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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르트 1권(19화)
8장 화이트 폰 이안(2)
프로시안 남작이 무리하게 장안의 숲의 초입을 토벌하려는 이유는 광산에 있었다. 수백 년간 묻혀 있던 광산이 하나 둘 암암리에 알려지자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번 일로 수천의 용병들과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그동안 모아 둔 돈은 모두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프로시안 남작은 이번 일에 목숨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가 이번 일을 무리하게 추진한 이유는 그것이었다.
“A급 용병만 오십 명입니다. B급 용병이 오백이고, C급 용병이 이천 명입니다. 용병들과 본 영지의 마법사들을 합쳐 총 열다섯 명 정도이며, 이번 토벌 성공 확률은 약 85퍼센트입니다. 변수가 생긴다 하더라도 70퍼센트 이하로 내려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부관의 말에 남작이 화색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최근에 몸이 나은 후에는 검술에 심취해 있었다. 본래 검을 좋아하던 그의 경지는 익스퍼트 중급 정도였다. 그런 남작이 선봉에 서서 직접 토벌에 가담한다고 하니 군의 사기가 오를 대로 올라갈 것이다.
그때 부관이 남작의 곁으로 살짝 다가왔다.
“남작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는 외부의 손님입니다. 그를 에이전트 기사단의 부단장에 앉힌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작이 내뱉은 충격 발언.
현재 동관에서 머물고 있던 청령을, 자신을 치료해 줬다는 명목으로 에이전트 기사단의 부단장 자리에 앉힌 것이다. 현재 부단장인 욘지까지, 이로써 부단장은 두 명이 되었다.
기사들의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가뜩이나 몬스터 토벌을 앞두고 있는 이때 기사단이 동요한다면, 그것은 사기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왜? 내가 실력이 없는 자를 부단장에 앉혔겠는가?”
“남작님의 눈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오나, 그 나이에 비해 부단장의 실력을 가졌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입니다.”
남작이 입가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후후, 걱정 말게나. 그것은 나중에 알게 될 걸세. 자네는 오후에 있을 기사 서임식이나 빨리 준비하는 게 좋을 걸세. 그는 이번 토벌 작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자라서 말이야.”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해가 중천에 뜨자 연무장에서 기사 서임식이 진행되었다. 당연히 내로라하는 영지 내 유명인사들이 모두 모였다. 그 자리에 기사들이 빠질 수 없었다.
연무장에 나선 에이전트 기사단은 놀란 토끼처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욘지와 같은 부단장의 직위를 받은 작자가 생각보다 젊기 때문이었다.
“아, 경들. 어서 오시오.”
프로시안 남작이 그들을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기사들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남작에게 목례했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그로퍼가 생각보다 좋아 보이는 남작의 모습에 화색을 띠며 말했다.
“쾌차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다 경들이 걱정을 해 주어서 그렇소.”
“별말씀을…….”
“자, 자리에들 앉게나. 마땅히 축하받을 일이니만큼, 자네들이 빠질 수는 없지.”
영지의 재정이 말이 아니었기에 서임식이 거창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하나, 약소하나마 남작의 마음씀씀이가 느껴지는 서임식이었다.
빠바밤!
기사들이 지정된 자리에 앉자 그에 맞춰 나팔 소리가 울렸다. 서임식이 시작됨을 알리는 소리였다.
하얀 제복을 차려입은 청년이 들어오자 양옆에 앉아 있던 하객들의 눈이 그의 발걸음을 쭈욱 따라갔다.
빠른 걸음으로 제단에 올라간 남작이, 옆에 경건하게 서 있던 마리엔 신관에게서 하얀 검을 받아 들었다.
청년이 남작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기사의 조약을 읊어 보아라.”
청년, 아니 청령은 진작에 레나에게서 건네받은 쪽지를 달달 외워서 그대로 읊기 시작했다.
“제1조, 기사는 약한 자를 보호한다. 제2조, 나라가 위험에 처하면 누구보다 앞에 나선다. 제3조, 절대 악에 해당되는 일은 하지 않으며, 이 세 개의 서약에 대해서는 주신 마르드 님께서 증인으로 입관하신다.”
에이전트 기사단이라면 주군과의 관계에 관련된 조항이 몇 개 더 있었지만, 청령이 읊은 것은 어디까지나 자유기사의 조항이었다.
청령은 최소한 프로시안 남작령에 있는 동안만은 자유기사의 신분으로 부단장의 직위를 허락받았다. 유라시아 대륙의 신분증이 없는 청령에게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자유기사의 신분이라면 최소한 어딜 가도 대접받을 수 있었다.
남작은 검을 들어 청령의 양어깨와 머리에 댄 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경에게 화이트라는 성을 하사하며, 여기에 모인 하객들이 그대가 자유기사가 되었음을 증명할 것이다. 또한 일 년으로 계약한 에이전트 기사단의 부단장 직을 아무 탈 없이 수행하길 바란다.”
청령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부단장의 지위를 받아 줘서 고맙네.”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청령이 고개를 들어 남작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남작이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청령은 그제야, 이곳에서도 전음과 같은 수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크게 놀랐다. 사실 그가 전음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왼손 약지에 낀 반지 덕분이었다. 그것은 마법 아티팩트로, 마나를 이용해 상대의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효과를 내는 마법인 매직마우스가 걸려 있었다.
청령도 마주 웃으며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어차피 세리아 소저에게 은공을 입은 몸입니다. 그 일을 어떻게 갚을까 고민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남작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욱 청아한 목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랐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청령이 싱긋 웃는 것을 보고 그가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마나를 사용하지도 않고 매직마우스 같은 수법을 사용하다니. 자신은 전대부터 내려져 오던 반지가 아니라면 이와 같은 수법은 불가능했다. 점점 청령이 맘에 드는 남작이었다.
서임식이 끝나자 봇물 터지듯 계속되는 하객들의 축하인사에 청령은 결국 녹초가 되어 동관 자신의 방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는 에이전트 기사단의 부단장 직을 수행하기로 계약했지만 부단장이기 전에 자유기사였다. 그 때문일까?
기사들이 머무는 숙소가 아닌, 동관에서 머무른다고 그에게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 피곤하군.”
청령은 입고 있던 하얀 제복을 벗었다. 때마침 들어온 레나가 하얀 제복을 주워 들고는 청령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어렸다.
“무슨 일이야?”
“이제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은 분이라, 예전처럼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청령이 평민일 때는 아무리 아가씨의 손님이라고 해도 편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까마득히 높은 사람이다. 귀족은 아니지만 그래도 준귀족으로 취급되는 기사. 게다가 영지에 하나밖에 없는 기사단의, 무려 부단장의 직위다. 이제 일개 시녀 따위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였다.
피곤한 표정으로 누워 있던 청령이 소리 내어 웃었다.
“푸하핫, 그런 것은 상관하지 마시죠. 언제 우리 레나 아가씨가 상관하고 살았나?”
그의 말투에 레나의 표정이 굳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비딱한 것을 보니 놀리는 것이 확실했다.
“오라버니! 정말 그러실 거예요?”
“그래, 평소처럼 지내면 돼. 안 그러면 오히려 나만 불편해진다고.”
레나가 꽥 소리치자 청령이 씩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오히려 당황하는 것은 레나였다.
“왜, 왜요?”
“너 하루에 삼재심법을 얼마나 운용해?”
레나의 얼굴에서 잡티가 사라졌다. 사실 그녀는 시간이 나는 대로 삼재심법을 운용하고 있었다.
레나가 검지와 엄지 사이를 살짝 떼었다.
“이, 이 정도쯤?”
손을 떠는 것을 보니 필시 거짓이라는 것을 눈치 챈 청령이 살짝 웃었다.
“웬만하면 그전처럼 하루에 조금씩만 하도록 해.”
레나의 내공을 살펴보니 보통 사람보다도 훨씬 많은 양이 모여 있었다. 적어도 그로퍼 정도 되는 절정 급의 기사라면 충분히 알아볼 소지가 있었다. 그렇다면 레나를 추궁할 수도 있었다. 일개 시녀가 가질 수 없는 양의 마나를 소지하고 있는 것이 궁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알았어요.”
청령은 레나에게 청명심법마저 가르칠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아무리 이곳이 이계라 해도 청성의 비술을 함부로 가르쳐 줄 순 없었다.
똑똑―!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청령이 입가에서 미소를 지웠다. 레나가 방문을 열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방 밖에는 세리아가 서 있었다.
“아, 무슨 일입니까? 세리아 아가씨.”
평소에 별로 볼일이 없었던 세리아였기에 의아한 마음에 그렇게 물었다. 세리아가 힐끔 쳐다보자, 레나는 곧바로 방을 나갔다.
“기사 서임식 때문에 피곤하실 텐데 죄송해요. 꼭 전해 드릴 말이 있거든요.”
“아닙니다.”
세리아가 주위를 스윽 둘러보더니 청령을 바라보았다.
“화이트 경, 숙녀를 이렇게 세워 두실 참인가요?”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묻는 세리아의 말에 청령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자리를 가리켰다. 청령은 화이트라는 성이 생각보다 맘에 들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화이트 경이 아버지의 한기를 치료해 줬다는 말을 들었어요. 혹시 당신은 마법사인가요?”
세리아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마법사라면 응당 심장 부위에 마법서클을 두고 마나의 냄새가 물씬 풍겨야 할 테지만, 정작 청령에게서는 마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청령을 볼 테마다 느껴지는 먹향 때문에 그를 마법사라고 의심했던 것이다. 게다가 한기를 치료하는 것은 마법사나 신관이 아닌 이상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법사는 아닙니다.”
정확히 말해 청령은 마법이란 학문 자체를 알지 못했다. 그저 노인장의 기억으로나마 살짝 이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법사도 아니고, 신관도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대체 누구죠? 그리고 왜 그날 룩커 강에 있었던 거죠?”
“…….”
청령은 그녀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이계에서 왔다고 한다면, 라인하르트 제국의 마지막 핏줄이라 한다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믿어 줄까?
청령이 머리를 굴린 끝에 그럴듯한 대답을 꺼내 놓았다.
“저는 펠타온 제국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한때나마 귀족……이었습니다.”
“한때나마? 그렇다면 가문이 멸문?”
청성파가 멸문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청령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도 살짝 믿는 눈치였다.
청령의 얼굴이 굳는 것을 본 그녀가 황급히 사과했다.
“죄송해요.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아뇨, 이미 과거의 일입니다. 그리고…… 도주하던 도중 룩커 강으로 떠밀려 오게 된 거죠. 가문을 멸문시킨 흉수들과 싸우다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절벽으로 뛰어들었는데, 운 좋게 아가씨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죠.”
잠룡수라대가 청성파를 멸문시킨 흉수였으니, 이 말도 반은 맞는 말이었다.
“그럼 당신은 기사로군요. 사실 반신반의했어요. 어렸을 적부터 천재라는 말을 듣고 자란 제가 가늠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수가 제 나이 또래에 있으리라고는…….”
기사의 나라라 불리는 펠타온 제국이니만큼, 그녀는 청령이 제법 명망 높은 가문의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당신은 이제 무엇을 하실 생각이죠?”
‘응당, 청성파를 재건해야죠’라고 대답할 순 없었다.
“가문을 부활시킨 뒤 그 흉수들을 제 손으로 꼭 처단해서 허무하게 죽은 분들의 넋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그럼……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말씀이군요.”
청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계속 머물 생각이었다면 애당초 자유기사라는 작위를 받을 연유가 없었다.
그리고 부단장 직위도 고작 일 년 계약을 맺은 것뿐이었다. 세리아는 잠시 섭섭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그녀의 표정에, 청령은 잠시 넋 나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뭘 잘못했지?’
그렇게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을 때, 방을 나서던 그녀가 청령의 전신을 스윽 쳐다보았다.
“명색이 영지를 대표하는 에이전트 기사단의 부단장인 화이트 경이 검과 갑옷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군요. 내일 아침 일찍 성 외곽에 있는 대장간으로 가도록 하세요. 이 성에는 어차피 대장간이 하나뿐이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쾅!
자기 할 말만 하고 방문을 거칠게 닫아 버린 세리아의 뒷모습을 보고 있을 때, 레나가 주위를 살금살금 살피다가 들어왔다.
“아가씨께서 뭐라고 하셔요? 아까 돌아가실 때 보니까 표정이 장난 아니시던데.”
“몰라, 나도.”
“진짜요?”
“그렇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