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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신병 오시리스 1권
녹색의 거신병



거신병 오시리스 1권(1화)
서장


일곱 개의 빛, 일곱 개의 성.
두 개의 별이 빛날 때 하나의 다리가 이어진다.
붉은 불꽃의 문지기, 푸른 별의 몽상가, 주황 모래의 가면, 녹색 숲의 대신관…….

……중략……

……가 깨지고, 세계는 하나로 합쳐진다.
전사에겐 단단한 뿔을, 왕에겐 영광의 깃을.
황혼의 때에, 길을 여는 것은…….

―제 1유적, 고문(古文) 왕의 기록 中

대륙은 크게 세 개의 국가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먼저 대륙의 남부를 차지하고 있는 멤피스 왕국. 태양신 아툼을 모시는 대신관과 국왕이 거의 동등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국가의 절반이 척박한 사막인 만큼 억세고 거친 전사들로 유명한 나라였다.
두 번째는 크로노스 제국. 크기는 세 국가 중에 가장 작지만, 중부 지방의 곡창 지대를 기반으로 부유한 상인들이 많고, 절대 권력의 황제 밑으로 잘 훈련된 중장병들로 유명한 나라다.
세 번째는 살렘 신국. 유일신을 믿는 종교 국가로서, 모든 제사와 의식을 책임지는 대신관이 나라의 모든 것을 관장하며, 부유하진 않지만 다른 나라보다 극도로 높은 단결력으로 어려운 일도 뭐든지 해내는 경이로운 나라였다.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 세 나라.
하지만 공통적인 것이 하나 있다면, 그들이 가진 모든 문명은 그들의 땅에 남겨진 유적들로부터 발굴된 ‘유물’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마법, 기술, 학문.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물을 해석하는 고고학.
세 나라의 힘의 기준은 각자 얼마나 많은 유물을 해석해 냈는가에 달려 있었다.
얼마나 많은 고대의 기술들을 습득하고, 얼마나 많은 거신병(Gigas)들을 잠에서 깨워 냈는가?
즉, 힘의 상징인 거신병들이야말로 국력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나 다름없는 것이다.

chapter.1 의식의 날, 절망의 색(1)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소환 의식의 날.
특별한 날이다 보니 신전 안은 의식을 참관하는 사제와 기사 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수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젊은이가 이번 의식에서 어떤 거신병(Gigas)을 소환할까 하는 문제는, 그들에게 하나의 오락거리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실제 황금으로 덧칠한 의장용 길만은 모든 사람들의 눈에도 또렷하게 보였다.
골든 로드(Golden Road).
의식에 참가하는 계약자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영광의 길.
각양각색의 꽃잎들이 흩뿌려져 있는 길의 양쪽에선 아름다운 여사제들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도열해 있었다.
그곳을 걸어가고 있는 쥬드는 자연스레 가슴이 펴지면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바로 이것이다. 내가 있어야 할 곳. 내가 받아야 할 대접. 미래의 대영웅에게 보내지는 선망의 시선들.
그의 귓가로 주변에 칼을 들고 도열해 있던 기사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기사단에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된 애송이가 벌써 의식을 치르다니…….”
“어쩔 수 없지. 의식 순서는 철저하게 실력주의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길, 운 좋은 놈. 이게 다 얼마 전의 토너먼트 때문일 거야. 그렇지?”
“그렇지. 유례없는 만점으로 압도적으로 1등을 했잖냐. 크흠! 이건 내가 어렵게 구한 정보인데……, 그 덕분인지 이번에 나올 큐브는 중앙에서 발굴되었대.”
“뭐? 중앙?! 그…… 태양왕이 발굴된 그곳?”
“그래, 대장군님의 태양왕이 발굴된 그곳. 높으신 분들이 어린 천재한테 거는 기대가 크다는 소리겠지. 하여간 될 놈은 뭘 어떻게 해도 되요.”
“큭! 그럼 빨간색 거신병이 나온단 소리야? 태양왕이랑 같은?!”
“그건 모르지. 큐브는 열어 봐야 아는 거니까. 하지만 명색이 중앙에서 나온 큐브인데 적어도 주황색은 되지 않겠어? 우리처럼 평범한 노란색은 안 나올걸?”
“크윽! 확 녹색이나 나와 버려라!”
“야야, 그럴 리가 없지. 미래의 대장군님일지도 몰라. 미리 잘 보여 두는 게 좋을걸?”
“…….”
쥬드의 입가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짙어졌다.
특히 신전의 구석에서 조용히 그를 노려보고 있는 한 청년을 보면서 보란 듯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꺄아악―!
그를 향해 쏟아지는 환호성. 기사들이 보내는 선망과 질투의 시선들.
그렇다.
이번 의식만 끝나면, 그의 미래는 탄탄대로인 것이다. 국왕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대장군’이라는 직위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쿵!
“호루스 기사단의 쥬드 펠릭시아. 그대는 영광스런 멤피스 왕국의 기사임을 인정하는가?”
“예, 인정합니다.”
“멤피스 왕국에 충성을 바치고, 아툼 신전의 교리에 어긋나지 않으며, 평생 신의를 지킬 것을 맹세하는가?”
“예, 맹세합니다.”
“좋다. 그대가 의식을 치르고 거신병의 기사가 될 자격이 있음을 대신관의 이름으로 선언한다.”
인자한 인상의 대신관으로부터 의식용 홀을 넘겨받는 순간, 넓은 신전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그곳에 모인 모든 이들이 앞으로 벌어질 의식에 긴장하며 집중하고 있었다.
“위대한 태양신 아툼이시여, 지금 이곳에 당신의 종이 기원하나이다. 멤피스를 지켜 낼 어린 양에게 당신의 유물로부터 비롯된 힘을 건네주시어, 모든 이들에게 아툼의 이름을 알리시고, 다시 한 번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을…….”
드드드드―
기도가 계속될수록, 멀쩡했던 신전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신관의 손에 들린 정육면체의 큐브로부터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쥬드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저 큐브가 자신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운명적인 순간이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서사시의 시작!
“……거신병을! 신의 사자를! 당신의 충성스런 종을!”
콰아아아―
“저희에게 보내, 주시옵소서!”
콰르르릉―!
그 순간, 신전의 천장이 무너지며 거대한 빛줄기가 하늘을 갈랐다.
의식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었다. 심지어 앞에 서 있던 사제들과 대신관마저도 무릎을 꿇고 나자, 이제 신전 안에서 제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오직 쥬드뿐이었다.
흡사 국왕이라도 된 듯한 희열감에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어, 어찌 이런 일이!”
“이렇게 반동(Counteraction)이 셌던 적은 태양왕 이후로 처음입니다. 설마……!”
“설마, 정말로 붉은색 거신병이……?”
사제들의 대화를 들을수록 가슴속의 기대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하나, 둘, 셋…….
마른침을 삼키며 초조하게 기다리길 잠시, 마침내 눈부신 빛이 가라앉고 시야가 돌아오는 순간…….
“아……?”
장내엔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쨍강―
“마, 말도 안 돼!”
의식용 홀을 손에서 떨어뜨린 쥬드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녹색이라고……?”
믿어지지가 않았다. 탄탄대로라고 믿어 왔던, 미래에 대한 환상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평생에 한 번뿐인 소환 의식.
일생을 함께해야 할 동반자.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거신병은 일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최하급. 녹색이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얼음송곳처럼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가슴을 푹 쑤시고 들어왔다.
쥬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신전 안의 모든 이들이 그 웃음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그렇지! 네가 날 이길 리가 없지! 하하하하!”
어깨 뒤로 질끈 묶은 검은색 머리카락. 야망이 불타오르는 뜨거운 눈빛과 차갑디차가운 냉정한 미소가 잘 어울리는 청년.
아론 임펠리아칸.
쥬드 펠릭시아에 이어 수도에서 두 번째로 유명한 청년 기사였다.
“겨우 일꾼이나 되려고 토너먼트에서 그 난리를 쳤던 건가? 한심하군, 한심해. 괜히 왔다. 시간만 낭비했어.”
몸을 돌려 떠나가는 그의 등 뒤로 웃음소리가 아련하게 남았다.
침묵에 잠겨 있던 신전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식후 파티까지 남아 있어야 할 고위 관료와 신관 들이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험. 그럼 저는 밀린 업무가 있어서…….”
“아! 저도…….”
“저도 집안에 급한 일이 있어서…….”
웅성― 웅성―
꽉 차 있던 신전이 텅 비어 버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떠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아, 실망이야. 녹색이라니…….”
“녹색이라면…… 변방, 거기로 가는 거 맞지? 그치?”
“맞아. 멤피스 최고 기사라더니, 뭐야? 다 뻥이었던 거 아냐?”
“그러게 말이다. 저것 좀 봐. 지난번에 본 주황색에 비하면 크기가 반도 안 되겠어. 쯧쯧! 저런 걸 어디다 쓰냐?”
낄낄거리는 사람들의 조롱이 들려왔다.
죽을힘을 다해 이 자리까지 올라오는 데 걸린 시간이 7년. 하지만 다시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데 걸린 시간은 하루. 아니,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꽉 깨문 입술에서 비릿한 맛이 났다. 몇 십 번이고 고개를 들어 확인했지만 이미 소환된 거신병의 색은 변하지 않았다.
“쥬드 펠릭시아 군.”
“…….”
“아무래도 파티는 힘들 것 같군. 계속 여기에 있을 텐가?”
고개를 들자 대신관이 씁쓸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신전은 텅 비어 버린 상황이었다.
남은 것은 의식을 주관한 대신관과 그의 수행 신관 두 명뿐.
“아닙……니다. 돌아가겠습니다.”
억지로 쥐어짜는 것처럼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래, 시간이 필요하겠지.”
“…….”
“정비를 마친 뒤에, 거신병 조정 기간이 되면 다시 연락하겠네.”
“……예.”
그 후, 쥬드는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다. 대신관에게 인사는 했는지, 올 때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그런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그 빌어먹을 신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미친 듯이 걸음을 내디뎠다.
인적이 없는 곳에 도착해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는 화려하기 짝이 없는 예식용 의복을 그대로 입고 있는 상태였다.
“하…… 하하……. 큭!”
찌이익―
신경질적으로 예복을 찢어 바닥에 던져 버렸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깊은 물속에 빠진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갑자기 어깨 위에 놓인 세상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쿵―!
“젠장!”
쿵―!
“제길―!”
하늘에 대고 직접 묻고 싶었다. 어째서 하늘은, 이렇게 간절할 때 절대로 도와주지 않는 것인가.
“으아아아아―!”
쾅―!
피 맺힌 절규 아래 바닥으로 핏방울이 하나 툭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