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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르트 1권(20화)
8장 화이트 폰 이안(3)


로이니스 반 베리카.
슈레이더 왕국 대부호인 베리카 백작의 딸 이름이다. 올해 열여덟 살이 된 그녀는 호기심이 매우 강한 소녀였다. 평소에 여행을 즐겨 하던 그녀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유명한 장안의 숲의 위용을 구경하기 위해 직접 프로시안 남작령까지 갔다.
“야! 내가 베리카 백작의 딸이라니까 왜 이렇게 안 믿어? 정말 여행 중에 신분증명서를 잃어버렸다니까!”
그녀가 꽥 소리를 지르는 이유는 있었다. 영지로 들어가려고 검문을 받던 중, 경비병들이 신분증명서가 없는 로이니스를 포박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떻게 되는 일이 이렇게 없는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혼자 오지도 않는 거였는데.’
프로시안 남작령이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잘 알고 있는 베리카 백작은, 프로시안 영지로 가겠다는 딸의 말에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로이니스는 아버지의 반대에 못 이겨 결국 야반도주하여 저택을 빠져나와 몇 번의 위기를 넘긴 끝에 간신히 프로시안 남작령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비병이 로이니스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 글쎄, 안 된다고 하지 않았소! 정말 베리카 백작님의 여식이라면 혼자서 그런 볼품없는 복장으로 돌아다닐 리가 있겠소? 이번 한 번은 눈감아 줄 테니 썩 돌아가시오!”
“야, 이씨! 너네 내가 아버지 부르면 다 잘려, 이것들아! 너희는 베리카 백작의 딸도 못 알아보냐!”
“베리카 백작님의 딸 얼굴이 어디 영지 곳곳마다 붙어 있소? 긴말 필요 없으니까 어서 가시오. 나도 슬슬 짜증나려고 하니까.”
“그래! 간다, 가! 두고 봐라, 이놈들아!”
로이니스는 큰 소리를 떵떵 치고는 그대로 발걸음을 뒤로 돌렸다. 오늘 밤은 편안히 여관에서 쉬려고 했던 그녀의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정말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그냥 돌아가?”
그녀가 툴툴거리며 조그만 돌멩이를 발로 차자, 돌멩이는 앞으로 3미터는 굴러가더니 그대로 성벽 아래쪽에서 우뚝 멈췄다.
“응? 어라?”
돌멩이가 굴러가는 데로 시선을 쭈욱 따라가던 그녀는 한순간 탄성을 내뱉었다. 성벽 아래, 사람이 다닐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구멍이 있는 것이 아닌가.
“우와! 확실히 몬스터 침공에 대비해 성을 지었기 때문에 견고하게 짓긴 했겠지만, 그래도 역시 허점은 있구나!”
시무룩했던 그녀의 표정이 다시 활기차게 변했다. 그녀는 주위를 스윽 둘러보더니, 자신이 지나갈 수 있도록 구멍 주위를 손으로 파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것도 잊은 채 정신없이 땅을 파다가 소매로 이마를 훔쳤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일단 짐부터 밀어 넣어 보고.”
그녀가 들고 온 배낭을 구멍으로 밀어 넣자 배낭은 별 무리 없이 성 안쪽으로 들어갔다.
로이니스가 자신의 몸을 있는 힘껏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가 악을 쓰며 몸을 비틀었다.
“으으읏, 여행하면서 살이 쪘나? 왜 이렇게 큰 구멍에 내 얇은 허리가 못 지나가는 거야!”
오만가지 불만을 쏟아 부으며 간신히 구멍을 빠져나온 그녀가 옷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휴우. 사람이 건량만 먹다가 죽으란 법은 없구나. 빨리 여관이라도 찾아봐야겠…… 엇!”
로이니스는 흙을 털던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한눈에 봐도 ‘나 기사요!’라고 할 만한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들은 처음부터 자신이 몰래 침입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고 봐야 했다. 로이니스는 태연한 표정을 지은 채 그 둘을 향해 입을 열었다.
“뭘 봐, 여자 처음 봐?”
“…….”

* * *

명색이 부단장이라는 자가 기사들의 수련을 빼먹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는지라, 아침에 눈을 뜨기가 무섭게 곧바로 대장간으로 향했다.
프로시안 영지에 안착한 지도 어느새 두 달이 지났지만 성의 규모가 규모인 만큼 지리를 모두 외운 것은 아니었다. 청령은 이각이나 헤매고 나서야 간신히 대장간을 찾을 수 있었다.
트라바체스의 대장간.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더니, 대장간의 건물과 간판이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대단해 보이자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졌다.
탕탕탕―!
대장간의 규모는 상당히 컸다. 아무래도 프로시안 영지 전체에 하나 있는 대장간이다 보니, 눈에 보이는 대장장이의 수만 해도 삼십 명은 가뿐히 넘어 보였다.
청령이 주위를 스윽 둘러보다가 한쪽에서 망치로 검신을 두들기는 자그마한 노인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드, 드워프?”
책으로 볼 때만 해도 인간 이외의 종족은 자신의 터전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보기가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청령의 눈앞에 있는 것은 분명히 드워프였다.
“프로시안 영지에 대장간이 하나뿐인 건 드워프 때문인가?”
아무리 인간 중에서 기술이 날고 긴다는 사람들도 드워프 앞에서는 한 수 접어 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감히 드워프가 있는 마당에 대장간을 차릴 간 큰 사람도 없거니와 이미 대장간을 갖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문을 닫아야 했다.
“저, 어르신?”
청령이 드워프 노인의 주위로 가서 살짝 입을 열었지만, 그는 못 들은 척 여태 하던 일만 계속했다.
“어르신?”
탕탕탕!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청령의 귀에 들려왔다. 드워프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트라바체스 님은 작업 중에 방해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웬만해서는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좋을 겁니다.”
옆에서 다른 작업을 하고 있던 장한이 말하자 청령이 그를 바라봤다.
“흠, 전 에이전트 기사단의 부단장 화이트 폰 이안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곳에 오면 갑옷과 검을 만들 수 있다는 말에 왔는데…….”
“오!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소문엔 젊고 아주 잘생긴 분이라 했는데, 오히려 소문이 못하군요. 훨씬 훤칠하게 생기셨습니다.”
장한의 칭찬에 청령은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칭찬은 원래 만인을 기쁘게 한다.
“그렇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트라바체스 님이 작업 중이시니 혹시 원하시는 게 있다면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청령은 진열대에 놓인 검을 일일이 살펴보면서 제일 적당한 것을 골랐다.
“이 검보다 검신이 조금 짧고, 쉽게 부러지지 않으면서, 마나가 잘 유통되는 것이 없을까요? 무게는 가벼우면 가벼울수록 좋습니다.”
상당히 어려운 주문임에도 불구하고 장한은 묵묵히 청령의 말을 받아 적었다. 묵철로 검신을 만들고, 미스릴로 코팅 작업을 하면 청령이 원하는 검이 만들어진다. 다만 가격이 만만치 않다는 맹점이 있었지만, 청령은 그런 사실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었다.
“갑옷은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청령은 이번에는 전체적인 외형이 둥글둥글해서 충격을 분산해 주는 라운드 타입의 하프 플레이트 메일을 들어 보았다. 볼 때는 50근은 나갈 것 같았지만 막상 들어 보니 철판이 매우 얇았다.
‘중원의 무인들이 보면 미쳤다고 놀리겠군.’
중원의 무인들은 몸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무거운 물건은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하물며 육중한 이 플레이트 메일을 몸에 걸친다면 무인이라 할 수 없었다.
“이 갑옷과 검은 제작 기간이 족히 열흘은 걸립니다. 그때 오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때까지만 이 검을 쓰시는 건 어떻습니까?”
대륙의 기사들이 제일 많이 사용하는 롱소드였다. 철로 만든 값싼 롱소드지만, 드워프가 제작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멀리서도 검을 구입하러 오는 자들이 있었다.
“이 검들은 모두 저 드워프 어르신이 만드십니까?”
“아니오. 트라바체스 님은 평소 우리가 작업하는 것을 눈으로 보시며 지적을 해 주실 뿐입니다. 직접 작업하시는 경우는 드뭅니다.”
“직접 작업하시는 모습을 보니 특별한 일이 있나 보군요.”
“예, 타 영지에서 이름 높은 기사들이 주문제작을 하곤 합니다.”
청령이 롱소드의 검신 부분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따아아앙.
인간이 만든 것과는 차원이 다른 소리다. 청령은 최대한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드워프가 신의 손재주를 가졌다더니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가르치는 제자들의 수준만 해도 대단하지 않은가.
“그럼 열흘 후에 오도록 하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기사님.”
청령은 받아 든 롱소드를 검집과 함께 왼쪽 옆구리에 차고 대장간을 나섰다.

청령이 곧바로 향한 곳은 연무장이 아닌 옷가게였다. 이곳에 와서 마땅히 입을 만한 옷은 죄다 기사가 되어 몇 벌 얻은 예복이나 시종의 옷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 어서 오십시오.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옷가게 주인이 청령의 검집을 보고 겁에 질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평민들에게는 기사라는 신분이 상당히 무거운 위압감을 줄 수도 있었다.
“평상시에 입을 만한 옷이 몇 벌 필요합니다. 비단옷이 아닌, 입어도 거북함이 없는 천이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것을 주문할 거라 생각했던 주인이 대번에 화색을 띠며 청령을 한쪽으로 안내했다.
“그런 것을 찾으신다면 이곳에 정말 잘 오신 겁니다. 우리 가게는 삼십 년 전통을 가진 곳으로, 없는 옷이 없습니다. 자자, 이 옷은 어떠십니까?”
주인의 추천에 따라 요즘 유행한다는 옷 몇 벌을 싼값에 구입할 수 있었다. 청령은 제값을 주고 사려 했지만 주인이 한사코 거절하며 싸게 쥐여 준 것이다.
청령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거울을 쳐다봤다. 머리카락이 생각보다 길어서 신경 쓰이는 부분이 많았다.
“밖에 나온 김에 머리도 정리해야 하나? 이제 부단장이라는 신분이니까 사람들의 이목도 신경 써야 할 텐데.”
청령은 말을 하다 말고 귀를 자극하는 소리에 그만 거울에서 눈을 뗐다. 옷가게 뒤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안녕히 가십시오!”
청령이 그대로 떠나자 주인이 기쁜 표정으로 청령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역시 아직까지 기사는 평민들에게 낯설고 상대하기 어려운 신분임이 확실했다.
가게를 나선 청령이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사각사각!
옷가게 뒤쪽으로 갈수록 소리가 점점 커지자 청령은 어렵지 않게 그곳을 찾을 수 있었다. 성벽의 아랫부분의 땅이 조금씩 파이더니 이내 자그마한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잠시 후 거대한 배낭이 안으로 쏙 들어왔다. 그 뒤를 이어 젊은 여인이 그 구멍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으으읏, 여행하면서 살이 쪘나? 왜 이렇게 큰 구멍에 내 얇은 허리가 못 지나가는 거야!”
몸이 구멍에 낀 듯 여인이 오만가지 표정을 짓더니 이를 악물고 몸을 비틀었다. 청령이 도와줄까 생각한 순간, 여인이 몸을 세차게 흔들어 마침내 구멍에서 빠져나왔다. 그녀가 옷에 묻은 흙을 털어 내면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휴우. 사람이 건량만 먹다가 죽으란 법은 없구나. 빨리 여관이라도 찾아봐야겠…… 엇!”
이내 눈이 마주친 청령은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몰라 그녀를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성벽 아래 흙을 파고 들어온 신기한 여인.
그녀가 청령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시건방진 표정을 지었다.
“뭘 봐, 여자 처음 봐?”
“…….”
너무나도 태연한 그 물음에 청령의 몸이 굳어 버렸다. 뭐라고 대꾸는 해야겠지만, 마땅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건 아니고…… 전 프로시안 영지의 에이전트 기사단 소속 부단장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분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말한다는 것은 그녀가 상당히 높은 귀족이라는 것을 뜻했다. 보통 평민들은 방금 전 들렀던 옷가게 주인처럼, 기사라는 존재를 어려워하고 껄끄러워했다.
‘그런데 왜 귀족이 이런 구멍을 통해 들어오려고 하지? 도개교가 있는데.’
“신분을 말씀해 주십시오. 치안대나 경비대 소속은 아니지만, 영지에 침입한 자를 처분할 권리는 있습니다.”
그 말에 그녀는 난처해졌다. 신분증이 있었다면 이런 개구멍이나 파서 들어왔을 리가 없었다.
“흥! 이런 시골 영지의 기사가 들어 봤을 리가 없겠지만, 베리카 백작의 딸이 바로 나다. 여행 중에 신분증을 잃어버려서 마땅히 대처할 방법이 없다.”
“베리카 백작?”
그러고 보니 언젠가 들어 본 적이 있다.
베리카 백작.
슈레이더 왕국을 좌지우지하는 대부호 중 한 명이었다. 이 여인이 정말 베리카 백작의 딸이라면 처벌하기가 상당히 껄끄러웠다.
“수행원은 어디 있습니까?”
청령이 주위를 스윽 둘러보았지만 수행원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없어! 나 혼자 여행한 거란 말야!”
정확히 말하면 가출이었다. 청령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배낭을 집어 들었다.
“그렇다면 만약을 대비해 소지품 검사를 하겠습니다. 귀족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곧바로 풀어 드리죠.”
청령은 여인이 ‘어어?’ 하며 당황해 하는 사이에 재빨리 배낭을 열어 소지품을 하나 둘씩 꺼내 보았다. 옆구리에 찬 단검을 빼고는 위협이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도 나오지 않았다.
청령이 그녀에게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소지품 중에는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귀족에게는 자신을 증명할 가문의 문신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뭐?”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붉게 물들었다. 베리카 가의 문장은 나라를 지키는 신성한 방패의 형상이다. 그런데 그것이 하필이면 허벅지에 새겨져 있었다. 바지를 걷어 올려 속살을 훤히 보여 줄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망설이기 시작했다.
“없습니까?”
“그래! 보여 준다, 보여 줘! 너 이상한 생각 하면 죽을 줄 알아!”
청령이 재차 묻자, 그녀는 이를 뿌득뿌득 갈며 그대로 바지를 걷어 올렸다. 그러자 약 3센티미터 정도의 하얀 카이트 실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곧바로 바지를 내렸다.
“됐지?”
문신은 확실했다. 베리카 가를 증명하는 문신이었다.
“예, 됐습니다.”
“나 간다! 또 붙잡지 마.”
“…….”
그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자 청령은 점이 되어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군. 베리카 백작의 딸이라…….’
세리아와 비교하면 너무 철이 없어 보였다.
청령은 곧바로 영지의 본관으로 향했다.

로이니스는 아직도 붉어진 얼굴을 들지 못했다. 뺨에 손을 대자 처음 느껴 보는 이상한 열기에 손이 뜨거웠다.
‘왜 이러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골똘히 생각하면 할수록 자꾸 청령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반반한 얼굴. 부단장이라는 직위가 어울리지 않는 나이.
‘아닐 거야. 아니겠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청령의 모습을 잊으려 애쓰자 곧바로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