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라인하르트 1권(25화)
10장 로이니스(下)(4)
쿠쿠쿠쿠쿠!
훈련장의 모래가 사방으로 튀었다. 병사 백 명이 모두 독기를 품은 채로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기사들도 저마다 비장한 표정을 짓고는 곧바로 그들을 향해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다섯 방향으로 퍼진 기사들이 이를 악물고 자신들에게 날아오는 목검을 쳐 내기 시작했다.
“그렇군. 훈련이라 이건가? 기사들이 무기에 마나를 깃들이지 않고 다섯이서 백 명을 상대하는 거로군. 쉽지 않겠어.”
기사 한 명이 상대해야 하는 것은 스무 명의 병사다. 마나를 사용한다 해도 쉽게 장담할 수 없다. 한데, 기사들은 마나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신체적인 능력과 기본 검술로 병사들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이 훈련에서 병사들은 강한 상대를 다수로 이기는 방법을 터득하고, 기사들은 사방에서 언제 휘둘러 올지 모르는 칼에 긴장하며 민첩성과 집중력을 향상시키는 놀라운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청령이 따로 지시하지 않은 사항이었다. 그런 점에서 토벌 작전을 위해 노력하는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부럽게 느껴졌다.
‘난 황태자인데……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았어.’
그렇게 생각하던 청령이 곧바로 고개를 세차게 돌렸다.
“아니, 난 부단장이야. 에이전트 기사단의 부단장. 원귀가 되어 넋을 위로받지 못한 청성파를 생각해야 할 때다. 난 태자 따위가 아니야……. 난 그럴 그릇이 못 돼.”
쓴웃음을 짓던 청령이 눈을 반짝였다. 어느새 힘이 부치기 시작했는지, 기사들이 스무 명 정도의 병사를 쓰러뜨린 후 온몸에 마나를 휘두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검에 마나를 깃들이지 않는다고 마나를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신체에 마나를 돌리면 훌륭한 무기가 된다.
기사들의 능력이 대폭 상승하자 병사들은 그 기세에 완전히 주눅 들었다. 그때 훈련대장 한스가 앞장서서 달려 나갔다.
“기사들이 마나를 사용한다! 마나는 유한한 것. 저들은 지쳤다! 더 밀어붙여라! 승리가 눈앞에 보인다!”
“우와아아!”
“이길 수 있다!”
한순간에 사기를 끌어올린 병사들이 동귀어진 하듯 마냥 몸을 내던져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다.
“으음!”
기사들의 실력이 아무리 좋다 해도, 병사들 역시 다른 영지에서는 충분히 수비대장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잔뼈가 굵은 자들이었다.
검을 잡은 손 하나로, 한 번에 다섯 방향에서 찔러 오는 손속을 막을 수는 없었다.
퍽퍽퍽!
막는 것보다 맞는 것이 더 많아졌다.
기사들의 얼굴이 낭패감에서 당혹감으로 물들고, 그들의 표정이 점차 고통스럽게 변함을 알 수 있었다. 한 기사가 수십여 대를 얻어맞고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남은 네 기사도 훌륭히 버티긴 했으나 간신히 막을 뿐이지 역공할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청령의 얼굴에 실망이 어렸다.
‘최소 내가 가르쳐 준 삼재보만 펼쳤어도, 저들에게 저리 쉽게 패하지는 않았을 것을. 하긴 삼재보를 가르치는 것만 생각했지, 그 위력은 보여 주지 않았구나.’
청령이 누워서 숨을 헐떡거리는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한 기사가 청령을 발견했다.
“이안 부……단장님.”
못 볼 것을 보여 줬다는 듯 그들은 저마다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부단장 앞에서 병사들에게 깨지는 모습을 보여 줬으니, 훈련을 맡은 부단장에게 면목이 없는 것이다.
청령이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왜 졌는지 아십니까?”
“저희들의 부족함입니다.”
진심으로 사죄하는 기사들의 모습에 청령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후후. 잘 보세요, 왜 질 수밖에 없었는지…….”
청령이 그 말과 함께 훈련 때문에 쉬고 있던 훈련대장 한스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한스도 청령의 얼굴을 아는지라 얼른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이안 부단장님을 뵙습니다.”
“반가워요. 한스라고 했습니까? 방금 전의 훈련…… 정말 인상 깊게 봤습니다.”
“칭찬이라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청령이 작게 웃음 지었다.
“후훗, 방금 했던 그것, 저에게도 똑같이 백 명으로 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한스가 대경실색해서 말을 더듬었다. 당황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청령의 행동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호, 혼자 말입니까?”
“예. 왜요? 안 되나요?”
“그것이 아니오라…….”
병사들은 물론이거니와 기사들까지 모두 딱딱하게 굳었다. 백 명을 상대하겠단다. 말 그대로 혼자서 백 명의 병사들을 말이다. 자신감을 넘어서 오만이라고까지 보일 정도였다.
“휴식 시간이 필요하다면 10분 정도 기다려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어느 정도의 시간은 필요할 테니까요.”
청령은 훈련장에 모인 병사들의 수가 부족할까 염려한 것이다. 하지만 워낙 이 훈련에 이골이 났던 탓인지 곧이어 백 명 모두가 다시 훈련에 임했다.
기사 하나가 청령의 곁으로 다가왔다.
“혼자서는 무립니다. 저희도 회복하는 대로 돕겠습니다. 이번에도 백 명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최소한 아까보다는 나을 겁니다.”
“아뇨.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기가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렸죠? 진 이유가 무엇인지……. 당신들이 배운 삼재보, 결코 헛배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드릴 테니까.”
청령이 그들을 뒤로한 채, 백 명의 병사들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청령의 모습을 확인한 한스가 손을 높이 들어 외쳤다.
“모두 산개하라!”
쿠쿠쿠궁!
방금 전과 같이 병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고작 한 명을 상대하는 것이었지만, 병사들 모두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법이야.”
무려 백 명이 넘는 병사들이 뿜어내는 살기, 한순간도 풀지 않는 긴장. 한 명을 상대하더라도 최선을 다한다. 그것은 어느 영지의 병사들에게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번에는 단 한 명이다. 상대의 신분을 생각하지 마라! 이번 싸움이 끝나면 오늘은 모두 휴식이다!”
“우와아아아!”
병사들이 하늘 높이 목검을 들고 외쳤다. 부단장을 상대로, 그리고 단 한 명을 상대로 검을 들기 꺼려 하던 병사들도 이내 쌍심지를 켰다. 토벌을 이십 일을 앞두고 있다 보니 쉬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들에게 휴식은 달콤한 시간이었다.
“자, 공격이다!”
“공격!”
쿠쿠쿠쿠쿵!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병사 백 명이 포위망을 좁혀 오며 그대로 청령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중심에 선 청령이 달려오던 이들을 바라보며 슬며시 발을 떼었다.
‘다수와 싸울 때는 기선제압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해야 할 일이다.’
기사들의 눈에 청령의 발걸음은 너무도 가벼워 보였다. 병사들이 보기에는 그냥 이리저리 걷는 듯한 걸음. 하지만 그의 발에서 펼쳐지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삼재보!’
매일같이 땅을 밟으며 수백 번을 넘어지고 나서야 간신히 따라 할 수 있었던 기묘한 보법!
청령의 발걸음이 땅바닥을 밟았다.
쿠우웅!
엄청난 대지의 울림! 중원에서 삼류보법으로 취급받는 삼재보가 청령의 발에서 신기를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삼재보가 아니었다.
쿠웅!
청령이 다시 한 번 땅을 밟자 그의 주위로 파문이 일었다. 훈련장이 가뭄이 일어난 듯 주위 20미터가 쩌적 갈라졌다. 모래먼지가 부옇게 일어나, 달려드는 병사들의 시야를 가렸다. 그때였다.
천천히 걷던 청령의 신형이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 어디!”
“제길, 앞이 안 보여!”
한 번 올라온 모래먼지가 오랜 시간 사라지지 않았다.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청령의 내공이 들끓었다.
십이경맥의 손상으로 꾸준히 치료는 하고 있었지만 이제 옛 내공의 반 정도를 찾았을 뿐이다.
내공으로만 따지면 절정의 마지막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깨달은 이치는 초절정이었다.
때문에 그가 펼친 삼재보는 더 이상 삼재보라 부를 수 없었다. 보고 있던 기사들이 하나같이 모두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최고다!”
누군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다른 기사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구멍에 침이 한가득 고여 꼴깍 넘어갔다.
그들은 청령, 아니 이안이 마나를 활용하지 않고, 삼재보를 펼치며 병사들을 모두 제압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안의 입이 살짝 열렸다.
‘난 청령인가, 이안인가.’
한 사람의 이름일 뿐이지만 각각 가지고 있는 신분은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면 난…… 두 가지 전부를 짊어지겠다.’
이안의 목검이 병사의 복부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욱!”
약해 보이는 공격이었지만 맞는 병사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보기와는 너무나 다른 공격이었다. 느려 보이는 공격이라 그냥 달려들었더니, 맞고 나니 후회스러웠다.
그 병사를 끝으로 정확히 오십 명의 병사가 바닥을 기었다.
이미 모래먼지는 가라앉았다. 모두가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섣불리 공격을 나서지 않았다.
정확히 오십 명의 병사가 당한 것은 고작 10분.
쓰러진 병사들 가운데에는 한 청년이 당당히 군림하고 있었고, 그는 힘들어 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이안은 예전 귀창과의 싸움에서 체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필사적으로 체력 훈련을 해 왔다. 예전과는 차원이 다른 체력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병사 백 명이 손도 한 번 못 써 보다니! 역시 대단합니다. 이안 부단장님, 죄송하지만 병사들이 더 이상 싸운다 해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는 한스였다. 처음 이 같은 말도 안 되는 대련을 할 때만 해도 속으로는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는데 이안의 무위를 보고 나니 마음이 싹 바뀌었다.
그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하자 이안 역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때, 이안의 입에서 달콤한 한 마디가 나왔다.
“그만 할까요?”
병사들의 눈이 모두 한스를 향했다.
‘그만 해라! 그만!’
‘죽을 것 같다. 이 분위기 파악도 못하냐!’
한스는 다행히도 병사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예, 송구합니다만 졌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한스 훈련대장, 그리고 병사 분들도.”
이안은 절망, 그리고 희열을 느끼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들은 모두 얼이 빠진 듯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떤 것 같아요? 이제 왜 졌는지 알 것 같습니까.”
기사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느 정도는…….”
“좋아요. 대충이라도 알았다면, 이번에 보여 준 것이 크게 손해 본 장사는 아니었군요. 자, 크게 깨달은 값은 해야겠죠? 토벌 전까지 저와 비슷한 실력을 쌓아야 할 것입니다. 기사단 전원!”
“아, 예…… 예?”
기사들이 얼굴이 점차 굳어 갔다. 모두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이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기대하겠어요.”
이안이 그들의 어깨를 스치며 그대로 사라졌다. 그의 발소리가 묘연해지자 누군가의 입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에휴……. 오늘부터 잠은 다 잤군.”
‘저 녀석 정말 마법사 아니야?’
본관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이안이 오지 않자 로이니스와 세리아는 그를 찾으러 병사 훈련장을 찾았다. 실프가 시시각각 이안의 위치를 알려 주었기에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이안이 살짝 발을 떼는 것을 보았다.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사람의 발로 대지를 울렸다. 그것이 작았다면 몰라도 멀리 떨어져 있던 그녀들도 느낄 수 있는 거대한 땅울림이었다.
그렇게 대련이 끝나자 이안이 느긋한 발걸음으로 그녀들에게 다가왔다.
‘백 명을 상대로 추호의 망설임조차 없다니……. 이 녀석, 도대체 정체가 뭐야.’
열흘간이나 사람 귀찮을 정도로 따라붙었는데 알아낸 것이라고는 펠타온 제국 사람이었다는 것뿐이다. 그것도 명망 높지만 이미 멸문한 귀족가 말이다.
그렇게 나름대로 조사해 봤지만, 수십 년 이내 멸문한 귀족가 중에서 속성검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은 꽤 되었다. 그중에서 이상하게도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누구의 자식이야? 어머니의 피를 타고난 건가? 그렇다면 검은 머리라 해도 이상하지는 않지만…….’
다시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리아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결코 거짓은 아니겠지만, 왠지 펠타온 제국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검은 머리를 가진 사람이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그중에서도 검은 머리를 가진 가문 하면 떠오르는 자들이 바로 라인하르트 황족.
‘하지만 라인하르트 황족 중에서 속성검을 사용했다는 인물은 아무도 없어. 게다가 이미 망해 버린 나라인데……. 그냥 흔치 않은 우연이겠지. 맞아. 우연이야, 우연.’
세상에는 많은 우연이 있다. 이안이 검은 머리인 것은 그저 수많은 우연 중에 하나일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조소를 머금던 로이니스가 문득 이안을 쳐다봤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탓인지 이안도 로이니스를 쳐다봤다.
“무슨 일입니까?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아니, 암것도.”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자 이안이 다시 세리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영지 순찰입니까? 호위를 맡긴 걸 보니, 대충 그런 것 같은데.”
세리아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방긋 웃어 보였다. 그 모습에 어색한 분위기가 다시 화사해졌다.
“호호호, 예. 물론이에요. 트라바체스 대장간에 들러서 할 이야기도 있고요. 마침 호위도 필요하고, 트라바체스에 들르는 기사가 이안 경뿐이었으니까요. 마침 잘됐다 싶어서 호위를 맡긴 거예요. 오늘 시간 괜찮죠, 이안 경?”
“괜찮습니다. 이것저것 신세 지고 있는데, 그 정도 시간이야. 뭐, 다만…….”
꾸물거리던 로이니스가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소리를 꽥 질렀다.
“왜!”
“아니, 그대도 따라올 겁니까?”
“흥! 안 가. 너희끼리 가 버려!”
로이니스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곧 이안과 세리아가 자신을 앞질러 지나가 버리자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로이니스의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안 간다고 했기 때문이다.
성격상 한번 튕겨 본 것뿐인데…….
그렇다고 재차 묻지도 않고 정말 두고 가 버릴 줄은 몰랐다.
이미 쫓아가기에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이 아까 왜 안 간다고 했는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이안이 발걸음을 뚝 멈추더니 담담한 표정으로 뒤돌아 물었다.
“정말로 안 갑니까?”
로이니스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가, 간다. 뭐…… 쳇!”
결국 그녀는 못 이기는 척 후다닥 이안을 쫓았다.
<『라인하르트』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