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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쾌 1권(4화)
1장 모든 것의 시작(4)


“에효. 그러니까 연 어르신이 윗대가리에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 그 말이오. 해서 굳이 다른 짱짱한 장수들 다 제쳐 두고 저 밑에 있던 우리가 올라가는 거라 이겁니다. 지금 이 민란으로 날아간 생목숨이 벌써 사천에 이른다 합디다. 이건 거의 지방 반란 수준이지요. 안 그렇소?”
처음 듣는 이 말에 비호는 순간 딸꾹질이 날 뻔했다. 오천에 못 미치는 주둔군 전체 규모를 처음 봤을 때 그 얼마나 놀랐던가. 그런 어마어마한 숫자의 팔 할에 해당하는 인명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비호가 살아온 상식의 세계를 저 멀리로 날려 버리기 충분했다.
“이런 ‘반란’을 겨우 오천에 불과한, 그것도 뚝 떼서 삼천만 끌고 가서 진압하라고 명령한 게 왜 그랬겠소? 연 어르신 물 좀 먹여 보겠다는 심보가 아니냔 말이오. 역도 놈들 싸그리 잡아 죽여도 우리는 이미 만신창이(滿身瘡痍)요, 혹여나 패하기라도 하면 아랫것들은 다 죽은 목숨에 연 어르신 역시 정치 생명 끝나는 건 자명한 사실일 텐데 저 썩은 관리 놈들이 봤을 때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소.”
맞는 말이다. 어린 비호가 생각해 보기에도 저 관리들 입장에서는 만세를 부르고도 남는다.
민란을 평정한다 해도 연 장군의 경력에 보탬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흠집으로 남을 수 있다. 상대적으로 많은 병사를 잃는다면 승리하더라도 어느 정도 처벌을 감수해야 할 것이고 반대의 경우라면 그야말로 끝장이다.
“그것이 정치란 것이라오. 더럽지요. 암요.”
무거운 분위기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익살맞게 입담을 과시하던 병사도 입을 앙다문 채로 묵묵히 발길을 옮길 뿐이다.
“저도 들은 말이 좀 있는데 들어 보시렵니까?”
계속되는 침묵을 끊어 내듯 한 병사가 입을 열었다.
“어제 정찰 나가서 조장한테 들은 얘기가 있는데 말입니다.”
다른 병사들의 귀가 쫑긋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큼큼…… 저 폭도(暴徒) 놈들 중에 아주 겁나는 놈이 있다 합니다. 그놈이 뭐 이 형씨가 말한 그 미친 괴물놈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놈들 대가리 중에 하나인 것 같다고 조장이 말하더군요. 놈들하고 붙어서 깨지고 간신히 살아서 돌아온 자들 사이에 유명한 모양이고요.”
“허이구, 이번엔 또 어떤 무서운 얘기가 나올지 벌써부터 다리가 떨려 걷지도 못하겠구먼.”
불안함의 표시일까? 애써 농담 삼아 하는 말이 전혀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귀궁(鬼弓)! 놈을 그렇게 부른다 합니다.”

쿵!
비호의 심장이 크게 한 번 뛰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심장은 비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처음 한 발은 무조건 말 타고 있는 지휘관 이마빡에 턱하니 박힌다고 하네요. 그 다음엔 수십, 수백 발의 화살이 사방에서 쏟아진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그런 와중에도 꼭 한 발씩 어디선가 날아와 장수들 머리통을 텅텅! 때려 갈긴다더군요. 말에서 내려 숨으면 말을 통째로 뚫어 버리기도 하고 달아나기라도 하면 어느새 앞쪽에서 날아오기도 한답니다.”
“에이. 그건 좀 아니다. 꼭 한 놈의 소행이라고 하기는 그렇잖소.”
“깃 부분이 특이한 화살이라 놈이 한 짓이라는 거 금방 알아볼 수 있답니다. 망자(望子)라고 쓰여 있다고 하는데 놈의 이름인 것 같다고 하네요.”
쿵!
비호의 심장이 또 한 번 울었다.
‘왜 이렇게 심장이 떨리지? 며칠 전보다 더 심해지네. 내가 좀 아픈가?’
약한 몸을 괜히 탓해 보는 비호였다.
“실컷 화살을 쏘다가 빠지기를 반복하던 중에 한 번은 그놈이 언덕길 끝자락에 서 있더랍니다. 장수 셋이서 잡겠다고 동시에 말 달려가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꿀꺽.
한 병사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놈이 활을 놓자마자 세 명이 동시에 떨어졌다네요. 셋 다 정확히 이마 한가운데가 뻥 뚫려서요. 귀궁이란 별명은 그때부터 생겼답니다. 뭐 제가 아는 건 여기까지에요.”
숨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 비호를 위시하여 다들 어두운 표정으로 먼지 풀풀 날리는 땅만 바라보며 다리를 끌 뿐이었다.
“허헛. 우리가 말로만 듣던 강호의 고수들과 싸우러 가는 거 아녀? 이거이거 사람이 하늘을 날고 맨손으로 바위를 깨부수는 웃지 못할 광경을 보겄구만 그래. 껄껄 이게 웬 호사(好事)냐.”
스스로 느끼는 공포를 지워 보기라도 하는 양 태연한 척 농을 떠는 한 병사의 중얼거림에도 어느 누구 하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행군은 계속되고 있었다.
쉬이잇!
순간 비호의 귓가에 바람이 갈라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딱!
바둑판에 알을 때려 놓는 것 같은 소리가 앞쪽에서 대오를 정비하던 장수의 이마에서 터져 나왔다.

* * *

여섯 번의 습격이 있었고 백이 훌쩍 넘는 병사를 묻었다.
놈들의 첫 습격 때 대비가 부족했던 탓인지 오십이 넘는 병사가 통째로 나가떨어졌고 그 이후로는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였다.
산을 끼고 도는 지역에서는 어김없이 놈들이 나타났다.
귀궁이라 불리는 놈은 첫 번째 공격만 주도했던 것으로 보였다. 이후의 공격에서 장수들이 저격당하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습격은 비호가 속한 분대가 표적이었다. 비호는 작은 몸집 덕분에 방패 뒤로 꼭 숨어 쉼 없이 쏟아지는 화살비를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구수한 입담으로 주변을 울고 웃게 만들던 장사꾼 출신 이탁(李琸) 아저씨도, 이해하기 힘든 정치의 세계를 논하며 군역을 마치는 대로 동네 글방 선생이 되고 싶다던 방칠(龐七) 형님도 이때 온몸이 고치가 되어 죽었다.

“야, 쥐방울! 물 남은 거 있으면 다 내놔.”
“네? 아…… 저도 남은 게 없…… 커억!”
말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비호는 낮게 비명을 질렀다. 두삼이 들고 있던 소도의 자루로 가슴 어림을 가격했기 때문이다.
“이 썩을 놈이, 내가 물 다 처먹지 말고 남겨 두라고 했어, 안 했어? 꼭 쥐어 터져야 정신 차릴래?”
어찌나 아프게 맞았던지 목구멍으로 새어 나오려는 피를 꿀꺽 삼키며 비호가 급히 변명했다.
“아까 오평 어르신이 남은 물 다 드셔서 없어요. 전 건드리지도 않았어요. 제발 믿어 주세요.”
두삼이 오평을 흘끗 바라본다. 오평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먼 산만 바라보고 있을 뿐.
두삼은 다시 비호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리는데 두 눈에 가학(苛虐)의 기운이 잔뜩 스며 있다.
“없으면 훔쳐 오기라도 하란 말이야, 이 벌레 찌끄레기 같은 놈아. 이 두삼 나으리가 직접 얻어 와야 쓰겄냐? 당장 구해 오지 않으면 확! 배 따서 곱창으로 목 졸라 버린다!”
“자네야말로 뒤통수에 화살 박히기 싫으면 그 주둥아리부터 닫으시지?”
“헙! 아…… 이거 조장 나리 아니시오? 미천한 병졸들 쉬는 곳엔 어인 행차신지?”
어느새 두삼의 뒤에 아소가 주먹을 움켜쥔 채 서 있었다.
“미친 개새끼 두 마리가 혹여나 멀쩡한 사람들을 물까 걱정이 되어 잠시 돌아다니던 중이네. 안 그런가, 오평?”
두삼과 오평을 노려보는 아소의 눈빛이 살기마저 감도는 게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오평은 그런 아소를 외면한 채 휘파람만 불고 있다.
“아따, 이 넓은 들판에 미친개가 어딨다고 그러시오. 소인은 다만 세상 물정 모르는 이 어린것이 안타까워 잠시 귀여워 해 주는 중이었습죠. 헤헤.”
비굴하게 웃는 두삼이었지만 눈은 뜨악한 게 뭔가 벼르는 눈치다.
“아직 몸도 성치 않은 아이다. 그런 아이를 데리고 다른 병사들과 떨어져 이런 외진 곳에서 쉬고 있으니 내 마음이 편치 않군. 이 아이는 내가 데리고 가겠네. 자네 둘도 이곳에 있다가 혹시 있을지 모르는 습격에 당하지 말고 어서 대열로 합류해서 쉬게나.”
“네네.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조.장. 나.으.리.”
마지막 막을 씹어 뱉듯이 중얼거리는 두삼을 잠시 바라보던 아소는 고개를 숙여 두삼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전투 중에 난전이 벌어지면 아군이 날린 화살에 머리가 날아가는 불행한 병사들이 종종 있다고 들었네만, 자네들에게는 그런 안타까운 일이 없길 진심으로 바라네.”
아소의 차가운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오적어(烏賊魚)만도 못한 돌대가리일 것이리라.
소도를 강하게 움켜쥐던 두삼은 곧 헤헤거리는 얼굴로 비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보게 어린 친구. 이 형님이 해주던 좋은 말은 나중에 계속해 줄 터이니 어여 가서 편히 쉬게나. 그럼 이따 다시 보자구.”
벌건 눈알을 데록데록 굴리던 비호는 곧 아소를 따라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소는 비호를 다른 병사들과 조금 멀찍이 떨어진 장소로 데리고 간 후 허리춤에 묶어 둔 가죽부대를 풀어 비호에게 건넨다.
“아, 승질머리 확 오르네 이거.”
아소가 건네준 물을 홀짝홀짝 마시던 비호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어제 갑자기 나타나더라구요. 그 누런 이를 번들거리면서 ‘요기 있네?’ 하는데 소름 끼쳐 죽는 줄 알았어요. 에휴…….”
비호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던 아소는 곧 비호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는다.
“조금만 참아. 이번 토벌전이 끝나기 전에 내 특단의 조치를 취할 것이니 일단은 당분간 왕구(王句) 팔조장 밑에 가 있어. 내 권한으로 너 정도 재배치하는 데 어려운 것 하나도 없다. 말은 알아서 해 놓을게 행군 시작되면 그쪽으로 들어가.”
“고마워요, 형. 내 나중에 군역 끝나면 아버지한테 말해서 활 좋은 걸루다 하나 보내주라 할게요. 크.”
“되았다 이것아. 너두 내 친동생이나 마찬가지여. 고맙고 뭐고 그런거 읍따. 흐흐.”
어렸을 적부터 참 마음이 많이 가던 형이었다. 같은 어미의 젖을 먹고 자라서 그런지 아삼이네 형제들과는 친혈육 이상으로 정을 나누어 온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싸움 잘하고 덩치 좋은 아삼과 달리 왜소하고 늘 병약했던 비호에게 특히 많은 정을 준 것이 아소였다.
비호가 군역을 간다고 하니 혼자 보낼 수 없다며 군역을 자원할 정도로 비호를 아끼는 아소였기에 지금 비호가 겪는 괴로움을 보노라면 가슴을 찢는 고통을 느끼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