 같이 그것도 모르고 혼자 울고불고 유난을 떨어 댔으니 꿈이지만 부끄럽기까지 하다.
분명 눈을 뜨면 사방에 오줌 한가득 지렸을 것 같다. 다 큰 놈이 미쳤다고 아버지한테 꿀밤 맞을 것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아버지? 그래…… 아버지.
이 끔찍한 악몽을 조잘조잘 얘기해 드리면 무서웠지? 라며 꼭 안아 주시겠지…….
비호는 감았던 눈을 살짝 들었다. 역시 컴컴한 것이 이불을 푹 덮고 잠들었었나 보다. 온몸이 축축한 느낌이 지린 오줌이 한 바가지가 아니라 몇 바가지는 되는 듯하다.
머릿속에서 ‘윙’하는 소리와 함께 아직까지 어질어질 한 것이 잠이 덜 깬 것일까. 손을 뻗어 이불을 걷으려는 데 두 손이 뭔가 단단한 물건을 잡고 있었다.
잠시 든 의문을 접고 비호는 눈앞을 가리고 있는 이불을 들었다.
‘……?’
이불을 뚫고 얇게 들어오는 달빛에 아버지의 얼굴이 보인다. 웃고 있는 것이 분명하건만 아버지의 눈이 매우 슬퍼 보였다.
무의식중에 단단한 것을 잡고 있는 손으로 시선이 갔다.
장대 같이 긴 어떤 것. 그리고 그 끝이 닿아 있는 곳. 아버지…….
머릿속을 울리던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흐어어…….”
비호는 입을 벌리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댔으나 목에서 걸린 비명은 쉰 소리가 되어 간신히 새어 나왔다.
툭…… 툭…….
눈에서 뭔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면서 눈물이 아닌 뜨거운 것이 흘러내린다.
떨어져 내린 깃발이 두 사람을 덮음과 동시에 아버지가 날카롭게 벼려진 극에 몸을 던졌던 것이 기억났다.
양쪽 덧날이 내장과 척추에 걸려 더 이상 나가지 못했을 때 아버지는 창대를 힘껏 잡아당겨 기어이 몸을 관통시켰다.
비호는 아버지의 피가 창대를 타고 천천히 흘러 손을 적시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의 피가 뜨겁다. 결코 이런 결과를 원한 것이 아니었건만.
“아무것도 모르고…… 너와 이 세상에 큰 죄를 지었구나…….”
단장(斷腸)의 고통이 극에 달한 것이 분명할 텐데 아버지는 찡그림 한 번 없다.
아버지가 힘겹게 다가오면서 창대는 더욱 깊숙이 아버지의 몸을 파고들었다.
“처음부터…… 그가 말한 운명을 받아들였다면…… 우리 호에게 이런 고통을 안겨 주지 않았을 걸…….”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다가오는 아버지의 얼굴에 회한이 가득했다.
“이 애비가 원망스러우냐?”
“…….”
“그럼 무섭더냐?”
“…….”
“이기적인 애비라고 욕해도 좋다. 잔혹하다고 외면해도 좋다. 하지만…… 온 세상이 다 썩어 뒤집어진다 해도 너만 무사할 수 있다면……. 이 애비는 또다시 지옥의 마귀가 되어도 좋구나…….”
아버지의 큰 손이 비호의 얼굴을 가볍게 보듬는다.
“사랑하는 내 아들 호. 이 못나 비틀어진 애비의 잘못으로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해하고 너마저 무정한 세상에 홀로 남겨지게 했구나……. 이 죄를 어찌 용서받을꼬…… 우리 호 불쌍해서 어찌할꼬…… 불쌍해서 어찌해…….”
이미 초점이 풀려 멍한 표정으로 나무토막처럼 굳어 버린 비호를 아버지는 터질 듯 꽉 안았다. 소리 죽여 흐느끼는 아버지의 눈물이 비호의 뺨에 떨어져 흘러내렸다.
“아버지.”
“응?”
“원망하지 않아요.”
“그래…….”
“기다려 주실 거죠?”
아버지가 미소 짓는 것이 느껴진다.
“그때가 되면 제가 아버지 업고 달릴게요. 아버지가 늘 말했던 바람이 되어서요.”
“기대하마.”
“사랑해요…….”
주변에서 악을 쓰며 달려오는 진동이 일었다.
“애비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그 말을 끝으로 아버지의 눈빛이 독해졌다. 강하게 비호를 밀쳐 내면서 아버지가 외쳤다.
“이노오오옴!!! 네놈이 나를 죽이는구나아아아!!! 원통하다!!!”
누군가 깃발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순간 주변 정경이 확 드러나면서 경악에 질린 병사들과 멀리서 굳은 채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역도들이 언뜻 보인다.
뒷덜미를 강하게 채 가는 손길에 저도 모르게 눌린 신음이 튀어나온다. 멀어지는 아버지의 얼굴을 더 담으려는 듯 비호의 부릅떠진 눈은 한 치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사.랑.한.다.내.아.들.’

비호는 보일 듯 말 듯 벙긋거리는 아버지의 입 모양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이 피보라를 뿌리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미 마음을 굳혔건만 참을 수 없이 서글퍼지는 감정에 북받친 비호의 입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으……으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변성도 오지 않은 작고 연약한 소년이 질러 내는, 소녀의 그것보다 훨씬 더 찢어질 듯 끓어오르는 비명에 병사들이 들고 있는 병기가 가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비호는 몸의 각 뼈마디 끝에서 처음 느껴 보는 지독한 통증을 느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그곳에 숨어 있었던 것처럼 뜨거운 불덩어리가 뼈와 혈맥을 따라 눈물 한 방울까지 다 태워 버릴 듯 퍼지는 것이 생생하게 잡혀 온다.
우드드득!
다리에서부터 시작된 뼈가 비틀리는 감각이 곧 머리끝에서 터졌다.
그 순간 비호는 환상을 보았다.
지금의 자신보다 훨씬 더 작고 연약해 보이는 아이가 따사로운 햇살 아래 서 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던 아이가 비호를 향해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곧 눈부시게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어 준다.
햇살이 비추는 그림자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미소만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다가온다.
‘인연의 끝…….’
아이를 향해 비호도 같이 웃어 주었다.
귀를 틀어막는 병사마저 나오기 시작할 무렵 비호는 얼굴을 때려오는 강한 충격을 느꼈다.
차가운 피웅덩이로 쓰러지면서 비호는 보았다.
잘린 아버지의 얼굴이 마주 보며 웃고 있었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비호는 아버지의 미소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