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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쾌 1권(6화)
1장 모든 것의 시작(6)


병사들을 잠시 바라보던 대장군은 말을 이었다.
“그대들보다는 편하게 왔다고 뒤에서 얼마나 나를 욕했을지 다 알지만 이 자리에서 만큼은 모든 걸 잊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지켜봐 준다면 고맙겠다.”
때 아닌 대장군의 농담에 병사들 사이에서는 웃음기가 살짝 번져 간다.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매우 슬픈 일임을 그대들도 잘 알 것이다. 왜냐! 그것은 저 협곡 아래에 숨어 있는 적도들이 바로 우리와 같이 대송(大宋)의 하늘 아래에서 살아 숨 쉬던 동포이기 때문이다. 저들은 나와 그대들의 먼 친척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의 부모나 형제들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은가?”
일순 병사들의 몸이 굳어졌다. 엄연한 사실이지만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진실을 눈앞에 둔 모든 이들이 말을 잃었다.
“또한 우리가 먹고 마시던 그 귀중한 양식들은 모두 다 저들의 피땀으로 얻은 것임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저들 중에는 농민들도 있고 상인들도 있으며 사냥꾼, 화전민에 도적의 무리들, 심지어 여자와 어린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유난히 ‘사냥꾼’이란 말에 심장이 요동치는 비호였다. 지금까지도 예의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고 있음을 비호는 이제야 깨달았다.
“우리가 폭도라 부르는 저들은 수천 년을 외적과 싸워 오며 우리가 지키기 위해 애썼던 바로 그 사람들임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더욱 슬퍼짐을 막을 수가 없도다.”
지나칠 정도로 숙연해진 분위기를 둘러보며 대장군이 갑자기 외쳤다.
“하지만!”
그 외침에 전마(戰馬)들조차 순간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법도를 지키지 않고 수많은 인명을 해한 그 순간부터 저들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리고 그대들과 함께 나라를 지키기로 맹세했던 이백의 형제들이 저들 손에 고혼이 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틀리는가?”
모든 병사들의 몸에 전율이 일어나고 있음을 비호는 느낄 수 있었다. 그 전율은 이제 전염병처럼 퍼져 삼천의 마음에 불을 지피고 있다.
“법도가 모든 이들에게 평등하지 않음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평등하지 않다 하여 지키지 않는 것은 더더욱 안 될 말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묵묵히 이 땅을 지키며 살아온 수백, 수천만의 백성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조되는 연설로 병사들의 흥분이 커져만 갔다. 병사들의 대오를 쭈욱 둘러보며 대장군이 마지막 말을 토해 냈다.
“언젠가는, 수십, 수백 년 후에는 반드시 저들이 원하는 평등함이 온 백성에게 전하여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이 싸움을 이겨야 한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려라. 피로써 얻는 열매보다 인내로 얻는 열매가 더 달다는 것을 우리가 보여주자. 가라! 가서 저 폭도들을 멸하고 이 땅에 법도가 살아 있음을 그대들이 알려라. 더 이상 선량한 백성들이 현혹되지 않게 그대들의 손으로 저들을 편히 묻어 주라!”
다시 한 번 함성이 길게 이어졌다. 흥분이 지나쳐 들고 있는 방패로 땅을 내려치는 병사들도 여럿 보인다.
비호 역시 감동스러운 연설에 몸이 떨려옴을 주체하기 힘들었지만 가슴을 울리는 심장의 고동이 너무 고통스러워 더 이상 고함을 칠 수 없었다.

“이런, 이런…… 그럴듯한 궤변으로 순식간에 삼천의 마음을 휘어잡다니. 역시 문과 무, 그 어느 것 하나도 따라올 자가 없다는 대송의 보물.”
속삭이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비호는 숨이 멎는 충격을 받았다.
오평. 그 악마와 동급인 인간이 그 자리에 서서 차가운 표정으로 대장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응?”
오평은 자신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비호를 의식했는지 당혹스러운 듯 짧은 신음을 내었다.
오평과 눈이 마주치자 바로 고개를 돌려 앞만 바라보는 비호. 이제는 두삼과 오평의 숨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이니.
“훗. 나도 연설에 감동받았나. 잠시 정신줄을 놓았군. 뭐 이젠 그럴 필요 없게 되었지만.”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오평이 고개를 숙여 비호의 귓가에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쥐방울, 아니, 아니지…… 이봐, 꼬마 친구. 너무 겁내지 말라구. 내 연기가 뛰어났다면 그건 사과하지.”
비호는 이 인간이 또 무슨 악독한 짓을 하려고 이러는지 도대체 감을 잡기가 힘들었다.
“그래 뭐 이 껍데기의 주인이 쓰레기라고 부르기도 아까운 인간인 건 인정해. 그래서 선택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겁먹는 것도 웃기잖아?”
“오, 오평 어르신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나중에 달게 벌받겠습니다.”
“흠…….”
지나치게 기어가는 비호의 태도에 오평은 잠시 뭔가를 고민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말하기 시작했다.
“잘 들어 꼬마 친구. 내 떠나가는 마당에 자네한테만 살짝 말해 주지.”
이미 오평의 출현만으로도 몸이 굳어 식은땀마저 흘리는 비호의 귓가에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한 번 잘 생각해 봐. 국경을 떠나온 후 두삼과 오평, 아니, 내가 자네를 찾아오기까지 꽤 오래 걸린 것 같지 않아? 이상하지? 마음만 먹는다면 하루도 안 걸릴 텐데 말이야. 그것도 자네처럼 남 심부름이나 해 주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눈에 띄는 아이라면.”
그렇지 않아도 그 점이 궁금하던 비호다. 여기까지 거의 다 와서야 이들이 갑자기 등장한 것이.
“내가 그 산도적 같은 놈 정신을 잠시 붙들어 두고 있었다네. 머리 나쁜 인간들 대갈통에 장난치는 정도는 뭐 나한텐 방귀 뀌는 것보다 쉬운 일이거든. 물론 나도 인간인지라 볼일 보던 사이에 그놈이 자넬 찾아낸 건 예상치 못했던 바고. 아! 아소란 친구가 그놈 겁줄 때 자네가 오적어 생각하는 게 어찌나 웃기던지. 크큭.”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어떻게 제 생각을……?”
“염력(念力)이란 거 그리 어려운 공부는 아니야. 중원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사술(邪術)과는 좀 달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노력이 약간 필요하다고나 할까.”
“오평 어르…… 오평이 아니군요.”
“이제야 내 말을 좀 이해하는 건가? 그럼 그 몸 좀 풀어. 보는 내가 다 민망하구먼. 아, 그리고 그 괴물 보듯 하는 눈길 좀 치워 주게 나, 사람 맞으니.”
비호는 그제야 굳은 몸이 조금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괴상한 말을 해 대는 오평의 얼굴을 한 사내에 대해 은근히 두려움이 생기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본능이었다.
“내가 누구냐고? 나는 말이지…… 공부가 지루해 세상을 잠시 여행하는 지나가는 사람? 정도로 해 두지. 자네 머리통만 한 두께의 책 여섯 권을 다 읽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해 봐. 이거 힘들어 죽을 지경이라네. 어떤가, 꼬마 친구. 자네가 생각해도 이건 아니지 않나?”
“전 그런 책조차 본 적이 없어요. 아버지가 글을 알려 주셨지만 공부하곤 안 맞더군요.”
“그렇지. 공부하고 안 맞는다라…… 그 점은 자네와 나의 공통점이군.”
비호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 가는 사내의 언변에 슬슬 경계심이 무너져 가는 것을 느꼈다.
“아무튼 뭐 여섯 종파(宗派)의 노인네들이 눈만 뜨면 교리(敎理)가 어떻고 일신(一神)이니 삼신(三神)하면서 사람을 들들 볶아 대는 데 숨 쉴 수가 있어야지. 교리 쪽이야 신실한 이 사매(二師妹)한테 맡겨 두고 나도 차라리 삼 사제(三師弟)처럼 무예나 더 연마할까 하고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니란 말씀.”
“저…… 제가 이해하기 쉬운 쪽으로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응? 아아, 이거 미안하군. 간만에 사람과 대화라는 걸 하니 쓸데없는 말들을 멈출 수가 없구먼. 어디까지 했더라…… 아. 그렇지. 여행! 맞아. 내게 필요한 건 휴식이었어. 달콤한 휴식……이라는 건 핑계고 사실 그냥 세상이 보고 싶었다네. 우리가 언젠가 ‘개혁’해야만 하는 이 세상이 얼마나 썩어 들어가 있는지를 말이야.”
비호가 보기에 이 사람은 미친 사람이 분명했다. 중얼거리는 말에 핵심도 없을뿐더러 앞뒤 순서도 엉망인 것이 정상은 아닌 게 확실하다.
“해서 이 중원땅 여러 곳을 돌아다녀 봤어. 한 이 년? 바다가 보이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부터 북쪽 끝자락 야만의 세계까지 말이야. 뭐 그때그때 죽어도 싼 놈들 몇 잡아다 신분을 위장했으니 교(敎)에서 내 흔적을 잡아내기는 어려웠을 거야.”
“그렇군요…….”
의미도 모른 채 그저 동의밖에 할 게 없는 비호였다.
“슬슬 세상 구경이 지루해지더군. 내가 할 일도 잔뜩 밀려 있을 테고. 사실 내가 워낙 바쁜 몸이시거든.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려던 차에 마지막으로 병졸들 사는 모습이나 한번 볼까 하고 자네들이 머무르던 국경에 갔다네.”
“어, 어떻게요? 전 그쪽 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뭐 그냥 서 있어도 웬만한 인간들은 날 못 느껴. 분명히 보이기는 할 텐데 말이지. 내가 가진 작은 재주의 일부라고나 할까? 훗. 그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자네들 훈련 받는 것도 보고, 몇몇이 패거리 만들어 힘겨루기 놀음하는 것도 보고, 저 근엄하신 대장군이 끙끙거리며 똥 싸는 것도 자알 지켜봤었지.”
비호는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오천에 달하는 인원이 이 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흡사 귀신과 같지 않은가. 이런 비호의 반응을 보며 짧게 웃음을 지은 사내는 계속 말했다.
“그러다 어느 날 정찰 나간 병사 몇몇이 교지 원주민들의 신물인 왕뱀을 생으로 씹어 먹고 돌아오더라 말일세. 그러더니 하나둘 픽픽 쓰러지더군.”
군진을 휩쓴 전염병을 말함이다. 이제야 원인도 알 수 없었고 약도 없어 속수무책으로 수많은 인명을 저승으로 보낸 괴질의 발단을 비호는 짐작할 수 있었다.
“볼 것도 다 보고 군대도 뭐 별거 없다는 생각이 들어 떠나려던 차에 반란 소식이 들려왔다네. 솔직히 매우 흥미로웠어. 결과야 뻔하겠지만 저 가련한 백성들을 대장군이 어떤 식으로 처리할지 궁금해서 남기로 했지.”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 것처럼 그냥 계셨어도 될 텐데.”
오평으로 위장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물음이다.
“그냥 작은 변덕이랄까? 한번 끼어 보고 싶었다네. 또 내 재주가 좀 뛰어나긴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유지하는 그것도 꽤 피곤한 일이거든.”
진심으로 피곤한 듯 두 눈 사이를 꾹꾹 누르는 사내였다.
“그래서 골랐지. 살아 있으면 세상에 해만 끼칠 놈들이 과연 누굴까 말이야. 대충 고민해 봐도 답은 바로 나오더구만. 그래서 그날로 바로 작업해 버렸어.”
왠지 모를 끔찍한 느낌에 비호는 몸이 떨려 왔다.
“이 오평이란 놈. 나랑 덩치가 비슷하더군. 두삼이란 놈은 너무 크고.”
오평의 운명이 결정된 이유였다. 사내는 오른손으로 얼굴을 살짝 감싸더니 앞으로 쭈욱 당기는 시늉을 한다.
“밤에 볼일 보는 사이에 다가가서 뜯어 버렸어. 뭐 별로 고통은 없었을 거야. 그전에 성대를 그어 버렸거든.”
툭하면 비호에게 얼굴 가죽을 뜯어낸다고 겁박하던 두 놈이었다. 그 최후가 그런 꼴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