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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쾌 1권(8화)
2장 비틀린 그러나 가슴 아픈 부정(父情)(2)


뿌우우우!
어디선가 길게 나팔 소리가 병사들의 귀를 찔렀다. 그리고 땅을 울리는 발소리.
“허!”
탄식이 절로 나왔다. 분지에 접하는 능선을 따라 세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의 그림자가 빽빽하게 들어서기 시작했다. 보이는 자들만 만(萬) 단위가 넘어간다.
웅성거리던 병사들도 이제는 거의 생을 포기한 듯 다들 말이 없다.
‘아버지…… 죄송해요. 저 먼저 가야 할 거 같네요.’
진동하는 심장을 살짝 어루만지며 비호는 먼 곳에 있을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이봐, 꼬맹이.”
비호의 뒤에서 두삼이 속삭였다.
“미안했다.”
“…….”
이 인간이 갑자기 미쳤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 떠그랄! 미안하다고오.”
피식.
비호의 입가에 어이없는 웃음이 걸렸다. 탁 아저씨가 그랬던가?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착해진다고.
“니가 뭔 잘못이 있었겠냐. 다 내가 지랄맞아서 그런 거지. 니네 그 아소 그눔아가 말한 것처럼 미친개한테 물린 셈 쳐.”
두삼에 대한 두려움은 이미 잊었다. 죽는 마당에 무엇이 걱정될까.
“나 원래 짐승 잡는 백정 출신이야. 재수 없게 지현 딸래미가 내 잡은 고기 처먹고 뒈져서리 옥살이 하다가 여기까지 와 버렸지. 씨앙꺼! 내 인생은 첨부터 요랬어.”
“안 됐군요.”
“그래. 내 어무이만 불쌍하지 뭐. 암튼 나중에 너 더 자라면 제대로 사과하고 술 한잔 시원하게 빨아 보려 했는데 하필 요래되서 좀 그렇네. 씨불꺼…… 아, 근데 오평 이 잡것은 아까부터 왜 안 보이지? 혼자 살겠다고 어디 처숨어 뿌린 거 아녀?”
오평을 떠올리자 위진이라는 사내가 생각났다.
‘인연이라…… 우리 인연은 거기가 끝이었나 보네요.’
“울 집은 형호남로 영주(永州)…….”
뜬금없이 두삼은 자신이 살았던 곳을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두삼! 주둥아리 닥치고 대열 맞춰!”
고단이 신경질적으로 이를 드러낸다.
침을 땅바닥에 거칠게 내뱉은 두삼은 비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좀따 쌈 나믄 내가 너 최대한 보호해 줄게. 적어도 너 맞을 칼침 한두 방은 내 몸으로 먹어 버릴 거여.”
살짝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디까지가 진실일지는 모르겠지만.
“대신 하나만 약속해 주라. 나 뒤지고 혹시라도 너 살아남으믄…… 투항이라도 해서 그렇게 된다고 하면 난중에 울 집 함만 가. 가서 엄니한테 나 열심히 잘 살다가 갔다고 전해 주라.”
“그러죠.”
“고맙다. 덕분에 맘이 좀 편해졌어. 그래도 사는 기 훨 낫지 암. 이런 개씨드랄.”
지푸라기를 잡아도 한참 잘못 잡았다는 생각이 든다. 비호 역시 삶의 의지를 놓아 버렸건만.
잠시 후 역도들 쪽에서 먼지 구름이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한 놈이 뭔가를 뒤에 묶은 채 말을 달려오는 것이 눈에 잡혔다.
화살의 유효 살상 거리가 못 미치는 곳에 정지한 녀석의 뒤에 그들이 줄줄이 묶여 있었다.
“정찰대…….”
비호의 눈에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놈이 타고 온 말 안장 주변으로 낯익은 얼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잘린 목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었고 뒤에 늘어져 비틀거리는 다섯 대원들도 핏덩어리로 떡칠한 것이 사람의 몰골이 아니다.
반쯤 얼굴을 가리고 있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큰 눈을 가진 역도놈이 외쳤다.
“이보시오오오! 연 대장군 나으리! 이거 보이시오?”
병사들의 시선이 흘끔흘끔 중군을 향한다. 비호의 눈에 굳은 표정의 대장군이 들어왔다. 두 볼에 경련을 일으키는 모습이 뒤통수를 크게 맞은 듯 억울한 눈치다.
“천하를 발아래 두던 지략가시며, 거란 놈들이 ‘전장의 귀신’이라 부르던 대장군께서 무지랭이 촌것들에게 크게 한 방 잡수시니 기분이 어떻소! 본인이라면 부끄러워 당장 칼을 물고 엎어지겠소이다!”
멀리서 역도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여섯 번의 습격, 포로, 계속되는 후퇴, 떠난 자리마다 남아 있던 패배의 흔적들. 이것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어떤 그림이 그려졌다. 그야말로 완벽한 기만 전술이었다.
“일이 이래된 거 어쩌겠소이까. 항상 뜻대로 되면 그게 사람이오? 그러니 너무 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구랴! 껄껄껄껄!”
어딘지 모르게 말투와 목소리가 낯설지 않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비호의 심장이 전장의 공포와는 상관없이 찌르르 울리기 시작했다.
“이러는 거 나라고 좋겠소? 거기 줄 지어 선 병졸들도 다 따지고 보면 우리와 별다를 게 뭐 있소이까. 똑같이 썩은 땅이나 파 먹던 이 나라의 백성들 아니오?”
픽 쓰러지는 정찰대원 하나를 잠시 무심하게 바라보던 놈이 다시 말했다.
“혹시 아오? 거기 있는 병졸들 중에 내 사돈의 팔촌이 빌어먹고 살던 땅 주인 놈 뒤 닦아 주던 불쌍한 노비 아들이라도 있을지? 그런 꼬인 인생이 여기서 요래 허무하게 죽는다면 그 얼마나 안타깝소?”
병사들 사이에 작은 소요가 일었다. 그 기미를 눈치챈 조장 몇몇이 소리 낮춰 으르렁대는 것이 들려온다.
“내 두말 안 하리다! 다들 무기 내려놓고 투항하시오! 그 가련한 목숨들 내 손모가지를 걸고 보장하리다! 지금 투항하면 아무도 죽지 않소!”
불과 일각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어 버렸다. 들려준 말 그대로 돌려받고 있는 웃지 못할 상황으로.
비호의 눈에 점점 병사들의 동요가 커져 가는 것이 보였다. 자칫하면 무기를 거꾸로 들고 장수들을 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언뜻 든다.
“무기와 말! 갑옷 전부! 그리고 식량은 일부만 떼 놓고 가시오! 우리와 함께하고자 하는 자들 역시 남으시오. 그 외에는 겨드랑이 털 하나 건드리지 않고 보내드리리다! 다른 관리였다면 어림도 없소. 대장군 나으리! 우리의 호의를 받으시려오?”
병사들의 시선이 대장군을 향했다. 다들 처음의 패기는 바지춤 속 깊이 묻어 둔 채 간절한 눈길로 대장군을 바라본다. 개중(個中)에는 원망 섞인 눈초리를 보내는 자들도 있다.
비호는 아소를 바라보았다.
아소의 표정은 놀라움, 충격과 불신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는 것이 도저히 속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활을 잡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모양새가 영 불안하다.
잠시 말없이 토벌군을 응시하던 역도 놈은 정찰대원들이 엮여 있는 줄을 잡아당겼다. 제일 앞에서 비틀대던 대원을 따라 다른 대원들도 힘없이 까딱거린다.
역도놈의 입이 몇 번 벙긋하더니, 잠시 후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간 대원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팔조장 왕구였다.
“모든 병사들은 진정하시오!!!”
평소의 느릿하고 코 막힌 소리가 아닌 또렷하고 우렁찬 목소리였다. 비호의 짧은 놀람을 뒤로하고 왕구는 말을 계속했다.
“대장군 어른! 저 팔조장 왕구입니다! 천하무적 우리 정찰대 늑대들, 십 년을 훌쩍 넘기면서 오백이 넘던 망할 놈들 다 죽고 이제는 저랑 칠보, 구준이, 옥춘이, 백초, 그리고 그쪽에 몇몇만 남았습니다요. 그동안 죽어 간 놈들 하나하나 얼굴이랑 이름 다 기억하시지요?”
왕구의 목소리가 떨린다. 아마도 대장군 역시 오장육부를 후벼 파는 떨림에 몸부림 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선 저희 절부터 받으십시오!”
말을 마친 왕구가 쓰러질 듯 몸을 조아린다. 그 뒤를 따라 남은 네 명도 몸을 숙이며 끙끙거렸다. 그 모양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던 역도 놈은 잠시 고개를 돌려 주었다.
“장군께서 늘 말씀하셨지요. 군인은 명예를 빼면 시체라고요. 백성들을 지키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곧 군인의 명예라고 귀가 닳아 문드러지도록 강조하셨지요. 그렇지요?”
“오냐! 그것이 틀림없다! 내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있다니 너희가 바로 내 지기지우(知己之友)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대장군이 끝내 울음 섞인 외침을 토해 냈다.
먼 거리지만 비호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왕구의 젖은 눈가에 그려지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병사들은 들으시오!”
잠시 숨을 고른 왕구가 이번엔 병사들에게 외쳤다.
“억지로 끌려왔다고 무슨 명예냐 하겠지만 그렇지 않소! 한 번 그 길에 들어섰으면 그 삶에 치열해야 하오! 지금 그대들은 군인이오. 대송의 명예로운 군인이란 말이오!”
말하는 낌새가 영 이상한지 역도 놈이 슬쩍 왕구를 돌아봤다.
“지금 포기하면 살 수는 있소. 재수가 좋다면 늙어서 병들어 썩어 나자빠질 때까지 살 수도 있을 게요. 대신! 더러운 기억과 모두의 손가락질에 평생을 시달릴지도 모르오. 그리고 만약에 저 반란자들과 함께한다면?”
역도 놈의 손이 슬쩍 칼자루에 닿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바로 칼질을 하지 않는 것이 끝까지 들어 볼 심산인 듯했다.
“그 지저분한 이름을 영원히 남기고 가게 될 것이오. 반역자로서 후세에 기억될 거라 그거요. 하지만!”
왕구의 외침이 더욱 커졌다.
“여기서 싸우다 명예롭게 죽는다면 그대들은 영원히 남소! 반역자들과 칼을 맞대어 싸운 명예로운 대송의 전사들로 영원히 기억될 거라 말이오!”
역도는 칼자루에서 손을 놓고 약간은 여유로운 자세로 몸을 풀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 되길 내심 기다렸다는 투였다.
이미 명분은 주어졌다. 망설이고 원망하던 병사들의 눈에 독기와 투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비호는 처절한 왕구의 외침을 들으며 쏟아져 내리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아 냈다.
‘형님들 저승에서 봬요.’
왕구의 말이 끝났다고 판단했는지 역도 놈이 느릿하게 말을 몰고 다가갔다. 이미 칼을 뽑은 것이 남은 자들의 목을 끊어 내려는 심산이다.
잠시 먼 하늘을 바라보던 왕구가 마지막으로 외쳤다.
“먼저 갑니다!”
순간 왕구는 남은 하나의 손을 들어 자신의 목줄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우드드득!
울대가 찢어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를 악물고 거칠게 목줄을 잡아 뜯어 버린 왕구는 분수처럼 터지는 핏줄기를 바라보며 입을 몇 번 뻐금거리더니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와 동시에 남은 정찰대원들도 자결을 시도했다.
칠보와 구준은 혀를 씹어 뱉었고 옥춘은 상처 나서 갈라진 배에 미리 손을 꽂아 넣고 있다가 내장을 주욱 헤집고 심장을 잡아 쥐어짜 냈다.
다만 상처가 심해 쓰러져 꿈틀대던 백초만 힘이 다했는지 바닥에 머리를 몇 번 찧다가 서둘러 달려온 역도의 칼에 목이 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