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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쾌 1권(9화)
2장 비틀린 그러나 가슴 아픈 부정(父情)(3)
푸학!
당황한 역도 놈의 칼놀림이 부족했던 것일까. 한번에 끊어 내지 못해 반 이상 갈라진 목에서 피분수가 높이 솟았다. 덜렁거리는 목을 단 채로 사지를 펄떡거리며 피를 쏟아 내던 백초는 얼마 안 가 움직임을 멈췄다.
숨이 막히도록 끔직한 광경에 양측은 다들 할 말을 잊고 한참을 침묵하고 있었다.
병사들의 숨소리가 서서히 거칠어졌다. 진정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분노는 곧 전의(戰意)가 되어 소리 없이 번져 갔다.
그들의 장렬한 죽음은 패배감에 젖어든 삼천을 복수심에 불타는 정예병으로 탈바꿈시켰다. 이것을 기대한 것일까?
아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십 년 동안 전장에서 보아 온 수많은 죽음이 그들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게 했는지 스스로 너무 잘 알았을 테니까.
대장군 역시 처음부터 그것을 느꼈을 것이다, 저들이 죽고자 함을. 대장군의 물기 가득한 외침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병사들의 눈빛은 당장에라도 진군 명령을 내려 달라고 재촉하는 듯했다. 오히려 장수들이 흥분한 군사들을 진정시킬 정도였으니.
두 눈을 질끈 감고 그들의 처절한 죽음을 애써 외면하려 했던 비호는 실눈을 뜨고 다시금 그들의 주검을 바라보았다.
머리를 쓰다듬던 커다란 손의 주인도, 수고했다며 전장에서는 보기 힘든 따뜻한 차를 끓여 주던 사투리의 주인공도, 밤에 몰래 데리고 나가 술이라는 것을 처음 먹게 해 주었던 호탕한 웃음을 가진 사내도 저기 누워 있었다.
뿌득!
짧게 이를 간 비호는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역도를 노려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터져서 서두른 나머지 코 아래쪽을 가린 천이 벗겨진 것도 모르는 모양이다.
그러나…….
두 눈에 가득 들어온 역도의 얼굴을 본 비호는 누군가 머리를 세차게 쥐고 흔드는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
“야……묘(夜猫) 아저씨?”
‘왜……?’
생긴 모양이 올빼미를 닮아 늘 ‘야묘’라며 놀렸었다.
못생긴 얼굴에 누가 시집오겠느냐며 술만 먹으면 낳아 준 부모 욕하며 꺼이꺼이 우는 것이 참 서럽게 보여 어린 마음에도 측은한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그 큰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백발백중의 실력을 뽐낼 때는 비호의 작고 동그랗게 떠진 눈이 선망으로 반짝이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그는 아버지 밑에서 오십 엽사들을 나누어 지휘하는 다섯 명의 상급자들 중 하나였었다.
적어도 비호가 집을 떠나기 전까지는.
‘왜……? 왜 당신이…… 야묘 아저씨가 거기 있습니까? 왜요?!’
비호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개모가지 비틀 듯 꺽꺽 하는 소리가 목구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것이 실성한 사람 같았다.
“너 갑자기 돌았냐? 놀란 노루 새끼마냥 왜 정신을 못 차리고 이래?”
“이 어린거이 충격을 크게 받았나 보이.”
옆에서 병사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비호의 귀에 드문드문 들려왔다.
조금 정신이 들자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정리되기 시작했다.
저 반란군들이 보여 준 기이한 행태들.
고작 시골에서 벌어진 민란이라 폄하하기에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파괴적인 행보.
일개 농민들이라면 구사하기 어려운 다양한 전술들.
그리고 사냥감의 숨통을 잡아채는 듯 침착하고도 절정에 이른 활솜씨.
야묘라면, 아니, 적어도 아버지의 엽사들 중 십 단위만 끼어 있어도 충분히 가능한 일들이다.
하지만 한 가지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가장 결정적인 그 무엇이 이상하리만치 정리가 안 된다.
비호의 심장이, 비호의 머리 한구석이 그것을 애써 부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비호의 눈이 아소를 향했다.
아소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비호의 놀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 듯 치켜진 눈에 핏발이 서 있고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벌어진 입으로 흘러들어 간다.
비호는 깨달았다. 아소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야묘가 시야에 나타남과 동시에 눈치챘을 것이다. 둘이 꽤 친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비호가 추리한 것들을 마찬가지로 떠올렸으리라.
더 나아가서…… 지금 비호의 사고를 가로막고 있는 그 무엇을 아소는 생각해 냈을 지도 모른다.
퉁!
중군에서 크게 북소리가 터져 나왔다.
쿵! 쿵! 쿵!
모든 병사들이 소지한 병장기를 땅에 찧거나 방패에 부딪쳐 위용을 과시했다. 대장군이 북쪽에서 거란과 싸움에 앞서 항상 취했던 것이라고 들었다.
일정한 박자로 울리는 타격음은 아군에게는 적당한 긴장과 심리적인 안정을, 적군에게는 은근한 불안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호는 멀리 달아나 있던 삶의 의지가 돌아옴을 느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이기고 살아남아서 야묘나 혹시 저곳에 있을지 모를 다른 엽사들을 만나야 한다.
지금 기세라면 만 명의 적이라도 상대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전장의 귀신 연천평이라면 분명 이 상황을 극복할 기가 막힌 작전을 생각해 낼 것이다. 비호는 지금 거기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이제 남은 것은 피와 살의 향연뿐이다.
피위이이이이이이∼ 필리리리이이히히히히∼
귀신이 울부짖는 듯 공기를 갈라 오는, 하지만 비호에겐 매우 익숙한 명적시(鳴鏑矢)의 울림이 토벌군의 격타음을 흐트러뜨리며 저 멀리서부터 날아들었다.
슈아아악!
텅!
사방이 순식간에 고요로 물들었다.
삼천의 눈이 일제히 중군으로 향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짧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수레에 올라 대장군의 명을 깃발로 전달하는 장수가 기묘한 자세로 흔들흔들거리고 있었다.
머리를 관통한 화살은 절반이 넘게 뒤통수를 비집고 나온 채 뇌수를 뚝뚝 흘리고 있었고 엄청난 충격으로 목이 뒤로 완전히 꺾여 등짝에 턱턱 부딪힌다. 멍한 두 눈으로 대장군을 바라보는 꼴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즉사다.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날아온 화살이 이 정도의 파괴력을 보인다는 것은 일반적인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비호는 알고 있다.
불가능을 모르는 단 한 사람을…….
“귀궁(鬼弓)…….”
누군가의 중얼거림은 곧 전군으로 확산되었다. 작은 웅성임은 곧 소란으로 변했고 장수들은 병사들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악을 질러 댔다.
이번 민란에서 괴력의 미치광이와 더불어 귀궁의 존재는 병사들에게 인간의 힘으로 대적할 수 없는 미지(未知)의 공포로 각인된 지 오래였다.
어떤 이는 귀궁이 억울하게 죽은 장수의 귀신이라고도 했고 또 다른 이는 팔이 여섯 개 달린 아수라(阿修羅)의 화신이라고도 했다.
모든 것이 병사들의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것이나, 배운 바 얕은 이들에게는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일종의 민간괴담(民間怪談)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다년간 집중 훈련을 쌓은 궁병이 저격 가능한 거리라는 게 있다.
그것을 몇 곱절 상회하는 까마득한 곳에서 전투의 중심이 되는 장수의 머리를 너끈하게 관통해 버리는 신기(神技).
이것으로 병사들의 미신은 이제 확신이 되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해 줘. 제발!’
비호는 빌고 빌고 또 빌었다. 이 무서운 생각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기를, 차라리 귀궁이란 자가 진짜 귀신이고 아버지의 엽사들이 귀신에 홀린 것이기를 기원하고 또 기원했다.
피유우우우우……우……우…….
또다시 적시(鏑矢)가 울었다. 이번엔 그 귀곡성이 점점 멀어지는 것이 병사들의 불안을 더욱 부채질했다.
비호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높은 하늘을 향했다. 역시나 아까의 완만한 곡사와는 차원이 다르다. 화살은 태양을 잡아먹을 듯 끝없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의 점이 되어 그 정점에 도달한 뒤 급격한 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퓨아아아아하하핫핫하하!
악마의 울음소리가 저러할까. 엄청난 속도로 내리꽂히는 화살의 너털웃음은 모두에게 극한의 공포를 안겨 주고 있다.
“끼야아아아아악!!!”
두려움의 한계를 넘어서 버린 한 병사가 괴성을 질러 댔다. 주변의 병사들이 붙잡아 말려도 혼이 나간 듯 비명은 그치지 않았다.
쾅!
잠시 후 펼쳐진 광경은 처참함의 극치를 보여 줬다.
대장군의 옆에서 위풍을 자랑하던 호위대 무장 하나가 투구 채로 정수리를 꿰뚫려 타고 있던 말까지 관통당해 땅에 박혀 버렸다.
엄청난 압력에 머리통의 절반이나 몸 안으로 밀려들어 가 번쩍 뜬 두 눈이 목가리개 어림에서 부들거리고 있었고 하반신은 아예 형체를 잃고 창자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 광경에 주변의 병사들 몇은 넋을 놓고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지만 대장군은 말없이 죽은 무장을 바라볼 뿐이다.
대장군을 향한 귀궁의 명백한 경고였다.
“끄아아아! 살려 줘어! 귀신이다, 귀신!”
비명을 질러 대던 병사가 아예 극을 휘두르는 지경에 이르자 조장 하나가 날렵하게 다가가 목을 쳐 날려 버린다. 아소였다.
“다들 대형 유지하고 전방 주시해!”
동료의 숨골을 한 방에 끊어 버린 비정함에 치를 떨 만도 하지만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비호와 아소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 순간 비호는 아소의 눈이 말하는 바를 느낄 수 있었다.
받아들이라고. 앞으로 어떠한 저주스러운 일이 눈앞에 펼쳐지더라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아소의 눈과 자신의 심장이 전해 주는 의미를 외면한 비호는 입술을 깨물며 역도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두삼의 이가 사정없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왼쪽의 양송은 이미 오줌을 한 바가지 흘린 상태였고 오른쪽에 있는 종찬(鍾粲)은 눈물까지 글썽인다.
달아오른 토벌군의 기세를 단 두 개의 화살로 잠재워 버린 귀궁은 여전히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게다가 생으로 사람의 목을 척추까지 뽑아내 버렸다는 괴물은 존재감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병사들은 호랑이를 마주한 토끼처럼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채 다가올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그렇게 양군은 한동안 소강상태를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