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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쾌 1권(5화)
1장 모든 것의 시작(5)


“형. 근데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걷고 쉬고만 계속해요? 화적 무리들하고 걸지게 싸움 한 번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흐흠……. 그게 말이지…… 에잇. 걍 너니까 내 말해 주마. 어디 가서 말하면 콱 때려 버릴 거다.”
“아아, 그건 걱정마요. 저 소심해서 아직 다른 어른들이랑은 말도 못해요.”
주변에 누가 있나 잠시 살피던 아소는 조그만 목소리로 비호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원래 계획은 좀 무리를 해서라도 작전 지역까지 빠르게 이동해 군진(軍陣)을 형성하는 거였어.”
그간 행군으로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그럴 법도 하기에 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군께서는 폭도들의 규모가 지금쯤이면 대략 오천쯤 되는 것으로 판단하셨거든. 뭐 제대로 훈련받았는지의 유무를 떠나서 정면으로 붙으면 일단 머리수 많은 쪽이 유리한 것이 사실이지.”
이것도 맞는 말이다. 비호는 약간 멍해진 표정으로 여전히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놈들과 붙어서 깨지고 돌아온 경우를 보면 이놈들이 단순히 대가리 숫자로만 ‘우우’하면서 밀고 들어오는 놈들은 아니라는 거야. 너도 봤지? 궁수 부대를 따로 운용할 정도로 나름 전투의 묘리를 아는 ‘요상한’ 패거리라는 거.”
“네. 저도 죽는 줄 알았어요.”
“그래. 너 있던 대오가 우르르 죽어 넘어가는 거 보고 나 심장 터지는 줄 알았다. 휴…….”
생각만 해도 아찔했던지 가슴을 쓸어내리는 아소였다.
“아무튼, 그래서 이런저런 것들을 종합해서 봤을 때 기존의 토벌 작전처럼 몰이식이거나 전력으로 확! 밀고 들어가는 작전은 저언혀! 승산 없음! 이라는 게 대장군께서 내리신 결론이라 이 말씀이야. 그래서 조금은 방어적인 군진을 염두에 두었던 거지.”
“음…… 그럼 그 무리……해서까지 하려고 했던 작전이란 건요?”
“일단 처음 세운 계획의 기본은 아직도 유효해. 우리가 아직까지 고생하고 있다는 게 그 증거지. 단, 이번에 잡은 포로 덕분에 작전을 변경하는 데 있어 좀 유리해졌다고나 할까?”
“와! 그럼 승산이 있는 거네요?”
“뭐 일단은 그렇지. 놈들이 어디 있는지, 얼마나 되는지 우리가 알고 있으니. 먼저 놈들의 숫자는 이천에서 조금 모자라. 몇 번의 토벌전 이후 도망가거나 죽어 나가서 머릿수가 확 줄었지.”
“재수가 좋으면 살아서 돌아가는 게 아니고 이제는 재수 없으면 죽게 생긴 거네요?”
간만에 화색이 도는 비호의 얼굴을 보며 아소가 동의했다.
“그런가? 흠. 그럴 수도 있겠네. 그 이천이나 되는 무리 중에 또 대다수가 부상자에다 칼 한 번 제대로 못 잡아 본 농민들이 주축이라 하니 결국 대규모 접전이 벌어지면 지리멸렬(支離滅裂)할 것이 분명하긴 하지.”
“이대로 아버지 얼굴 못 보고 가는 줄 알고 밤마다 소리 죽여 얼마나 울었는데요. 흐…… 다행이다, 정말.”
“놈들이 본진에서 먼 이곳까지 유격 부대를 여섯 번이나 보내 우리를 지체시키려 한 것만 보더라도 지금 놈들 사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겠지? 그래서 처음의 작전대로 빠른 기동이 유지되는 거야. 조금이라도 놈들이 회복되면 우리 병사들이 그만큼 더 죽어 나갈 테니.”
잠깐 생각에 잠긴 비호는 남은 물을 홀짝거리며 말했다.
“형.”
“응?”
“저 무서운 얘기를 들었어요.”
“원래 다들 그래. 불안하면 무슨 얘기들을 못할까.”
“귀궁(鬼弓)이요.”
아소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귀궁은 이미 군 내에 퍼질 만큼 퍼져서 그 이름을 모르는 병사가 없을 정도로 은근한 공포를 조장하는 존재였다. 게다가……
“저 사실 출진하고 나서부터 계속 가슴이 두근거려요. 처음에는 그냥 앞날이 불안하고 몸이 힘들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멈추질 않아요. 특히…….”
“특히?”
“귀궁이란 이름을 들으면 심장을 때리는 것처럼 쿵쾅거리는 게 머리도 띵해지고 저 이상해요 정말.”
아소의 눈빛이 진중해졌다. 비호는 아소도 뭔가를 느끼고 있는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형……?”
“됐어. 더 말하지마. 거기까지.”
비호의 말을 자르고 눈을 찡그리고 있는 모습이 평소의 아소답지 않아 보인다.
“호야.”
“네, 형.”
“일단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마라. 너도 그렇겠지만 나 역시 그저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바둑알과 같은 신세일 뿐이다. 지금은 그저 갈 때 가고 쉴 때 쉬는 것만이 우리가 해야 할 일 전부야. 내 말 알겠지?”
“네에…….”
비호는 힘없이 대답하면서 엉덩이를 툴툴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죽부대가 다 비어 버린 것을 보고는 아소에게 괜히 미안한 표정을 짓는 것이 비호다워 보인다.
“자! 그럼 슬슬 준비하자. 아마 이번 휴식이 마지막일 거야. 놈들이 숨어 있는 지역이 코앞이란다. 내 말한 것처럼 넌 무조건 시키는 것만 하다가 눈치 보고 슬슬 빠져. 알았지?”
“넵!”
비호의 대답이 전에 없이 힘차게 느껴진다.

* * *

멀리서 다그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추격은 삼십이 했으나 돌아온 인원은 여덟에 불과하다.
인마(人馬)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는 것을 보면서 비호는 그들 중 아소의 얼굴을 찾았다.
울컥하며 눈물이 터져 나오는 비호를 발견한 아소는 대장군의 군막으로 말을 달리던 와중에도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푸하!!”
물통에 머리를 박았다 들어 올리는 아소를 향해 비호가 나는 듯 달려갔다.
“형! 형! 형! 형!”
“어이쿠! 우리 꼬마가 내 걱정 많이 했나 보네. 얼굴이 반쪽이 됐네, 그냥.”
품에 안겨 훌쩍거리는 비호를 안심시키며 등을 두드려 주는 손길이 따뜻했다.
“어떻게 됐어요? 같이 갔던 분들은요? 다친 데 없죠?”
“뭐 보다시피 썩 좋지는 않네. 매복에 걸려 죽다 살아났다.”
작전지역에서 진(陣)을 구축하는 중 적도(賊徒)들 여럿이 염탐하는 것을 발견한 후 추격대를 보낸 것이 세 시진 전이었다. 아소의 말대로라면 유인책이었음이 틀림이 없다.
“그래도 소득이 있었어. 놈들 정확한 위치를 알아냈거든. 자세한 건 나도 말 못해. 흐유…… 일단 난 좀 쉬자.”
“네 형. 첨이 형님한테 가서 시원하게 드실 것 좀 얻어다 올게요. 크.”
“괘안타. 내 가는 길에 들러서 쏙 다 뽑아 먹고 갈 테니 넌 그냥 구(句) 형님한테 가서 나 좀 보자고 전해. 그럼 간다.”
말은 아무렇지 않게 하지만 온몸에 피와 살덩어리, 골수를 덕지덕지 바르고 갑주(甲?) 여기저기 패이고 벌어진 틈으로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이 저 세상 문턱에 한 발 걸칠 뻔한 듯하다.

“여어! 우리 꼬마 다녀왔능가아.”
느릿하고 비음이 섞인 말투가 인상적인 팔조장 왕구는 군막으로 쫄쫄 들어오는 비호를 보며 반가운 체를 한다.
“얼라리요? 나간 지 을마나 되따고 벌써 들어오는감? 거참 고놈의 다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구먼.”
“해서 요놈 별명이 ‘바람이’여 ‘바람이’. 빨빨빨빨 하고 뛰갈 때 보면 다리가 보이지도 않드라구. 낄낄.”
농담을 주고받는 병사들의 분위기가 매우 부드럽다. 얼추 자신을 반기는 병졸들을 향해 수줍은 듯 웃은 비호는 왕구에게 아소의 말을 전했다.
“그래에? 뭐이 그리 급한 일이 있다궁 날 또 찾능가? 흠. 뭐 곧 가면은 돼겄징.”
“넵. 그리 전해 드릴까요?”
“아니다. 고건 되았고. 흠흠. 이 왕구 어르신이 전에 말한 건 어째 생각 좀 해 보았능가?”
“아! 죄송해요 조장님. 저 전역하면 아버지 도와서 사냥을 하고 싶어서요.”
“쩝. 그렇구만. 뭐, 할 수 없지. 헌데 증말 아깝긴 아까워 우리 비호만큼 뛰어난 인재도 보기 드문데 말이징. 군에 계속 남아 있다면 연 장군님, 아니, 대송을 위해서도 좋지 아니하겠능가?”
북 치고 장구 치고도 이 정도면 초고수급이다. 그런 왕구를 향해 비호는 다시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했다.
두웅! 두웅! 두웅! 퉁! 퉁!
갑자기 집합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화기애애하던 군막 내부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날카로운 송곳을 코앞에 들이댄 것처럼 긴장에 휩싸였다.
“벌써 시작잉가?”
주위를 둘러보며 왕구가 천천히 일어나 갑옷을 조였다. 한가로이 농담을 건네던 병사들도 어느새 장비를 점검하고 있다.
역시 대장군 직속 정찰대 중 최정예만을 엄선해 놓았다는 팔조답다고 비호는 생각했다.
“이봐 우리 꼬마 비호.”
“네? 아, 넵!”
“자네능 이제 슬슬 본대로 복귀하시게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면 본인으로서능 우리 꼬마를 챙겨줄 여력이 없으시네. 본대가 지금으로선 가자앙 안전할 거이.”
“그랴 후딱 가 보드라고. 난중에 전투 끝나믄 다시 놀러오구.”
왕구와 정찰대원들의 따뜻한 말에 가슴이 찡해졌다. 짧았지만 같이 생활하면서 정이 많이 든 것이다.
“넵! 그럼 조장님, 형님들 다들 다치지 말고 돌아오세요. 제가 심부름할 거 있으면 다 해드릴 테니…….”
연 장군을 따라 거란과의 전쟁에 십 년을 보낸 역전의 용사들이다.
농민 반란군들쯤이야 젓가락으로 찜 쪄 먹고도 남을 전투의 귀재들이지만 비호의 마음에는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아마도 대장군의 연설이 시작됨과 동시에 폭도들의 뒤를 치기 위해 은밀하게 이동을 시작할 터.

삼천에 달하는 병사들이 극(戟)을 세우고 각을 맞춘 채 도열해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말 탄 장수들이 줄을 이루어 연(淵)과 송(宋)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펄럭이는 깃발들을 들고 군진을 달리는 것이 비호를 포함한 병사들의 눈에는 장엄해 보이기까지 하다. 아마도 출진을 앞두고 병사들의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해 연출된 것이리라.
잠시 후 장수들의 움직임이 잦아들었을 때 앞쪽에서 호위대에 둘러싸인 연천평 대장군이 모습을 나타냈다.
꿀꺽!
바로 옆 병사가 마른침을 삼킨다.
평소에는 병사들 사이를 자주 내왕하면서 높은 신분에 걸맞지 않게 낮은 자들과 소탈하게 어울리던 대장군이다. 허나 오늘은 마치 하늘에서 신장이 내려온 듯 고절한 기세가 뿜어지는 것이 역시 거란 놈들의 발길을 십 년간 붙잡았다는 절세의 무장답다는 생각이 절로 인다.
윤기가 흐르다 못해 빛이 날 정도로 새하얀 백마 위에서 오연하게 삼천의 병사들을 바라보던 대장군이 입을 열었다.
“고생했다.”
딱 한마디였다. 하지만 병사들의 두근거리는 심장을 폭발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우……우와아 우아아아!”
어딘가에서 함성이 먼저 시작되었다. 그와 동시에 삼천 병력 전체가 함성으로 물들었다.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구릉도 몸을 떨고, 한가로이 흘러가는 강물도 일순 멈춘 듯했다. 벌써부터 감동하여 눈물을 보이는 병사들도 있었다.
비호도 이런 분위기에 휩쓸려 자기도 모르게 목이 찢어질 정도로 함성을 질러 댔다.
함성은 꽤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되었고 곧 대장군이 손을 들어 함성을 멈추게 했다.
“저 남쪽 끝에서 기억하기도 싫은 머언 거리를 묵묵히 따라와 준 그대들에게 우선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이 말을 마친 대장군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 저 지체 높은 장군의 인사를 받은 삼천 병사들은 순간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심지어 엎드려 절을 하는 병사들도 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