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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쾌 1권(7화)
1장 모든 것의 시작(7)


비호는 덜덜 떨리는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이런 혐오스러운 짓을 숨쉬기 보다 쉬운 듯 담담하게 설명하는 사내가 지옥의 악귀만큼이나 잔혹한 인물임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저 민란을 주도한 미치광이 괴물보다 더 무서운 인물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까지 부딪힐 정도로 공포감이 밀려왔다.
“어, 어떻게…… 그토록 잔인할 수가 있습니까? 사람을 죽이는 것이 그렇게 쉽나요?”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말을 뱉은 비호를 이상한 듯 바라보며 사내가 말했다.
“살아 있다는 자체가 죄악인 인간들이네. 세상을 구원해야 할 이 몸이 이 정도 수고한 것은 당연한 일이네만? 게다가 이놈이 자네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너무 쉽게 보내버린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네. 꼬마 친구, 이런 놈을 그냥 두면 나중에 자네가 꽤 곤란하게 될 수도 있어.”
“크으…… 당, 당신은 미쳤어요. 무림인(武林人)? 맞아요. 무림인이 틀림없어요. 사람 목숨을 발톱의 때만도 못하게 여긴다는 그 무림인!”
“흠. 무림인보다는 그냥 종교인(宗敎人)이라고 해 주게. 그런 정의도 없이 설쳐 대는 인간들과 비교되기는 싫구만.”
“세상에 어떤 종교가 살인을 가르친답니까? 그런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오! 마교(魔敎)요, 마교!”
거칠게 항의하는 비호를 보며 사내는 잔잔한 미소를 보인다.
“꼬마 친구. 나 역시 세상 만물을 사랑하라 배워 왔고 또 실천하려 노력해 왔네. 하지만 그 사랑도 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에게만 주어져야 할 소중한 것이야. 그러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순간 꼬마는 어른이 되겠지.”
여전히 식식거리는 비호를 보며 사내는 할 말이 더 남은 듯 입을 열었다.
“뭐, 아무튼 그 다음은 보시는 바와 같아. 여기까지 자네들과 똑같이 걷고, 쉬고, 먹고, 마시고. 다만 조금 곤란했던 건…….”
사내는 손가락으로 얼굴을 톡톡 치면서 말했다.
“내 가죽이 아니라서 땀이 나지 않는다는 거? 어쩌다 눈치 빠른 병사라도 만나면 이상하게 여길 게 아닌가. 그래서 틈틈이 물을 좀 발라 줘야 했지. 아! 자네한테 물 전부를 달라고 한 것도 그래서야. 그것 때문에 산도적 같은 놈한테 자네가 맞은 건 진심으로 미안하구먼.”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시렵니까? 같이 싸워 주기라도 하실 건가요?”
“아니, 떠나야지.”
사내는 단호하게 말했다. 더 이상 이곳에 아무 미련도 없는 듯 보인다.
“저 불쌍한 존재들과 마주한다는 것이 꺼림칙하네. 그 반대일 수도 있지만. 자네들이나 대장군이나 뭔가 모르는 게 있어. 그것이 순리라면 그냥 모르고 있는 것이 맞는 이치일 것이고.”
사내의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곱씹어 보던 비호는 문득 무언가 크게 이질적인 것을 느꼈다. 피부를 저릿하게 하는 위화감에 주변을 둘러보던 비호는 경악에 사로잡혔다.
“사람들이…… 어째서 움직이지 않는 거죠? 함성도 들리지 않고요.”
마치 세상이 정지한 듯 모든 것들이 멈추어 있었다. 극을 들고 환호하는 병사도, 방패를 내려찍던 병사도, 심지어 말의 입에 고여 떨어지던 침마저도 그대로 떠 있었다.
“이제 눈치챘나? 생각보다는 감이 좀 둔한 친구로군. 내 잠깐 재주를 부려 봤네. 물론 자네 머릿속에만.”
“그럼 지금까지 대화한 게 전부?”
“그래 자네와 나 둘만의 세상인 셈이지. 실제로 내가 자네와 말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시간은 전혀 흐르지 않았다네. 생각의 힘이라는 거 의외로 어마어마하거든.”
“어째서 저에게 이런 것들을 보여 주십니까?”
“내 주의가 조금 흐트러졌다고는 하나 나를 인지한 꼬마 친구의 놀라운 감각에 대한 선물이랄까? 뭐, 한 이 년 동안 입을 닫고 살아서인지 좀 근질근질하기도 했었고 말이야.”
“그것만으론 설명이 안 됩니다. 그쪽은 마음만 먹으면 손가락 하나로도 저를 해치울 수도 있을 텐데요.”
잠시 비호를 그윽하게 바라보던 사내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글쎄…… 인연(因緣)이란 게 있다고 하더군. 날 가르쳐 주신 분께서 말이야. 신(神)만을 섬기고, 신에 가장 가까이 있다는 교사(敎師)라는 분이 어느 날 문득 말씀하셨지. 인연에 대해서.”
그리운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사내의 목소리는 아련하기만 했다.
“모든 것은 신의 섭리라고만 알고 있는 우리에게 ‘인연’이란 것은 그저 복잡한 인과의 법칙을 설명하는 수많은 단어 중 하나일 뿐이라네. 결국은 신의 계획이고 신의 뜻이란 거지. 하지만 말일세. 인연이라는 것을 가장 부정해야 할 분께서 인연을 말씀하시더라 이거네.”
한 번도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비호는 사내의 말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비호를 바라보며 약간 짓궂은 표정으로 찡긋 웃어 보이며 사내가 간단히 말했다.
“아무튼 그런 게 있다구. 신의 섭리와는 상관없이 이 가슴으로 느껴지는 그런 것. 나 역시 그런 인연을 믿지는 않았네만 오늘 어린 친구를 보니 문득 그럴 수도 있겠다 싶더군. 그래서 계획에도 없는 말이 좀 많았다네.”
사내의 몸이 점점 흐려진다. 말한 것과 같이 이제 떠나려는 듯싶다.
흐려지는 몸으로 병사들 사이를 유영하듯 지나가던 사내가 잠시 멈추었다. 고개를 살짝 돌린 사내의 옆얼굴은 더 이상 오평의 그것이 아닌 듯 보였다. 꽤 준수해 보인다고 비호가 생각함과 동시에 사내가 말했다.
“위진(衛陳).”
“……?”
“내 이름이야. 집에 가면 자네보다 한두 살 정도 어린 동생도 있다네.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이지. 자네가 생각하는 별종은 아니란 말씀.”
위진이라는 사내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간다. 마지막으로 들리는 위진의 말은 비호의 가슴속 깊이 남았다.

“언젠가 다시 볼 수도 있겠지……. ‘인연’이란 게 정말 있다면 말이야…….”


2장 비틀린 그러나 가슴 아픈 부정(父情)(1)


척! 척! 척!
진군하는 병사들의 발소리가 땅을 울렸다.
비호는 조금 전의 기이한 사건을 곧 잊고 지휘관들의 구령에 맞추어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생각해 보면 한순간의 꿈이었을지도 모르는 말도 안 되는 현상을 오래 기억하고 있기에는 당장 앞에 닥친 전투에 대한 불안이 더 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지이이이!”
군진을 이끌던 장수의 고함 소리가 협곡에 반사되어 울린다.
앞에 펼쳐진 작은 분지에는 반란자들이 버리고 간 것으로 보이는 각종 옷가지며 병장기가 어지럽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서둘러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아직까지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 올리는 죽 몇 그릇과 타다 남은 나뭇가지들도 보였다.
대장군의 중군(中軍) 쪽에서 전진을 명하는 깃발이 힘차게 펄럭이자 삼천의 군세는 다시금 진군을 시작했다.
협곡 양쪽은 이미 정찰대의 손을 거친 탓인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조금만 더 가면 패잔한 역도들이 몰려 있다는 거대한 분지가 나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어떻게든 결말이 지어질 터, 비호의 긴장은 고조되고 있었다.
분지에 다가갈수록 지휘관들의 고함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구십육조 좌로 이동!”
“백팔조, 백구조 우로 이동 후 대기하라!”
“삼십육조 열 바꿔 대기!”
이때를 위한 지옥 훈련이었던가. 병사들의 움직임은 어떠한 작은 혼란도 없는 질서 그 자체다.
“십육조, 십칠조, 십팔조는 단방대형으로 변경하고 삽십 보 전지이인!”
비호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한 개 진은 보통 키 큰 병사가 방패와 장병기를 든 채로 외곽에 위치하고 안으로 갈수록 키 작은 병사들이 창극을 세우고 들어선다.
적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큰 병사들 틈으로 내지르는 장병기의 효율성이 높기에 연 장군이 즐겨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단방대형으로 변경하게 되면 중앙에 작은 병사들이 창극과 방패를 들고 맨 앞 열로 이동하게 된다.
비호는 아소 쪽을 돌아봤다. 아소 역시 갑작스런 대형의 변화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표정으로 아연해한다.
이 상태라면 전체 군진의 정중앙에 위치한 십칠조, 즉 비호의 분대가 최전선으로 빠져나오며 키 작은 비호는 그 대열의 최전방에 설 것이 틀림없다.
다시 말해 이변이 없는 한 전투의 제일선에 서게 된다는 말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비호에게 엄습한 가운데 전 병력이 분지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전군 정지 후 그대로 대기!”
척!
협곡을 울리던 발소리가 일시에 멎었다.
휘이이이∼
메마른 바람이 뿌연 흙먼지를 날린다. 저 멀리 일단의 사람들이 몸을 숙인 채 꾸물꾸물 움직이는 것이 그 수가 천에 못 미친 듯 보인다.
옆에서 같은 군막 동기인 양송(楊淞)이 낮게 중얼거렸다.
“우리 살았구마…… 저 정도면 싸울 필요도 없겄어.”
병사들 사이에 긴장이 풀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비호 역시 안도감에 작은 한숨이 나온다.
다그닥, 다그닥!
백기(白旗)를 질끈 동여맨 극을 높이 세우고 한 장수가 말을 달려 나갔다.
“역적들은 들어라!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너희 역적들을 토벌하고자 온 대송 예부상서(禮部尙書) 연천평 대장군의 전언을 알린다!”
꿈틀대던 역도들의 움직임이 잠시 부산스러워지는 것이 보인다.
“투항하는 자들은 각자의 죄과에 따라 공정하게 처벌받을 것이고 저항하는 자들은 모두 참수하여 만백성의 본보기로 삼을 것이니 속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라! 우리 선발대 삼천 뒤에는 수만의 인마가 짓쳐 내려오고 있도다! 너희 역도들의 살 길은 투항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상대에게 병력을 과장하여 싸울 의지를 잃게 만드는 것은 전략의 기본이다.
빠듯한 삼천의 군세를 순식간에 수만으로 포장하는 모습에 잠시 실소를 짓던 비호는 왠지 모를 불쾌한 감정에 웃음을 지웠다.
그리고 그것의 원인을 깨달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신음 섞인 중얼거림을 뱉어 냈다.
“정……찰대! 정찰대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꾸물거리던 역도들이 힘차게 일어나 일제히 몸을 돌렸다.
어느새 그들의 손에는 활과 각종 병기가 들려 있었고 수십 발의 화살이 투항을 권고하던 장수에게 쏘아져 갔다.
순식간에 고슴도치가 형님하자고 할 정도로 많은 화살에 꿰뚫린 장수는 찍소리 한 번 내지 못한 채 타고 있던 말과 함께 저승의 입구를 넘었다.
“우…….”
병사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났다. 최후의 발악치고는 너무 조직적이고 매끄럽다.
그 사이에도 비호의 눈은 끊임없이 분지 위편을 살피고 있었다. 본대보다 앞서 적도들을 끊어 냈어야 할 그들이 지금까지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아니, 지금의 저항조차도 용납하지 않았어야 할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저 멀리서 땅이 흔들흔들 하는 것이 보이더니 곧 먼지를 피워 올리며 떠올랐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땅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솟아올랐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저, 저런! 땅을 파고 그 속에 숨어 있었구마!”
양송의 말투에 깊은 절망이 묻어났다.
역도들의 숫자가 순식간에 불어났다.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머릿수만 해도 대략 삼사천에 육박했다.
“이런 씨드랄…… 똥 먹다가 이빨 몽창 빠지는 꿈을 꿨더니만 재수 드럽게 없네.”
비호 바로 뒤에서 욕을 내뱉는 거친 목소리는 두삼의 것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두려움에 오줌이라도 지릴 만하거늘 지금 상황에선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는다. 다만 비호 자신도 모르게 언제부터 뒤에 있었는지 잠시 의문이 들었을 뿐.
“아냐, 아냐. 저 정도면 해 볼 만할 거이. 우리 진짜루 빡시게 훈련받았잖나. 얼추 비슷하다면 칼질로만 일 년을 먹고 살아온 우리가 유리할 거이.”
떨리는 목소리로 한 병사가 중얼거린다. 그 말을 들은 병사들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지만 표정이 죽어 있는 게 영 자신없어 보인다.
“다들 그 입 닫고 전방에 집중해!”
십칠조장 고단(古單)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 역시 두려움을 잊기 위해서 들릴 듯 말 듯 쌍욕을 중얼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