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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르트 1권(22화)
9장 로이니스(上)(2)
칸이 초췌한 모습으로 숙소로 들어왔다.
요즘 들어 영지에 용병들을 불러들이는 바람에 처리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닌 데다가, 용병, 마법사들과 팀워크를 맞추려다 보니 하루에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칸은 목욕탕으로 갈까 하다가 너무도 피곤한 나머지 그냥 수면을 취하자고 마음먹었다. 곧바로 발걸음을 방으로 옮긴 그는 방문이 살짝 열린 것을 보고 의아하게 여겼다.
“응? 시녀들이 문을 안 닫고 나갔나? 이것들을 정말! 시간이 나면 단단히 혼이라도 내줘야 되겠군.”
시녀들이 평소에 문을 열고 다니면 이후 귀족들을 모실 때 영주가 욕을 먹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것을 바로 고쳐 주자 마음먹은 칸이 방문을 거칠게 열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칸 아저씨.”
“어라? 이런 밤에 무슨 일이십니까, 아가씨?”
세리아는 들고 있던 책을 살짝 덮고는 옆으로 치웠다. 휴식을 원했던 칸은 삐딱한 표정을 짓고서 곧바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일단 앉고 나니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다.
“요즘 칸 아저씨 근황 좀 확인해 볼까 와 봤어요. 그냥 이것저것 궁금한 것도 있고, 음…… 밤에 잠이 오질 않아서 그런지 스승님이랑 오랜만에 얘기도 나누고 싶고…….”
손가락으로 입술에 침을 발라 가며 말하는 세리아의 표정에 칸은 웃음을 지었다. 어렸을 때부터 세리아를 딸처럼 키워 왔으니 그녀의 그런 표정이 너무도 귀여웠다.
문득 세리아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늘…… 그 사람 대단하더라고요.”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화이트 경이요. 기사들의 불만을 한순간에 잠재워 버렸어요. 오늘 그로퍼 경에게 여쭈어 보니 기사 중 누구도 이젠 그의 실력을 의심하는 자가 없다나 뭐라나.”
“제가 뭐라고 말씀드렸습니까? 하하하. 그래도 펠타온 제국의 기사들이 대단하긴 한가 봅니다.”
멋쩍게 웃는 칸을 보며 세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생각하면 이상하게 왼쪽 가슴이 아팠다.
좋아하는 감정은 아니었다.
지금껏 느껴 보지 못한 그런 감정이었다.
‘그런데…… 떠날 거라고?’
침울해 하는 세리아를 보며 칸 또한 작게 한숨을 쉬며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것은 그가 들어오자 곧바로 덮고 옆으로 밀어 버린 책에 관한 것이었다.
“아가씨, 저 책은 라인하르트 제국에 관련된 책이로군요.”
“예. 여신의 축복을 받은 라인하르트 황제들이 과연 어떻게 통치를 했는지 궁금했거든요. 이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땅을 40퍼센트나 차지하고 있던 나라가 어떻게 그 오랜 역사를 자랑해 올 수 있었는지.”
“라인하르트 제국. 제가 젊을 때만 해도 그곳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지요. 아! 용병들에게 듣기로 라인하르트 제국을 멸망시킨 것은 다름 아닌 배신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배신이요?”
“뭐, 떠돌아다니는 얘기긴 합니다만. 아시다시피 여신의 축복이란 능력은 남성에겐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카리스마를, 여성에겐 매력을 말합니다. 그 능력을 시기한 한 귀족이 황제를 죽였다는 얘기죠. 뭐, 어찌 됐든 발란은 일어났고 라인하르트는 멸망. 그 뒤에는 다름 아닌 프라스 제국이 있었다, 뭐 이런 얘깁니다.”
라인하르트 제국이 멸망한 뒤 제일 이득을 본 나라가 바로 프라스 제국이었다. 라인하르트 제국의 곡창지대와 철과 미스릴의 생산지를 독점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라인하르트 황족들은 욕심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멸망한 걸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황족들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신하들에게 맡기고 죽었다고 합니다.”
* * *
선봉에 선 기사들이 허무하게 대형 몬스터의 먹잇감이 되지 않게 하겠노라 호언장담한 청령은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다. 요즘 들어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노인장의 기억이 점점 구체적으로 드러나면서 라인하르트 제국이란 이름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왜 이유 없이 그들에게 중원의 기술들을 가르치려 했을까.’
단순히 생존 확률을 높이려는 생각이었을까?
그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이야기책에나 나올 법한 성인군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난 단지 이곳에 청성의 혼을 뿌리고 싶었을 뿐이다. 나에겐 노인장의 부탁을 들어줄 정도의 용기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어.’
사천을 휘어잡던 청성이 무너졌다는 생각을 할 때만 해도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사제들, 사형들, 장로, 장문인까지 청성파의 모든 가족들이 혈파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그들의 울부짖음이, 눈물이 보여 주고 원하던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다.’
청성파의 재건. 하지만 그것뿐만 아니라, 자신을 구해 준 노인의 기억 속에는 낯설지 않은 존재들이 엿보였다. 마음이 자꾸만 기울어져 갔다.
청성파가 무너질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보다, 라인하르트라는 제국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 사실이 마치 잔잔한 마음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라인하르트 대제국의 국민들은 모두 어디로 뿔뿔이 흩어졌을까.’
노인의 기억 속을 헤집고 다녀서 얻은 사실은, 전 대륙의 나라로 들어가 노예보다도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을 위해서도, 라인하르트라는 제국이 다시 세워지길 바라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 나라는 재건되어야만 했다.
‘어째서 하늘은 나에게 이토록 힘든 시련을 주었는가!’
청령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황태자라는 신분.
자신이 기억도 못하는 아기였더라도 그것은 대단한 신분이었다. 노인의 기억 속을 엿보고 나서야 그 사실이 정말 실감나기 시작한 것이다.
‘도대체 난 무엇을 해야 하지?’
돈주머니를 찾기 위해 밤까지 기다렸다가 슬슬 움직인 로이니스는 생각보다 작은 영주의 성에 안심했다.
‘만약 컸다면 그 자식을 찾기가 힘들잖아. 그건 그렇고, 또 어떻게 들어가지? 생각보다 경비가 너무 삼엄하네.’
로이니스는 돈주머니 하나 찾자고 궁수들한테 벌집이 되고 싶진 않았다. 천천히 성문을 엿보다가 벗어나려는 순간, 성문 열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한스 아저씨! 존슨 아저씨! 이 밤에 경비 서느라고 수고가 많으셔요. 쉬엄쉬엄 하세요. 누가 여길 침입한다고……!”
그 말을 들은 로이니스가 뜨끔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편으로는 정말 쉬엄쉬엄 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란히 성문에 서 있던 중년 남자 둘이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껄껄껄. 알았다, 레나. 그런데 이 밤에 넌 무슨 일로 나가려는 것이냐?”
한스의 물음에 레나가 방긋 웃었다.
“그건 비밀.”
“예끼! 우리가 널 얼마나 귀여워하는데……! 넌 그 부단장이라는 오라버니가 그렇게 좋더냐?”
“예…….”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연 레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존슨이 그런 레나의 얼굴을 보고 턱을 괴었다.
“그러고 보니 레나, 요즘 피부 마사지라도 받냐? 바쁘다는 애가 피부가 너무 고와졌다.”
항상 뙤약볕에서 나뒹구는 한스와 존슨은 요새 레나의 피부가 좋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볼 때마다 레나의 얼굴은 하얗게 변하고 몸매 또한 균형 있게 변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머! 정말 그래요? 와아, 다행이다. 사실 오라버니께서 가르쳐 준 것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그런가 봐요.”
“쩝. 우리도 가르쳐 주면 안 돼?”
레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요, 아저씨들. 오라버니가 남들에겐 꼭 비밀로 하라 그랬거든요. 나중에 오라버니에게 여쭈어 볼게요.”
존슨과 한스는 아쉽다는 듯 입맛만 다셨다.
“올 때 아저씨들이 마실 만한 술이라도 한 병 사 올게요.”
“그래, 껄껄. 기대되는구나. 빨리 갔다 오너라. 조심하고!”
레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한스와 존슨은 성문을 닫아 버렸다. 그 어둠 속에서 로이니스가 눈에 이채를 번쩍이며 레나가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빌어먹을 도둑놈의 시녀란 말이지? 좋았어. 내 돈을 훔쳐 간 대가를 톡톡히 보여 주지.’
10장 로이니스(下)(1)
로이니스의 움직임은 매우 은밀했다. 그녀의 곁에서 바람이 불고, 그 바람이 불고 나면 그녀의 자취가 묘연해졌다.
“실프, 고마워.”
그녀의 앞에 있던 작은 바람 덩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놀라 넘어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바람이 대답을 하다니!
“실프! 저 아이를 절대 놓치면 안 돼. 네 어깨에 내 밥줄이 걸려 있다.”
바람의 하급정령 실프가 막중한 사명감을 불태우며 레나를 은밀하게 쫓았다. 그녀를 쫓는 로이니스 또한 발자국조차 남지 않고 주변에 동화해 버린 듯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관에 도착한 레나는 미리 가져온 가죽통에 싸구려 맥주를 가득 담았다.
“아줌마, 고마워요.”
“그래. 다음에도 또 오너라. 자, 가면서 이거라도 들어.”
“에이. 또 이런 것을 쥐어 주시네. 안 주셔도 된다니까.”
레나는 말로는 거부하면서도 손을 뻗어 냉큼 챙겼다. 그녀의 손에는 큼지막한 육포가 쥐여 있었다.
그 모습을 훔쳐보던 로이니스가 평소 거들떠도 보지 않던 육포를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환장하겠네. 아침부터 굶었더니 별별 음식 같지도 않은 것들이 다 먹고 싶…….”
흠칫.
그녀는 말하다 말고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앞서 가던 레나가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힐끔 돌아본 것이다.
“어라? 이상하다. 방금 뭔가 있지 않았나?”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인 레나가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하자 로이니스는 뒤에서 가슴을 쓸어 내렸다.
‘프로시안 영지는 시녀들까지 훈련을 시키나? 아니, 아무리 왕실 기사들이라고 해도 실프의 은신을 알아볼 리가 없을 텐데.’
단순한 우연이라 치부한 로이니스가 계속 레나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레나는 누군가 자신을 뒤쫓는다는 사실도 모른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다 작은 상점으로 들어갔다.
한스와 존슨에게 부단장을 거들먹거리며 일단 바깥으로 나오긴 했지만 사실은 시녀장의 심부름이 있었다. 은밀히 갔다 오라는 말에 청령의 이름을 팔아먹은 것이다.
“헤헤, 그래도 나온 김에 오라버니 몸보신할 것이라도 사 갈까? 흐음. 그러고 보니 오라버니가 부단장이 되셨는데 축하 선물 하나 준비 안 했네. 내가 너무 정신이 없었나?”
레나는 시녀장이 심부름 시킨 물건을 쭉 고른 후 구석에서 먼지가 잔뜩 쌓인 책 몇 권을 들고 나왔다.
“오라버니는 책을 아무거나 다 읽으시니까 선물로 가져가면 좋아하시겠지. 아저씨! 이거 얼마예요?”
“어차피 팔아도 제값도 못 받는 것들이니 1실버만 내놓고 가라.”
“우와, 정말 싸네요.”
프로시안 영지민들이 하루에 벌어들이는 수익은 평균 100실버 정도다. 1실버라면 무척이나 싼 가격이었다.
레나는 책을 품에 껴안고 싱글벙글하는 표정으로 곧바로 성안으로 들어갔다.
“한스 아저씨, 존슨 아저씨! 저예요, 레나!”
“어이쿠,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빠른 속도로 문이 열리자 그때를 기다린 로이니스가 바로 성으로 숨어 들어갔다.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레나와 경비병들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다시 성문을 닫았다. 경비병들의 관심은 오로지 레나가 쥐고 있는 가죽통이었다.
“자, 여기요.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그럼 다음에 뵈요.”
레나가 가죽통을 존슨에게 건네고 손을 흔들며 사라지자, 존슨 또한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래! 아이고, 좋아라. 한스! 빨리 와 봐. 냄새가 장난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