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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르트 1권(23화)
10장 로이니스(下)(2)


영주의 성으로 잠입해 들어온 로이니스는 이때만큼은 정말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실프를 불러들이고 바람의 중급정령인 실라페를 소환했다.
기사들과 실력 좋은 용병들이 있는 이상 실프로는 은신이 힘들 것이었다. 마나 보유고에 고여 있던 마나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로이니스의 고운 이마에 땀이 맺혔다.
얼마 전에야 고작 중급정령을 소환할 만한 실력을 갖게 된 로이니스였기에 소환하는 것만 해도 힘든 일이었다.
그녀는 앞서 가는 레나를 뒤쫓아 동관으로 슬며시 들어갔다.
―실라페,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저 여자를 쫓아가서 내 향수 냄새가 나는 물건을 찾아와 줘.
실프와는 달리 실라페는 마음속으로도 대화가 가능한 경지였다. 그녀가 그렇게 전하자, 실라페가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렇게 약 5분 정도를 기다리고 있자 실라페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찾았어?
실라페는 고개를 저었다.
―뭐야! 이곳 어디에도 없단 말이야?
실라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향수 냄새를 지웠다 해도 실라페가 찾지 못하는 것은 없었다. 실라페가 찾지 못한다면 애초에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때 갑자기 실라페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본관 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응? 짐작 가는 곳이 있다고?! 그럼 뭐 하고 있어. 당장 가자!
실라페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이니스가 본관을 향해서 무작정 달렸다. 그러다 문득, 실라페가 몸을 꺾더니 사람 없는 한적한 곳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로이니스가 잠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자, 실라페가 속도를 멈추며 우뚝 섰다.
“아……!”
로이니스는 한순간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눈에 연못을 앞에 두고 멍하니 앉아 있는 청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평민들이나 입을 법한 평상복을 입은 청년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진한 먹향을 풍기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도둑놈일까? 아니면…… 누구지?”
청년과의 거리가 상당해서 정확히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실라페를 믿고 앞으로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리고 그와 약 30미터를 앞에 두었을 때, 청년이 고개를 들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누구십니까?”
로이니스는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숨이 턱 막혀 왔다.
그 누가 실라페의 은신을 알아챈다는 말인가!
‘어라? 역시 그 빌어먹을 놈이네!’
얼굴을 확인한 그녀가 주먹을 움켜쥐고는 실라페에게 은신을 풀어 달라 요청했다. 어차피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돈주머니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알았지?”
“무엇을 말입니까?”
“내가 너한테 다가가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고!”
“풀이 꺾였습니다.”
그의 말에 로이니스가 자신이 걸어온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실라페가 발자국은 없애 줄 수 있지만 풀이 꺾이는 것은 원상태로 복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이곳에 당신이 계신다는 것은…… 영주님의 초대를 받으셨습니까?”
로이니스는 베리카 백작의 딸이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로이니스는 마침 핑계 삼을 것이 앞에 떨어지자 얼른 주워 먹었다.
“그, 그래. 난 정식으로 프로시안 남작님께 초대를 받아서 온 것이라고.”
“그렇습니까? 그럼 아침의 무례는 용서해 주십시오.”
“괘, 괜찮다. 아침엔 나도 신분증이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너도 네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으니까, 이번만은 특별히 용서해 주지.”
그녀가 선심 쓰듯이 말하자 청년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고뇌한 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에이 씨, 이렇게 잡스러운 얘기나 나누려고 온 게 아닌데! 빨리 내 돈 찾고 나가야 된단 말야.’
로이니스가 청년을 향해 당당히 손을 내밀었다.
“자, 이야기는 이쯤이면 됐고, 내놔.”
“무엇을 말씀입니까?”
청년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을 껌뻑이자 로이니스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좋은 말로 할 때 내놓으라니까. 지금 당장 내놓는다면 내가 특별히 용서해 줄 수 있어. 그러니까 내놔.”
청년은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탁탁 치더니 아무것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설마…… 그 많은 돈을 전부 써 버린 것은 아니겠지?”
“돈이요? 애초에 돈은 없었습니다만.”
로이니스가 냉큼 달려들려 하자 청년이 한 걸음 뒤로 빠졌다.
“무, 무슨 짓입니까!”
“흥! 발뺌한다 이거지? 좋다 이거야. 내 똑똑히 말해 줄 테니까 귓구멍 씻고 잘 들어. 내 돈주머니 내놓으라고, 이 자식아! 어디다 숨겼어?”
“돈주머니라뇨? 그건 무슨 소리입니까?”
청년, 아니 청령이 재차 묻자 로이니스는 기가 막힌 듯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오호라.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네가 안 준다면 나도 다 방법이 있거든? 실라페! 이 녀석 발 좀 묶어. 실토할 때까지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일 줄 알아!”
그녀의 말에 잔잔히 있던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더니 청령을 향해 나아갔다. 가만히 서 있는 청령을 보며 로이니스가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봐도 겁을 먹어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흥! 실토할 수밖에 없을걸? 실라페는 오우거의 발걸음도 막을 수 있다고!’

‘돈?’
청령은 돈이란 얘기에 잠시 회상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아니, 애당초 그는 그녀의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청령은 그녀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귀족가의 딸이라는 여자가 너무 철이 없어 보였다.
‘오늘만큼은 정말 혼자 있고 싶었는데, 하늘이 허락하질 않나 보군. 아니, 영지 안에서 하루 만에 두 번이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인연이라 봐야겠지.’
정말 짜증나는 인연이었다.
청령은 그녀와 대화를 나눈 후에 적당히 연못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혼자 생각하고 싶은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다가 문득 드는 의문.
그녀의 곁에 머물고 있는 형상화한 바람이 자신에게 살기를 드러내고 있다. 참으로 신기한 노릇이었다.
인간이 다룰 수 없다는 자연이 설마 인간에게 머리를 숙일 줄이야.
‘정령이라는 것이겠지. 그것도…… 바람의 정령이로군. 제법 강한 정령.’
중급정령 실라페. 대륙에서도 중급정령을 다루는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기사와는 달리 정령술사들은 오로지 자연의 선택을 받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수가 적은 마법사들보다도 훨씬 적었다.
청령은 유라시아 대륙에 와서 처음으로 정령이란 것의 실체를 볼 수 있었다.
“오호라.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네가 안 준다면 나도 다 방법이 있거든? 실라페! 이 녀석 발 좀 묶어. 실토할 때까지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일 줄 알아!”
그녀의 명령에 놀랍게도 정령이 청령의 이목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곧 한 줄기 바람이 청령의 다리를 감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당황한 청령이 그제야 송서초상비를 펼쳐 그 자리를 벗어났다. 검을 뽑을 시간도 없었다.
너무도 자유롭게, 자연스럽게 다가와 청령의 발을 묶어 버린 것이다.
놀란 것은 비단 청령뿐만이 아니었다. 로이니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람의 중급정령 실라페의 속도라면 아무리 익스퍼트에 오른 기사들이라 해도 쉽게 벗어나기 어려웠다. 하지만 청령이 너무도 쉽게 벗어나자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입을 벌리고 놀라는 사이 청령의 주먹이 그대로 움직였다. 그의 단전에서 움직인 한음지기가 그대로 주먹으로 뻗어 나왔다.
주변의 공기조차 얼어붙게 만드는 한기!
청령의 주먹에 파란빛이 번쩍이는 권기가 생성되었다.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로 선명한 권기였다.
콰앙!
권기가 부딪쳐 간 곳은 실라페의 바람이었다. 발을 묶으려 했던 실라페의 바람이 쩌적 얼어붙기 시작하더니 그대로 실라페까지 순식간에 얼려 버렸다.
“어? 어, 뭐, 뭐야! 시, 실라페가 얼었어? 너 설마…… 마, 마법?”
“이번 한 번은 오해로 생긴 일이니만큼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긴다면 영주님께 말씀을 드려 그대를 이 영지에서 추방하도록 하겠습니다.”
청령은 그 말과 함께 자신의 가슴팍에 들어 있던 돈주머니를 꺼내 그녀에게 던졌다. 그것은 청령의 것이었다. 돈주머니를 받아 든 그녀가 제법 묵직한 무게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제법 돈이 될 겁니다. 그대가 어찌하여 저를 범인으로 지목한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이것으로 끝내 주셨으면 합니다.”
“어? 어?”
청령은 그 말과 함께 등을 돌리고 사라졌다.
로이니스는 그의 신형이 점이 될 때까지 바라보다가 급히 실라페를 바라보았다. 그저 잠시간의 동결로 인한 것이었으니 실라페는 곧바로 원상태로 돌아갔다.
제대로 망신살이 뻗친 로이니스가 짜증스런 말투로 실라페에게 물었다.
“너는 대체 왜 저 녀석을 의심한 거야?”
그러자 실라페가 상황을 설명하듯 손을 이리저리 허공에 휘저었다.
“뭐라고? 당연하잖아! 오전에 저 녀석을 만났으니 내 향수 냄새가 나는 건 당연하지. 웬일이야? 실라페가 실수를 다 하고.”
실라페를 추궁하려던 로이니스는 뭔가 생각났는지 실라페를 역소환했다. 정령을 다룰 마나가 바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녀석…… 마법사일까? 아니, 마법사면 마법사지 왜 부단장 노릇을 하고 난리야…….”
혼자 애꿎은 땅바닥을 차던 로이니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좋았어. 난 궁금한 건 죽어도 못 참아. 그 녀석이 누군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 잠도 못 자!”
그녀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경비병들이 교대하는 시간을 틈타 문으로 살짝 빠져나갔다.

이른 아침부터 베리카 백작의 여식이 찾아왔다는 소식에, 칸과 세리아는 다소곳이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신분증이 없어 잠시 소란이 일긴 했지만 허벅지에 그려진 카이트 실드가 있는 이상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로이니스가 초라한 응접실을 보며 차를 홀짝 마셨다.
‘음, 프로시안 영지가 이번에 대대적인 장안의 숲을 토벌할 준비를 하느라 재정이 없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차 맛이 꼭 여관에서나 주는 디저트 같아. 향도 별로고.’
그녀는 귀족 체면상 맛이 없는 것은 먹지 못한다. 탁자에 차를 내려놓고 더 이상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세리아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 베리카의 백작의 여식이 가출했다는 소식은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바로 자신의 앞에 떡하니 앉아 있으니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 왔다.
칸과 세리아는 프로시안 영지에서는 높은 신분이지만 로이니스에 비하면 한참이나 아래였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이니스 님.”
“이 누추한 곳까지 다 찾아오시다니 영광이에요.”
그런 인사는 평소 듣던 것이라, 그녀는 손을 가지런히 무릎에 올려놓고 세리아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외모에 대해서는 슈레이더 왕국에서도 한 이름 당당히 내놓고 있는 로이니스였다. 하나, 지금 앞에 앉아 있는 별 시답지 않은 남작의 딸이 자신보다도 훨씬 고와 보이는 것은 왜일까.
“그건 그렇고, 여기까지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리아의 질문에 로이니스가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프로시안 영지에서 장안의 숲의 초입을 토벌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말야. 오면서 봤는데 정말 용병들이 많더라.”
“장안의 숲을 토벌하려면 그 정도는 당연하지요.”
세리아가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로이니스는 책을 통해 십만 대군으로도 토벌하지 못한 곳이 장안의 숲이라는 것을 배웠기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프로시안 남작님이 이번 일에 사활을 걸었다는 것도 잘 알아. 그래서 말인데, 나도 이번 그 토벌 작전에 끼워 줄 수 없을까?”
“예?”
베리카 백작에게 알려 한시라도 빨리 딸을 데려가라고 서신을 보내려 마음먹었던 세리아였다.
만약 로이니스가 프로시안 영지에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자신의 아버지가 베리카 백작의 눈 밖에 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었다.
베리카 백작이 슈레이더 왕국의 대부호인 만큼, 그의 눈 밖에 난다는 것은 사실상 다른 영주들에게도 밉보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너희도 알다시피 난 정령술사야. 특히 중급정령을 아주 잘 다뤄. 토벌이나 전쟁에서 정령술사의 존재 여부는 군사들에게 커다란 의지가 될 수 있어. 따라서 전쟁에 크게 기여할 수 있지.”
사실이 그랬다. 정령술사들은 마법사들과는 달리 캐스팅 할 필요 없이, 마법에 버금가는 기술을 차례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물의 정령은 사제처럼 치료도 할 수 있었고, 바람의 정령은 전투와 정탐에 능하며, 땅의 정령은 지리에 매우 능했다.
전쟁에서 정령술사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훨씬 귀한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세리아와 칸도 살짝 마음이 기우는 것을 막지 못했다.
“좋아요, 로이니스 님. 하지만 다친다면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어요. 그러니 토벌 중에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말아야 해요. 그래 주실 수 있다면…….”
로이니스가 세리아의 말을 끊고 크게 외쳤다.
“알았어! 걱정하지 마. 난 이제 너희에게 운 좋게 고용되어 프로시안 영지의 에이전트 기사단을 돕는 용병 정령술사로 활동하게 될 거야. 그러면 됐지?”
생각보다 이야기가 수월하게 풀리자 세리아가 활짝 웃었다. 그러면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함께 일하게 되어 반가워요, 로이니스 님.”
로이니스도 예의상 손을 마주 잡았다. 로이니스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나 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