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풍신쾌 1권(10화)
2장 비틀린 그러나 가슴 아픈 부정(父情)(4)


뜨거운 태양빛도 서서히 넘어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해를 둘러싼 구름들이 짙게 그림자를 머금는 것이 곧 석양을 품고 달을 맞을 준비를 하는 듯하다.
저 멀리 분지 위편에서 빽빽하던 그림자들의 한 부분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 틈으로 조용히, 아주 느리게 거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정도 시야에 들어왔을 때서야 그것이 사람의 형상임을 알 수 있었다.
타고 있는 말이 위태할 정도로 거대한 몸집을 가진, 그러나 한 치의 흔들림조차 보이지 않는 태산과 같은 존재가 저무는 석양을 등지고 길어지는 그림자를 마주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심장이 질러 대는 울림은 얇은 철판에 소낙비 내리치듯 절정으로 치달았다. 비호는 새어 나오는 신음을 삼키며 찌푸린 두 눈을 감지도 못한 채 한 곳만을 바라보고 있다.
한껏 달궈진 땅이 공기를 일그러뜨리고 서서히 식어 가면서 다가오는 괴인의 형체도 점점 그 모습을 선명하게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호는 보았다.
그곳에는 맨손으로 사람을 찢어 버린다는 공포의 괴물도,
귀신을 부린다는 삼두육비의 아수라도 아닌,
자식 잃은 야수의 심장을 가진 슬픈 얼굴만이 존재했다.

아……버……지.

보고 싶었다.
반가웠다.
울고 싶다.
그리고 저 넓은 품에 달려가 으스러지도록 안기고 싶다.
더 이상 심장을 때리는 고통도 없다. 죽음을 눈앞에 둔 공포도, 불안이 확신이 되는 두려움도 바람에 날려 사라졌다.
오직 아버지의 따뜻한 미소만이, 그 큰 손의 온기만이 비호의 모든 것을 가득 채우고 있음이다.
아버지를 향해 소리치고 싶었으나 무언가가 비호의 정신과 육체를 붙잡고 있다. 무엇이?
아버지는 활의 사정거리 안까지 계속 들어왔다. 잠시 뒤편의 궁수들이 공격 자세를 취했으나 곧 대장군의 지시로 활을 거두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큰소리로 대화가 가능한 거리에 이르러서야 말을 세웠다.
대장군의 명으로 앞에 늘어선 병사들이 양쪽으로 대형을 이동했다. 지금 대장군과 아버지 사이에는 그 무엇도 없다. 그 상태로 둘은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한다.
세 개의 활통 가득 여러 종류의 살을 담고 철궁을 왼손에 다부지게 쥐어 든 아버지의 모습은 병사들의 기를 질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잠시 후 아버지의 목소리가 나직하지만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유감입니다.”
“본관 역시.”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조그맣고 약해서 늘 아비의 걱정을 달고 살던 놈이었다지요.”
마치 남 얘기하듯 고저의 변화가 없는 건조한 말투로 아버지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답니다. 죽어가는 어미의 배를 찢고 나온 놈은 꼭 새끼 원숭이를 연상케 했답니다. 어미가 죽은 줄도 모르고 바득바득 젖을 붙잡고 빨아 대는 꼴이 여간 얄미워 보일 수 없었다는군요.”
비호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내 딸아이도 막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이 손바닥 안에 다 들어갈 정도로 작았다네. 커 가면서 어찌나 말썽을 피워대던지.”
“그렇습니까? 참 행복한 아버지셨군요.”
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지는 환상이 보인다.
“그 아이는 그런 말썽을 피울 만큼 건강하지 못했답니다. 그저 끊어지지 않는 가련한 생을 간신히 붙여 놓은 정도였다지요. 보다 못한 이웃이 나서지 않았다면 하루를 버티지 못했을 거라고 합니다.”
맞다. 그 때문에 아버지가 얼마나 고생했던가.
“아비는 그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답니다. 심지어 나라 법을 어기고 저 먼 고려땅에서 왔다는 상인들에게 오십 년인가 백 년인가 묵었다는 산삼 한 뿌리를 몰래 구해 오기까지 했답니다. 무려 백호 가죽 다섯 필이나 주고서요.”
“그 아이는 행복하겠군. 그런 훌륭한 아비를 두었으니.”
“그랬을까요? 그래도 그 아비는 늘 아이에게 죄스런 마음만을 가지고 살았다고 하더군요.”
‘저 행복했어요. 아버지가 제 곁에 계셔 주셔서 늘 행복했다구요.’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다행인지 더 커 가면서는 아픈 데 없이 잘 자라 주었답니다. 제 딴엔 건강해졌다고 바리바리 뛰어다니는 것이 아비가 봤을 때 참 불안했지만 그때만큼은 아비도 행복을 느꼈다고 합니다. 바보 같이…….”
“어째서 그런가. 자식을 돌보는 아비로서 당연한 것이거늘.”
아버지의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말을 시작한 아버지의 목소리는 그 덩치에 걸맞지 않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아이를 무척이나 사랑했답니다. 자신보다도…… 이 세상 무엇보다도……. 심지어 죽은 아내보다도 더 아이만을 생각했답니다. 예부상서 나으리, 그런 아비의 태도가 옳은 걸까요? 사랑하는 아내를 죽게 만든 아이인데 말입니다.”
“먼저 간 어미도 저승에서 기뻐했을 거네. 두 사람의 소중한 결실을 그토록 아껴 준다니 낳은 어미에게 그보다 더 큰 보답이 어디 있겠나.”
“그 말씀 아비에게 전해 주도록 하지요. 틀림없이 좋아할 겁니다.”
아주 천천히 분지 너머로 해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제 곧 어둠이 퍼질 것이다. 고개를 힘차게 들어 하늘을 한동안 바라보던 아버지는 날카로운 눈으로 대장군을 바라봤다.
“아비는 세상의 한 귀퉁이를 가질 만한 거인이었지만 정말 바보였습니다. 아니, 고지식했고 자만심이 하늘을 찌른 어리석은 자였지요.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을 그 막돼먹은 고집으로 크게 벌려 놓더라 말입니다. 그 아이는…… 이제 열댓 살을 조금 넘은 그 아이는…… 그 바보 놈의 잘못을 대신 지고 먼 곳으로 가 버렸습니다.”
“그곳이 어딘가? 내 그 아이를 찾아 아비에게 데려다 줌세.”
협상의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서일까. 대장군은 급히 대답했다.
순간 아버지의 목소리가 차갑게 갈라졌다. 방금 전까지의 처연한 것과는 전혀 딴판으로.
“데려다 준다고 하셨습니까? 연 나으리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내 이래 봬도 대송의 예부상서일세.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는 아닐지언정 황상의 총애가 두터우니 그분께 말씀드리면 그 아이를 찾아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네.”
“푸아핫하하하하하하!”
쾅! 콰드등!
아버지가 크게 웃음을 터트림과 동시에 하늘이 울어 대기 시작했다.
어둠이 깔리면서 하늘에도 짙은 구름이 드리워졌다. 난데없는 기상 변화에 사람도 놀라고 말들도 놀라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툭. 투둑.
하늘이 아버지의 슬픔에 동조하였는지 어둠 속에 비를 뿌려 준다. 깔린 모양을 보니 쉽게 그칠 것 같지도 않았다. 어느덧 빗줄기는 바로 앞도 손짚고 가야 할 만큼 거세어졌다.
“연 나으리.”
“…….”
“지금 그 부탁은 저 멍청한 황제에게 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순간 번갯불이 악귀와도 같이 변해 버린 아버지의 얼굴을 환하게 비춘다.
“지옥의 염라대왕에게 말해야 할 것이오오오!!!!”
쾅!
아버지의 절규를 거들 듯 무시무시한 굉음이 하늘에서 몰아쳤다.
“그 아이는! 내 하나뿐인 아들은! 이미 세상에 없소! 바로 당신이 거둔 그곳에서 더러운 병으로 내 품을 떠났소! 아시겠소? 염라대왕만이 그 아이를 내게 돌려줄 수 있단 말이오!”
말해야 한다. 지금 말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는다. 꺼윽거리는 쇳소리만이 목에서 맴돌 뿐 소리 질러 아버지를 부를 수가 없다.
세찬 빗소리에 병사들의 질려 버린 목소리도 묻혀 버린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아버지의 목소리만은 확실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이제 내 아들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당신과 이들에게 묻겠소. 그리고 곧 이 더럽고 추악한 세상 모두에게 아들의 죽음을 보상받을 것이오!”
일그러진 얼굴로 마지막 말을 외친 아버지는 곧 말을 돌려 달려 나갔다.
‘가지 마요…… 아버지! 가지 마세요…… 저…… 여기 있다구요!’
“어……어버…….”
터지지 않는 말을 입안으로 씹으며 비호가 한 걸음 비틀거렸다.
“야, 꼬맹이 너 왜 그래? 미쳤니?”
뒤에서 두삼이 비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어어어……어버어……지…… 어…….”
눈물이 비와 섞여 온 얼굴에 흘러내렸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큰 덩치의 두삼이 오히려 비호에게 끌려가고 있다.
그때 멀리 갈 것 같았던 아버지가 갑자기 말을 돌려 정지했다.
“너희들에게 마지막으로 이 이름만은 꼭 들려주겠다!”
병사들을 주욱 돌아본 후 아버지가 외쳤다.
“저승에 가더라도 절대로 잊지마라! 내 아들, 이 세상을 떠받칠 ‘인연의 끝’이 되었어야 할 그 아이의 이름……은……!!!!!……???”
온 천지를 환하게 뒤덮은 거대한 불벼락 아래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보았다.
짧지 않았던 날들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그리워하던 두 사람이 만났다.
한 번 이어진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모르고 금방이라도 서로를 부르며 달려갈 것만 같았다.
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아버지의 웃음이 분명히 느껴진다.
마음으로 전해지는 대화라는 것이 있다고 누군가 말했던가?

‘보고 싶었어요.’
‘아픈 데는 없고?’
‘누구 아들인데요.’
‘그렇네. 천하의 내 아들이 약골일 리가 없지, 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아들아.’
‘네?’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