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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미솔로지 1권(25화)
10 아르카나, 디프원(2)
다섯 명은 황당함을 감추지는 못했다.
“뭐, 뭐 저런 게 있지?”
“손을 좀 봐야겠군.”
두 흑인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한 방 먹이고 싶은지 주먹으로 손바닥을 때렸다.
“참으십시오. 베놈, 버닝핸드. 저들은 우리의 일원이 아닙니다.”
금발 남성의 그 말에 두 흑인은 주먹을 내려놓았다.
베놈과 버닝핸드.
이름은 분명 아닐 테지만 그들을 부르는 칭호 같았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지금은 분명 세계의 멸망 이후. 하지만 그들과 호텔 직원의 태도가 너무 이상했다. 아니, 태도뿐만 아니었다. 그 어디에도 워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간간이 도로에 사람의 형상이 보이긴 했지만 그들은 결코 워커가 아니었다. 살아 있었고 숨을 쉬고 있었으며 때때로 자동차도 지나갔다.
마치 이곳만 멸망이 비켜간 것처럼 말이다.
“어쨌든 들어가시죠.”
금발 남성의 말에 호텔로 들어가려던 다섯 명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새, 생각보다 협의가 잘 안 되었나 보군요.”
여인의 그 말에 금발 남성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급하게 체결한 협의다 보니 말이죠. 거기다 애초에 여기는 디프원들의 땅. 우리 아르카나에게 신전을 짓도록 허락하는 건 그들로서는 탐탁지 않았겠죠.”
“그래서 이따위 다 쓰러져 가는 호텔, 그것도 방 한 칸만 허락한 건가?”
“우리 아르카나를 뭘로 보고!”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것처럼 흥분하는 베놈이라 불린 흑인 사내를 인도인 소년이 말렸다.
“참아.”
그런데 놀랍게도 소년의 그 한마디에 베놈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는 점이다.
“그럼 일단 모두 가시죠.”
금발의 남성이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자 덕지덕지 먼지가 쌓여 있던 출입문이 마치 자동문이라도 되듯 활짝 열렸다. 하지만 다른 이들 중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그게 자연스러운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초라한 로비를 무시하고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한 그들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시 한 번 표정을 구겼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엘리베이터는 하나뿐이었고 그것조차 베놈과 버닝핸드 두 명이서 타기도 비좁아 보이는 소형이었다.
“먼저 올라가시지요.”
금발의 남성은 베놈과 버닝핸드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확실히 그 두 명만 먼저 보내면 나머지는 한번에 탈 수 있을 터였다.
“…….”
“…….”
베놈과 버닝핸드는 그저 서로를 바라볼 뿐 쉽게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바로 그때 인도 소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타.”
소년의 그 말에 베놈과 버닝핸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더니 이내 엘리베이터에 구겨 타기 시작했다. 역시나 두 사람만으로 엘리베이터는 꽉 차 버렸다.
“제일 위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알고 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남은 이들은 모두 느꼈다. 엘리베이터는 아주 힘겹게 꼭대기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에, 엘리베이터도 좀 낡은 거 같네요.”
“그, 그런 거 같네요.”
다시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조금 좁은 감이 있긴 했지만, 확실히 모두 타기에 충분했다.
“…….”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먼저 타지요.”
어째선지 인도 소년은 두 사람이 먼저 탈 때까지 기다렸다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두 남녀 또한 이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
“…….”
엘리베이터가 마지막 층에 도착했을 때 베놈과 버닝핸드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제야 금발 남성은 그들에게 어느 방인지 말한다는 걸 잊었음을 깨달았다.
“아, 죄송합니다. 왼쪽 첫 번째 방입니다.”
버닝핸드는 얼굴 가득 불쾌한 심기를 드러내더니, 이내 침을 뱉으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화르르르!
버닝핸드의 바로 눈앞에 불길이 일었다.
“이곳은 신전입니다. 경건하게 행동하십시오.”
그것은 금발의 사내였다.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버닝핸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
버닝핸드는 그대로 굳어 버린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는 두려움을 가득 품은 채 눈앞에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꽃은 진짜 그곳에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뜨겁기는커녕 약간의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 불길은 자신의 온몸을 흔적도 없이 태워 버릴 터였다.
꿀꺽!
그는 천천히 머금고 있던 침을 삼켰다. 그리고 그제야 불길이 꺼지며 금발 남성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잘하셨습니다. 그러셔야지요. 자, 그럼 갈까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왼쪽 가장 첫 번째 방. 그 문을 열자 펼쳐진 것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방 한쪽 벽면을 덮은 거대한 붉은색 천에는 수많은 작은 주술 문자들로 그려진 육망성이 새겨져 있었고 그 육망성 중심에는 호루스의 눈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20세기 최고의 마술사 크라울리의 상징이었다.
상징 앞에는 붉은색 제단이 세워져 있었고 제단 위에는 황금빛 메노라 두 개가 거꾸로 서 있었다. 원래는 땅으로 향해야 할 받침대 부분은 위로 향해 있었고, 바로 그곳에 커다란 붉은 양초들이 올려져 있었다.
“…….”
방 안으로 들어선 이들은 일제히 그 앞에 무릎을 꿇으며 자신의 오른손을 왼쪽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아무도 제단에 다가간 적이 없었지만 어느새 초에는 불이 붙어 있었다.
“…….”
그들은 눈을 감았다. 침묵 속에서 경건한 기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들 기도의 대상은 크라울리가 아니었다. 크라울리에 대한 것은 단순한 선지자에 대한 예. 그들이 하는 기도는 바로 그 자신들의 것. 이름이 있든 없든. 실체가 있든 없든. 신이든 자신이든. 바로 그렇기에 그들은 침묵의 기도를 올리는 거였다.
“…….”
먼저 기도를 끝낸 이들은 손을 어깨에서 내려놓고는 조용히 다른 이들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의 손이 어깨에서 내려갔다. 그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고 금발 남성의 가벼운 손짓에 촛불들은 꺼졌다.
“자, 그러면 이제 차라도 마시면서 계획에 대해서도 상의해 보도록 하죠. 알베르트, 회의실은 어디죠?”
“아…… 예. 따라오시죠.”
여인의 물음에 알베르트라 불린 금발 남성은 잠깐 머뭇거렸다. 그리고 이내 그가 안내한 곳은 바로 맞은편 방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식당에서 주워온 것 같은 기다란 식탁에 싱크대와 작은 냉장고가 딸려 있는 그 방은 회의실이라기 보다는 초라한 휴게실에 가까웠다.
“죄송합니다. 회의실이나 기타 시설 관련된 건 협의가 되지 못했습니다.”
“아니, 아니 괜찮습니다. 자자, 앉으시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었다. 아무리 디프원들의 땅이라고 해도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럼 차는……?”
“아, 제 가방에 가져온 게 있습니다.”
알베르트는 재빨리 자신의 가방 속에서 홍차를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그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잔이랑 물을 가져오죠.”
알베르트는 커피 포트에 물을 올리고는 이내 싱크대 쪽으로 걸음을 옮겨 찬장을 열었다. 그러나 그가 가져온 찻잔을 본 다른 이들은 다시 말을 잃었다.
“……죄송합니다.”
하긴 식탁도 제대로 못 구했는데 제대로 된 티세트를 구해 놨을 리 만무했다. 그가 가져온 찻잔들은 죄다 가지각색이었고 하물며 받침대는 있지도 않았다.
“…….”
베놈과 버닝핸드는 그 모든 것을 알베르트에게 맡긴 채 자신은 모른다는 듯 창문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물이 끓고, 이후 찻물이 다 우러나올 때까지도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문만이 깔렸다.
“……자아. 그러면 일단 어떻게 해야 될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죠.”
한참 만에서야 알베르트가 그 입을 뗐다.
“그럼 일단 지금까지의 상황에 대해 보고해 주시죠.”
“예. 일단 계획대로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우선 조직 내 대부분의 회원들은 모두 제시간에 본부에 도착했고 멸망을 피했습니다. 지원금을 대주던 외부 회원들은 시간을 맞추지 못했지만, 뭐 이제 와서 투자자 따위는 의미가 없겠죠.”
“시간을 못 맞춘 건지, 못 맞추게 한 건지 모르겠군.”
베놈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
하지만 알베르트는 그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고서도 못 본 척 다시 보고에 집중했다.
“본부에서는 디프원들에게 최대한 협력하라고 했습니다. 최소한 우리가 준비될 때까지는 말이죠.”
“훗. 이깟 물고기들 따위의 도움이 그렇게 필요한 거야?”
“버닝핸드. 디프원들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이들 개개인의 능력이야 그리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들이 따르고 있는 크툴후는 아주 강력한 존재입니다. 크툴후의 이름 아래에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쓸데없는 위험들을 피할 수 있는지 당신은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할 겁니다.”
알베르트의 그 말에 여인 또한 동의했다.
“맞습니다. 우리 아르카나는 그들에게 힘을 빌려 주고, 그들은 우리 아르카나에게 크툴후의 이름으로 보호를 약속한다. 실제로 이 협정 때문에 우리가 멸망을 피할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하지만 영 기분 나쁘다고.”
“어쩔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느끼고 계시겠지만 신들이 떠난 뒤 이 세계의 힘의 흐름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우리의 힘도 약해지거나 사라질 수 있어요. 지금은 그것이 준비가 될 때까지 또 다른 신들의 이름 아래에서 숨을 죽이는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또 다른 신들 중 우리를 필요로 하는 신은 오직 크툴후뿐이고요.”
“제길.”
“모든 것은 우리 아르카나의 숙원을 위해서입니다. 그때까지는…….”
똑똑!
갑작스런 노크 소리에 그들은 말을 멈췄다.
“예! 무슨 일이시죠?”
알베르트의 물음에 갑자기 문이 열렸다. 들어온 것은 아까 입구에서 본 그 직원이었다.
자세히 보면 그의 외모는 조금 특이했다. 목 주변에 패인 기이한 주름과 긴 얼굴 윤곽에 툭 튀어나온 촉촉한 파란색 눈. 납작한 코와 움푹 들어간 이마며 턱, 생기다 만 귀의 생김새. 어딘가 사람보다는 물고기를 떠올리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곧 시간이 됩니다. 내려가셔서 의식에 참여하시지요.”
다소 갑작스럽고 무례한 듯한 태도였지만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주문은 알고 있겠지요?”
“알고 있습니다. 협약에 따라 본부에서는 멸망 전부터 외우고 있으니까요. 훈구루이 무구루우나후 크툴후 르 리에 우가후나구루 후타군. 맞지요?”
<2권에서 계속>